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49)
던전 견문록-149화(149/319)
# 149
던전 견문록
제 150 화
하지만 김진우의 입장에서 굳이 모리건의 의문을 풀어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따금씩 위험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비록 수하로 거두었다고 하나 100퍼센트 신뢰하기에는 꺼림칙한 구석이 너무도 많았다.
“피곤하군.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하도록 하지.”
고개를 돌린 그는 아예 눈까지 감아버렸다. 명백한 축객령,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빤히 느껴지는 시선과 기척에도 그는 모르는 척했다.
저벅저벅.
한참이나 그 자리에 머물던 모리건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포기했나 싶었던 그였지만 이내 그녀의 걸음이 오너 룸의 출구와는 반대편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느낌,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바로 지척에 숨결이 닿을 듯 그녀가 다가서 있었다.
붉은 눈동자, 불길함으로 번뜩이는 말간 눈매를 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을 떨쳐냈다.
모리건은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지?”
조를 듯 목을 움켜쥔 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큭.”
그녀는 숨이 막히는지 마른기침을 몇 번 토해내더니,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부탁드려요, 제겐 중요한 일이에요.”
포악하고 오만한 까마귀답지 않은 절실함에 그가 무심코 손아귀의 힘을 풀고 말았다.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자 모리건이 다시 한 번 애원해 왔다.
필시 우스투스를 흡수하고 얻은 외눈박이 군주의 파편과 그녀의 태도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이토록 필사적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옛 주인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간 보아왔던 모리건의 성정이 너무도 차가웠다.
그녀는 적의 용맹을 비웃고, 그 죽음마저 조롱하는 진정한 흉조(凶鳥), 그 자체였으니까. 그 흉악한 전장의 사신이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을 것처럼 매달려 애원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무엇이 그대를 그토록 간절하게 만드는 거지?”
김진우의 질문에 모리건이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좋아. 대신 내게도 무언가를 기대하지 마라.”
어차피 이쪽은 아쉬울 것이 없다. 그녀가 이토록 매달리는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저 호기심에 불과할 뿐, 굳이 꼭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는 말뿐이 아니라 정말로 들을 생각이 없었다.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그대로 내팽개쳐 버렸다.
“그대가 가지 않으니, 내가 가도록 하지.”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저앉은 채 망연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리건을 보며 그가 혀를 찼다.
“자, 잠깐만요!”
애타는 음성이 들려왔지만 그는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랬더니 다시 한 번 그녀가 그를 붙잡았다.
“모리건.”
김진우의 음성이 착, 하고 가라앉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푸른빛이 일렁이며 서서히 사나운 기운이 들어찼다.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어지간한 지저의 크리쳐들 따위는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살벌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모리건은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똑바로 눈을 마주쳐왔다.
“아아…….”
그런데 그 눈빛이라는 게 참으로 묘했다.
분명 이쪽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 정작 그 사나운 시선을 받는 그녀는 어쩐지 상기된 얼굴로 달뜬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면서도 황홀해 보이기까지 했다.
“분명 말했다, 모리건. 두 번은 참지 않는다고.”
그 끈적끈적한 시선이 꺼림칙해 그는 더욱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자연스럽게 분노한 기운이 흘러나와 사방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기운이 전과는 달리 사나운 맹수라기 보다는 제왕의 위엄과도 같았다. 스스로는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분명 예전과는 다른 종류의 힘이었다.
우스투스의 힘을 흡수하고 난 뒤에 일어난 변화였다.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그 광오하고도 오만한 기운, 그녀는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비척거리며 다가섰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김진우가 차갑게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는 그녀가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가차 없이 벌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털썩.
덮칠 것처럼 다가서던 모리건이 별안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극진한 공경의 자세, 그녀가 한 술 더 떠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나의 왕이시여.”
그녀의 감격에 찬 음성이 들려오는 순간, 거의 동시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강대했던 외눈박이 군주를 바로 곁에서 모셨던 전장의 까마귀는 당신에게 깃든 옛 주인의 힘을 기가 막히게 감지해냈습니다. 감격에 찬 그녀에게는 당신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잊혀진 힘의 조각을 찾았는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던 영혼의 계약만이 머릿속에 가득합니다.] [옛 고대의 전쟁 영웅, 전장의 까마귀, 모리건이 진실된 마음으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소환의 계약에 따른 굴종이 그녀 스스로가 바치는 진정한 충성입니다.]“왕이시여!”
모리건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광기에 차 다시 한 번 왕을 부르짖었다. 그 맹목적인 모습에 어지간한 김진우마저도 식은땀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지저의 시스템은 착실하게 그녀의 변화를 알려주었다.
