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50)
던전 견문록-150화(150/319)
# 150
던전 견문록
제 151 화
57. 각성
[9층 전체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는 하나의 왕국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이로드의 반열에 오른 당신은 ‘왕’이 되기에 그 자격이 충분합니다.] [하이로드 김진우가 9층의 진정한 ‘왕’이 되었습니다.] [기존의 미궁이 변화합니다.] [변화가 완료되기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9층에 들어설 수도, 또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메시지가 끝나기가 무섭게 온 세상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천장이 주저앉고, 바닥이 들썩거렸다.
[변화 완료까지 359:59:54]***
이변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11층의 백작들이었다.
끄에에엑!
한때는 필시 이름 있는 군주였을, 하지만 지금은 무너진 육신과 비틀린 심령 탓에 한낱 비스트만도 못한 신세가 된 거대 모아이는 듣기 거북한 비명을 질러댔다.
당장 소멸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물며 그 상대가 다른 이도 아닌 철혈의 아나톨리우스였다.
그런데 철검 한 자루를 움켜쥐고 마지막 일격을 내려치려던 아나톨리우스는 어쩐 일인지 굳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나톨리우스님!”
찢어지는 비명 소리에 아나톨리우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 그의 눈앞에 흐물거리는 거체를 일으킨 모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해일처럼 온 세상을 덮고 달려드는 그 모습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위협적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검을 떨쳐냈다.
위협적이었던 기세에 비해 적의 거체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쪼개지고 말았다. 그렇게 잘려져 나간 몸뚱이 중 절반이 허겁지겁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당했군.”
그간 자신의 영지를 무던히도 괴롭혀 왔던 모아이의 우두머리를 잡을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아나톨리우스가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는 이내 심각한 얼굴로 어둠 너머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이게 대체…….”
거대 모아이의 핵을 파괴하기 직전, 그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힘의 파동을 느꼈다.
그 파동이 얼마나 거칠고 흉악한지 적을 앞에 두고도 그만 한눈팔고 말았다. 그 대가로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만, 이는 중요치 않았다.
지금은 일천의 모아이들을 이끄는 적의 수괴를 처리하는 것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의 파동이 더욱 더 신경이 쓰였던 탓이다.
폭발할 듯 퍼져 나갔다 다시 은은하게 사방을 덮어오는 에너지, 그에게는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새로운 미궁이 지저에 들어설 때면 늘 보아왔던 탄생의 빛이 꼭 지금의 에너지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느낀 기운은 최소한 11층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층을 넘어서까지 느껴지는 이런 엄청난 기운이라니,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일개 미궁의 탄생이 다른 층까지 영향을 주었다면, 최소한 공작 이상의 귀족과 미궁이 탄생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한 귀족들 중 새롭게 공작의 위에 오를 만한 이는 없었다.
“왕이시여!”
아나톨리우스는 자신을 부르는 수하의 음성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흩어진 모아이들을 추격할 것인지를 묻는 수하의 얼굴에는 의문 대신 초조함이 가득했다.
“이대로라면 적을 놓치고 맙니다!”
아직도 어딘가 꿈을 헤매는 듯한 아나톨리우스의 모습에 철가면을 쓴 기사가 거듭 소리쳤다.
“어서 명령을!”
“아, 병력을 셋으로 나눠 적의 주력을 쫓…….”
명령을 내리던 아나톨리우스가 또다시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약동하던 힘의 파동이 일순간 치솟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가들…….”
지금 이 순간 철혈의 아나톨리우스는 9층에 웅크리고 있을 나가들의 왕을 떠올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이 기묘한 현상이 분명 그와 관계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같은 시각, 이변을 눈치챈 것은 아나톨리우스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백작들 중 9층과 인연이 있는 악몽의 디나리온과 절망의 파르테논 역시 아나톨리우스처럼 나가들의 왕을 떠올렸다.
