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47)
던전 견문록-147화(147/319)
# 147
던전 견문록
제 148 화
온몸에 힘이 흘러넘쳤다. 전처럼 잔챙이들을 상대로 힘을 빼지도 않았고, 넓은 전장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피해를 줄여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비록 시시각각 접근하는 모아이들 탓에 시간제한이 걸려버리기는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전장의 사령관의 힘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체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근력과 민첩성이…….]그간 수도 없이 봐왔던 전장의 사령관 특유의 증폭 능력이 발동했다는 메시지가 눈앞을 가득 채웠지만, 그는 메시지 창을 무시하고는 그 너머의 고르곤을 노려보았다.
무려 ‘용맹’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인은 그 칭호가 무색하게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갑자기 기세가 꺾였군. 그대의 용맹은 약자에게만 통용되는 알량한 것이던가.”
노골적인 조롱에도 고르곤은 반박은커녕 오히려 더욱 더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저벅저벅.
비명과 포효가 끊이지 않던 미궁의 중앙 통로에 그의 발소리만이 퍼져 나갔다.
“그쪽에서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지.”
고르곤이 9층 미궁의 병사들을 학살하며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김진우가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는 짧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크허엉!”
소스라치게 놀란 고르곤이 발작적으로 멀쩡한 세 팔을 휘둘렀다.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던 도중에 내지른 황망한 일격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거력은 ‘용맹’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시시하군.”
김진우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르곤의 공격을 피해내고는 곧장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부디 그대의 맷집이 그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대단하기를 바라겠다.”
“이익!”
상대를 눈 아래로 보는 그 오만함에 뒤늦게 이를 악문 고르곤이 필사적으로 팔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온 통로가 울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공격. 하지만 그중에 그의 몸에 닿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는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상체를 까딱거리며 공격을 피해내고는 오른발을 짧게 내질렀다.
“억!”
그다지 세련되지도 그렇다고 절도가 있는 것도 아닌 무성의한 발길질이었지만 결과는 결코 시시하지 않았다.
정강이를 걷어차인 고르곤의 몸이 그 자리에서 붕 떠오르더니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어어어!”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고르곤은 몇 번이나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비틀대다 쓰러지기를 반복했을 뿐이었다.
한참 끙끙거리며 발버둥 친 끝에 일어난 고르곤의 자세가 마치 외발로 선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그는 가만히 고르곤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다시 반대쪽 발을 걷어차 버렸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걷어찬 것인지 바닥을 나뒹구는 거인의 무지막지한 허벅지가 흉측하게 뒤틀려 있었다.
“어, 어떻게…….”
고르곤은 양발이 박살나는 고통보다 이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더욱 더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불신과 경악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거인에게 그는 피식 웃어보였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김진우와 10층 지저의 귀족들과 힘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실제로도 보레아스와 힘을 겨루었을 때 호되게 고생했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삭풍의 보레아스와 더불어 한때 용맹한 전사로 이름을 날렸던 고르곤은 그를 잠시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저 귀족들이 제 미궁 하나의 안위만을 지키며 틀어박혀 있을 때, 그는 사지란 사지는 전부 찾아다니고 사투를 벌이며 힘을 키우고 경험을 쌓았다.
그 과정에서 그가 지닌 ‘전승’이란 타이틀은 승리를 먹어치우며 자라나 이제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전승이란 이름이 먹어치울 승리 하나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난 틀림없이 그대에게 투항을 권유했을 테지, 하지만.”
잠깐이지만 다소 흐릿해졌던 푸른 광망이 다시 폭사되었다.
“애석하게도 지금의 나에겐 그대의 조력보다 ‘1승’이 중요하구나.”
언제 움켜잡은 것인지 꽉 그러쥔 칼이 그대로 내려쳐졌다.