[모리건은 타고난 전사이자 전략가입니다. 하지만 이제껏 보아왔던 그녀의 능력조차도 본래 힘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진정한 힘은, 하이로드와 함께할 때만이 빛을 발합니다.] [모리건이 잃어버렸던 진정한 이름을 찾았습니다. 그녀가 잃어버린 이름은 ‘검은 흉조(凶鳥)’, 전사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사신의 이름입니다.] [모리건의 모든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고유 능력, ‘장송곡’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메시지를 본 순간 김진우는 알 수 있었다. 우스투스에게 흡수한 외눈박이 군주의 힘이,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온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
빛에 파묻혀버린 세상. 어느 순간이 되자 그는 눈앞이 확 트이는 것을 느꼈다. 이제껏 그가 봐왔던 세상보다 몇 배는 밝은 세상이 그를 반겨주었다.
[우스투스를 흡수하며 얻은 파편의 권능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저의 신비가 개입했습니다!] [검은 흉조, 모리건은 외눈박이 군주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던 이입니다. 그녀의 각성에 외눈박이 군주의 파편이 완전히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이 모은 군주의 파편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외눈박이 군주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외눈박이 군주의 능력, ‘진실의 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메시지 너머로 생소한 창 하나가 더 떠올랐다.
[검은 흉조, 몹시 흥분한 상태.]“이게 대체…….”
필시 모리건의 심리 상태일 게 분명한 메시지는 어지간한 일은 전부 겪었다 자부하는 그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황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메시지는 그가 혼란을 수습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연달아 떠올랐다. 게다가 이번에 떠오른 메시지는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선택의 순간이 왔습니다.] [당신은 이미 하이로드의 자격을 얻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이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완전한 하이로드의 자격을 계승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이로드를 선택할 경우, 지저 자작의 위를 박탈당합니다. 지저 귀족이 되며 누렸던 특권을 모두 잃게 됩니다.] [하이로드의 자격을 포기할 경우, 지저 자작의 위가 유지되고 변화가 생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정쩡하게 개화한 하이로드의 기운은 평생토록 당신의 몸에 남아 찬탈자의 주의를 끌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고작 옛 군주의 수족에 불과했던 모리건조차도 파편의 기운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찬탈자는 검은 흉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이 높은 존재입니다. 당신은 결코 찬탈자의 눈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선택이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메시지 창은 마치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듯 한 가지 선택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눈앞에서 정신없이 번쩍이는 메시지를 보며 김진우는 입을 열었다.
“하이로드의 자격을…….”
그의 시선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왕을 찾는 모리건을 향했다. 그리고 다시 9층 지저보다 더욱 깊고 깊은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짐승처럼 살아왔던 토굴꾼 시절, 그리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어갔던 토굴꾼들의 모습이 하나둘 스쳐갔다. 끝끝내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던 그 시절의 인연들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랐다.
‘너희들은 자유다.’
경멸도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던 거미 공작의 선언이 마치 어제처럼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말간 눈동자를 떠올린 그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포기하지 않겠다.”
[새로운 하이로드의 탄생은 분명 온 지저의 축복을 받아야 할 뜻깊은 일이지만, 지금의 지저는 하이로드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저의 모든 존재들이 당신으로부터 등을 돌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하이로드의 자격을 계승하시겠습니까?]이러나저러나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 대답했다.
“계승하겠다.”
[선택은 결코 되돌릴 수 없습니다.]메시지가 위협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기분 탓일까. 김진우는 이쯤 되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고 말았다.
“이 세상에 되돌릴 수 있는 선택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아.”
그는 마치 누군가와 대화라도 나누듯 낮게 읊조렸다.
[…하이로드의 계승을 시작합니다.] [지저 자작 김진우의 작위가 박탈되었습니다.] [지저 귀족의 고유 능력이 모두 비활성화 되었습니다.]귀족의 작위가 박탈되었다 해서 딱히 변한 것은 없었다. 평소에도 이따금씩 발동하는 귀족의 위엄 능력이 아니면 그 스스로도 귀족의 위를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귀족이 되면서 딱 하나 그가 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사단은 오직 지저 귀족에게만 허락된 능력입니다. 그간 복속시켰던 미궁의 주인들과의 계약이 모두 자동으로 해지되었습니다.]기사단이었다.
이 또한 예상했던 바였다.
이번 10층과의 전쟁을 통해 그는 9층의 군대가 귀족들과의 전투에서 제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속이 쓰리지만 손실을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이로드의 권능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더 강대했던 모양이다. 그는 앞에 떠오른 새로운 메시지를 보고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비록 봉신의 맹세는 깨어졌지만, 9층 전체가 당신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이로드의 권한에 의해 9층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