***
심층의 백작들이 9층에 일어난 이변의 언저리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9층에 거하는 이들은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탐식의 땅을 비롯한, 요새와 인접해 있던 미궁들이 가장 먼저 변하기 시작했다.
“어? 어?”
가만앉아 탐식의 덩어리들이 보내오는 영상을 지켜보던 우서는 갑작스러운 진동에 얼빠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점액질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었다면 왕좌에서 굴러떨어져 볼썽사나운 꼴을 보일 뻔했다.
“아무도 못 봤겠지?”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헛기침하던 우서가 정색하고는 다시 왕좌에 걸터앉다가, 천장에 들러붙어 빤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점액질 덩어리를 발견했다.
“커흠.”
주책맞은 우서라도 자신의 미궁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는지라 체면을 차린답시고 헛기침하며 점액질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자식 같은 점액질 덩어리들이었지만 이럴 때면 당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생각이란 게 있기는 할까.
쿠웅!
시답지 않은 잡생각으로 히죽거리던 우서는 다시 한 번 느껴지는 진동에 온몸을 단단하게 일으켰다.
“뭐, 뭐지?”
뒤늦게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상황을 파악하려 해보았지만, 그보다 갑작스레 일어난 빛무리가 그를 집어삼키는 것이 더욱 빨랐다.
“끄, 끄엑! 살려줘!”
비명 하나를 남겨두고 그는 이내 완전히 새하얀 섬광에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같은 상황이 9층 지저의 곳곳에서 일어났다.
땅이 흔들리고 천장이 가라앉았다. 흙먼지가 솟구친다 싶더니 이내 눈부신 빛무리가 미궁을 집어삼켰다.
김진우가 이변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9층의 모든 미궁이 빛무리 속으로 잠겨들고 난 후였다.
미궁을 감싼 빛무리는 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는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다시 요새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나가들의 요새 역시 다른 미궁처럼 새하얀 빛에 잠겨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다른 미궁들과는 다르게 요새를 집어삼킨 빛은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점 정도였을 뿐이다.
새하얗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간신히 오너 룸을 찾은 그는 도미니크를 불러 보았다.
“도미니크!”
평소였다면 부르는 순간 바로 모습을 드러냈을 그녀가 나타나지를 않았다. 퀀투스와 다른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지저에 혼자 덩그러니 내동댕이쳐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 모든 현상이 그가 하이로드에 오른 이후 벌어진 일들이었다.
[변화 완료까지 앞으로 311:38:24.]요새의 상태 창 역시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계속해서 줄어가는 숫자 하나였을 뿐이었다.
“미치겠군.”
포탈이 열리지를 않으니, 지상으로 향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표시된 시간이 다 흘러갈 때까지 적막한 지저에 혼자 있어야 할 판국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하릴 없이 홀로 있기에 이곳은 결코 쾌적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평소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던 모리건의 등장에 그가 그토록이나 반색한 것은.
“나의 주인이시여.”
하이로드의 반열에 오른 이후로 태도가 완전히 돌변한 모리건이 사뿐사뿐 걸어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모두가 사라진 이때, 홀로 나타난 그녀라면 무언가를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가 반색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정작 모리건 역시 상황을 몰라 어리둥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망할.”
결국은 기다리는 것밖에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무료한 시간이 흘러갔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하얗게 바랜 세상은 여전했고,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와 모리건뿐이었다.
미리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면 뜻깊게 사용할 수 있었을 소중한 시간이 다소 허망하게 흘러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아이를 밀어내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을 심층의 백작들을 생각하면 시간이 더욱 아까웠다.
그래서 그는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를 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10층과의 전쟁에서 얻은 귀족의 인장, 옛 권능의 파편을 흡수한 것이다.
폭발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장을 흡수한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힘이 강화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김진우는 그렇게 늘어난 힘을 가늠하기 위해 모리건과 박투를 벌였다.