[전승의 이름 앞에 작은 승리 하나가 추가되었습니다. 비록 전쟁의 판도 자체를 뒤엎을 정도로 큰 승리는 아니지만, 당당한 지저 귀족을 상대로 얻은 승리는 결코 하찮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총 78회의 크고 작은 승리를 얻었습니다.] [전승의 사령관의 효과가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사령관의 고유 능력과 특수 능력은 승리가 계속되는 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의해 주십시오. 단 한 번의 패배로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눈앞을 가득 메우는 메시지, 그 너머로 두터운 목에 붙어 있던 거대한 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
고르곤의 목이 떨어지자 미궁 전체가 활동을 중지했다.
“논공행상은 일이 끝난 뒤에 하겠다.”
마치 3일은 굶은 거지 떼처럼 몰려든 9층 미궁의 군대가 김진우의 말에 실망한 얼굴을 해보였다.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적을 몰아붙였지만, 결국 그 우두머리를 꺾지 못해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 사이에 김진우가 나타나 직접 적 수괴의 목을 베었으니, 이번 전투에서 얻은 손실을 전리품으로 복구하기에는 글러버렸다.
“본대와 합류하여 지시를 기다리라. 개별 행동은 엄격히 금하겠다.”
모아이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잔존 병력을 본대에 포함시킨 김진우는 곧장 다음 미궁을 향해 내달렸다.
다른 미궁들 역시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적을 몰아붙여놓고도 수장을 꺾지 못해 발이 묶인 9층의 군대가 김진우의 합류로 전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두머리의 목을 베었다!”
또 하나의 승리가 그의 전적에 추가가 되고, 미궁이 활동을 중지했다.
“굳이 나서지 않으셨어도 제가 알아서 처리했을 겁니다.”
그가 도착하기 전까지 적을 상대하고 있었던 모리건이 입을 비죽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온몸에 피를 덕지덕지 묻힌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이 한계에 달한 듯했다.
“말은 잘하는군.”
짧게 혀를 찬 김진우가 그런 모리건의 몸을 툭, 하고 밀어냈다. 평소라면 피하거나 버텨냈을 그녀가 그 사소한 몸짓에도 털썩 주저앉았다.
“입만 살아가지곤…….”
모리건이 분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무시했다.
승리가 거듭될수록 승기는 짙어져 갔다. 본대로 돌아가 체력을 보충한 병력들이 속속 귀환하며 전장에 합류한 덕이었다.
그렇게 힘을 정비한 9층의 군대는 목표로 했던 마지막 전장마저 단숨에 열세를 뒤엎고 압도적인 승리를 일구어냈다.
“논공행상은 나중에!”
하지만 승리를 만끽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언더 엘프들의 교란과 유인에 물러났던 모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오기 시작한 탓이었다.
“더는 무리예요. 저도 가급적이면 얻는 것 하나 없는 전투는 피하고 싶지만, 이미 냄새를 맡고 몰려든 모아이들이 바로 근처까지 접근했어요. 전투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잠깐 사이에 모아이들의 동선을 이리저리 비트느라 머리를 쥐어짠 탓에 도미니크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지금까지 시간을 끈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야.”
주변에 몰려드는 모아이들의 기척은 어마어마했다. 그간 얼마 되지 않는 언더 엘프들을 이리저리 돌려 저만한 수를 유인해냈다니, 도미니크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릭샤샤와 언더 엘프들을 불러 모아. 여기부터는 내가 맡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훌쩍 몸을 날려 호법룡에 올라탔다.
“지금부터 9층까지 쉬지 않고 달린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모아이들의 비틀린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를 향해서 김진우와 용기사들이 돌격을 강행했다.
최초의 충돌은 선두에 선 그와 용기사 둘이었다. 비척거리며 다가선 모아이들이 손톱을 세우고 이를 드러냈지만, 호법룡이 내뿜은 불길에 휩쓸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나뒹굴고 말았다.
“멈추지 마!”