전투 형태인 까마귀의 모습으로 돌아간 모리건은 전보다 한층 더 불길한 기운을 풍겨댔다. 가뜩이나 새하얗게 변해버린 세상인지라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마치 새하얀 천 위에 묻어난 얼룩처럼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전력을 다해라.”
그녀에게서 시작된 불길한 기운, 죽음의 향기가 서서히 주변으로 퍼져 나가다 어느 순간이 되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던 참이랍니다.”
저 지저 어딘가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깊고 음산한 음성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근래들어 어딘지 모르게 꽃밭을 거닐 듯 들떠 있던 모리건이 돌변하여 적을 앞에 둔 것처럼 사나워졌던 탓이다.
“부디 조심하세요. 흉조의 부리는 때때로 원하지 않는 불행을 노래해야 하는 경우가 있답니다.”
제 스스로를 흉조라 칭한 그녀가 날개를 확 하고 펼쳐 들었다.
과연 외눈박이 군주의 파편과의 공명으로 검은 흉조라는 이름을 되찾은 모리건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퍼드드득!
불길한 날개짓 소리가 온 사방에서 시끄럽게 울려대고, 동서남북 할 것 없이 빳빳하게 끝을 세운 깃털이 날아들었다.
김진우는 과하지 않게 몸을 슬쩍 트는 것만으로도 수십 개의 깃털을 피해냈다. 하지만 검은 깃털들은 마치 유도장치라도 달린 것처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결국 그는 몸을 피하는 대신 허리춤의 칼을 뽑아 이리저리 휘둘러댔다. 묵직한 충격과 함께 검은 깃털 수십 개가 튕겨져 나갔다.
콰드득!
바닥, 천장 할 것 없이 깃털이 파고들어 단단한 암석을 산산조각 냈다.
“음.”
하지만 허공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신경 쓰느라 정작 모리건의 행적을 놓치고 말았다. 그 대가로 그는 심장 어림에 닿은 모리건의 발톱을 보며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주인님의 문제가 뭔지 아세요?”
오만상을 다 쓴 김진우를 빤히 바라보던 모리건이 속삭였다.
“주인님은 분명 강해요. 하지만 그 강함은 절대적이지 않아요.”
무리한다면 반격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진짜 전투도 아닌 대련에서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불쾌함을 꾹 눌러 참았다.
“주인님은 경험이 너무 없어요.”
전승의 사령관이 이룩한 업적은 진짜배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건은 그가 경험이 없다 말했다.
“다수를 상대로 주인님보다 더 뛰어난 힘을 발휘할 이는 많지 않아요. 고작해야 심층의 백작 중 일부가 그나마 비슷한 수준일 거예요. 실제로 주인님은 다수를 상대로 단 한 번도 패배해본 적이 없으시죠. 하지만, 상대가 평범한 다수가 아닌 진짜 강자, 하나라면 어떨까요.”
그제서야 김진우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인님이 이제껏 상대해본 이들 중에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이는 보레아스. 그는 뛰어나긴 해도 고작 10층의 남작에 불과해요.”
모리건의 말이 맞았다. 그가 상대했던 강자라고 해봐야 고작 11층도 아닌 10층의 귀족들이 전부였다.
그런 그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입증하기는 했지만, 그 사실이 그가 강자들과의 경험이 많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앞으로 그가 상대해야 할 이들은 최소한 심층의 백작 이상이었고, 어쩌면 공작과 찬탈자와도 이른 대면을 하게 될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지?”
김진우가 찌푸려졌던 얼굴을 펴며 물었다.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저 멀리 내다버린 후였다.
“힘을 키우는 것보다 지금 주인님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게 우선이에요. 주인님의 몸에는 미처 다 소화해내지 못한 힘이 어마어마하게 잠들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힘을 가장 빠르게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심장 어림에 닿아 있던 모리건의 발톱에 힘이 들어갔다. 살점을 파고드는 고통에 그가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실전이랍니다.”
퍼드득, 하고 날개짓 소리가 들리고 모리건이 다시 날뛰어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