다닥다닥 헤아릴 수도 없이 몰려든 모아이들과의 충돌로 다소 멈칫했던 선두의 속도가 다시금 올라갔다.
“달려!”
끝도 없이 몰려드는 모아이들을 향해 가해진 무모한 돌격, 용기사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들은 왕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두려움과 피로도 잊고 계속해서 달려댔다. 어떻게든 왕의 곁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각오가 그들의 돌격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의욕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지금이 딱 그랬다. 죽음조차 두려워 하지 않고 호법룡을 붙들고 늘어지는 모아이들로 인해 선두의 용기사들이 빠르게 지쳐가기 시작했다.
“부상자와 지친 자들은 알아서 후열과 교대해라!”
정신없이 모아이들을 베어내는 와중에도 김진우는 대열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지시에 선두의 용기사들이 분한 얼굴로 물러서고 그 자리를 또 다른 용기사들이 채웠다.
“크아아아아아아!”
새롭게 교체된 용기사들의 호법룡이 화염을 토해냈다. 그 거센 불길 속에서 밀집되어 있던 모아이들이 일거에 쓸려나갔다.
“속도를 올린다!”
용기사들의 속도가 더욱 올라갔다. 그들은 이제 창을 내지르는 대신 호법룡의 무식할 정도의 맷집을 믿고 맨몸으로 모아이들을 짓밟고 있었다.
찢겨진 살점과 사지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용기사들이 피의 길을 열어냈다.
그렇게 9층의 군대는 수도 없이 몰려든 모아이들을 관통해 9층을 향해 내달렸다.
“주인님! 이 앞은 공터예요!”
후열로 밀려난 용기사의 호법룡에 올라탄 도미니크가 비명처럼 외쳤다.
“나도 알고 있어!”
“이대로 가면 모아이들의 군대와 만나고 말아요!”
“돌아가면 너무 늦어! 차라리 이대로 돌파한다!”
지저라고 해서 좁고 좁은 토굴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널따란 공터도 있고, 종유석으로 만들어진 숲도 있었다. 그리고 9층으로 가장 빠르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공터를 지나야 했다.
“하지만! 용기사들이 너무 지쳤어요!”
쉬지 않고 모아이들을 밟고 달려온 용기사들은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혀를 길게 빼문 호법룡은 당장 쓰러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뒤를 슬쩍 돌아본 그는 이내 교체 병력마저 지쳤음을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눈에 몸을 낮게 깔고 요란스럽게 땅을 박차는 큰엄니 멧돼지들이 보였다.
“오코노투시!”
그의 호령에 다소 쳐져 있던 큰엄니 멧돼지들과 그들의 족장이 전열로 튀어 나왔다.
“길을 열어라! 뒤를 받쳐주겠다!”
“맡겨만 주십시오! 킁!”
잔뜩 흥분해 코를 킁킁거리며 앞으로 나선 큰엄니 멧돼지들이 널찍하게 열린 공터로 튀어나갔다.
“ㅤㄲㅢㅤ에에엑!”
큰엄니 멧돼지들의 포효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공터에 모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모아이들이 일거에 쓸려져 나갔다. 용기사들이 모아이들을 짓밟다시피 하며 돌격을 이어갔다면, 큰엄니 멧돼지들은 코를 땅에 처박고 모아이들을 넘겨 던지듯 처리하고 있었다. 앞 열의 멧돼지들이 그렇게 내던진 모아이들은 뒤를 따르는 큰엄니 멧돼지들의 엄니에 꿰여 즉사하고 말았다.
“길이 열렸다!”
그 무식하지만 효율적인 돌격력에 작게 감탄을 토하며 김진우가 뒤쳐진 이들을 독려했다.
과연 돌격력만으로는 용기사들 못지않은 큰엄니 멧돼지 일족의 활약이었다.
그렇게 김진우와 그의 군대는 모아이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공터마저 돌파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린 9층으로 향하는 통로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