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51)
던전 견문록-151화(151/319)
# 151
던전 견문록
제 152 화
58. 대미궁
김진우는 숨을 헐떡이는 모리건의 목을 움켜쥔 채 씨익 웃어 보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그리 말한 그가 툭, 하고 손을 풀어주었다. 목이 졸린 채 컥컥대던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과격한 전투가 무려 일주일이나 이어졌다. 처음에는 굴욕적인 패배를 거듭했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이다. 그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힘이 서서히 드러나며 조금씩 힘의 균형이 맞는다 싶더니 어느 순간이 되자 모리건은 그를 감당하지 못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지닌 힘은 모리건의 각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전승의 사령관, 정복자. 그가 지닌 타이틀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았으며, 하이로드에 오르며 강화된 육체 능력은 검은 흉조 따위는 눈 아래로 볼 정도로 대단한 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토록이나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모리건의 말마따나 진짜 강자와의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탓이리라.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과격한 훈련은 그의 약점을 보완해 주었다. 그 결과 1주일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그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능력이 아직도 진화중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리건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녀와의 훈련으로는 더 이상 그의 힘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 그의 능력을 어떻게 성장시킬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파편을 찾으세요. 지저 어딘가에 흩뿌려진 또 다른 파편이 있을 거예요.”
간신히 기침을 멈춘 모리건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9층이 빛무리에 잠겨들고 난 이후,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그와 그녀뿐이었다. 당연하게도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고 그는 그녀를 전처럼 경계하지 않게 되었다.
최소한 그 스스로가 외눈박이 군주의 기운을 품고 있는 한 그녀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들 역시 우스투스, 또 나처럼 찬탈자의 눈을 피해 웅크리고 있겠지. 그런 이들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꽁꽁 숨어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이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우연과 행운이 겹쳐 찾아낼 수 있었던 이전의 파편들처럼 행운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꼭 주인님이 그들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쯤이면 그들 중 몇몇 정도는 주인님의 각성을 느끼고 이곳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
“이만 주무세요.”
그간의 훈련을 모두 마친 그날, 모리건은 언제나처럼 그의 침실까지 찾아와 마치 시녀라도 된 것처럼 시중을 들었다.
서툰 손길이었지만 그 마음만큼은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정성스러운 태도였다.
“음…….”
그런데 오늘은 왠지 그녀가 그의 침실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이제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색 바랜 세상도 끝이군요.”
모리건은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꺼내들었다.
“요새가 다시 깨어나면 사라졌던 이들도 돌아오겠죠. 미궁의 주인들도, 요새의 나가들도, 그리고…….”
그녀는 어쩐지 촉촉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미니크도.”
어색한 분위기, 근래들어 부쩍 나긋나긋해졌다곤 하지만 전장의 사신으로 군림하는 검은 흉조가 바로 그녀의 본래 모습이었다.
도통 적응되지 않는 모습에 그가 대답 대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쉬워하는 건가?”
지금의 모리건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물었더니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바빠지겠죠?”
“아마도. 당장 9층이 어떻게 변할지는 몰라도 이번 일로 분명 하이로드의 존재를 탐탁찮아 하는 존재들의 주의를 끌었을 테니까.”
당장 찬탈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고, 모아이들로 인해 생긴 다운 잼의 고갈 현상도 풀어내야 했다. 그것만 해도 한동안은 정신없이 보내야 하리라.
“답지 않군. 할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하는 게 그대 성격일 텐데?”
어쩐지 언저리만 맴도는 듯한 기분에 그가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주인님.”
그랬더니 모리건이 갑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선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Amicitiae nostrae memoriam spero sempiternam fore…….”
들릴 듯 말 듯 빨간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녀의 말은 그가 생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미소를 보이더니,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부디 좋은 꿈꾸시기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사를 남긴 모리건은 이내 사라졌다.
홀로 남은 김진우는 왠지 모르게 여운이 남는 그녀의 말에 몇 번이나 입을 웅얼거려 보았지만,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그 억양과 발음에 이내 포기하고는 잠을 청했다.
***
심장이 적출당한 채 축 늘어진 시체는 참혹하기만 하건만, 이를 바라보는 디나리온은 그저 눈살을 한 번 찌푸렸을 뿐이다.
“쯧, 애꿎은 몽마만 또 희생시켰군.”
말과는 달리 그의 차가운 눈빛에는 한 점 연민의 빛도 서려 있지 않았다.
“치워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복하고 있던 몽마들이 나서 시체를 수습했다.
“이상해, 이상해.”
말간 눈으로 혈흔을 바라보던 디나리온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도 남지 않은 오너 룸, 하지만 그는 꼭 누군가와 대화라도 나누듯 중얼거렸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도저히 그의 꿈에 닿을 수가 없어.”
“혹시 잠을 안 자는 건 아닐까요?”
허공에서 불쑥 요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대꾸였지만 디나리온은 놀라지 않았다.
“아니, 설령 그가 잠을 자지 않더라도, 아리아네와는 연결이 됐어야 했어.”
디나리온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리아네는 얼마 전, 바르톨로뮤에게 호되게 당해 부상이 심하다고 들었어요. 미몽의 여왕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쓰고는 있지만, 그녀는 출신부터가 천하디 천한 서큐버스 일족이 아닙니까. 기운이 상해 왕의 부름에 답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하기엔 그녀의 존재 자체가 느껴지지 않아.”
미몽의 여왕은 10층 귀족 연합군의 침공 때, 9층의 동맹군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김진우에게 봉신의 맹세를 했던 미궁의 주인이다.
그런데 디나리온은 마치 그녀가 자신의 수족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쯧, 답답하군. 교활한 백작들 때문에 전쟁이 길어지는 통에 정보력이 형편없어졌어.”
힘을 숨기느라 지저의 난리를 방관한 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음에도 디나리온은 뻔뻔하게 지껄여댔다.
“만약에 말이에요.”
“다리우스, 나는 만약이란 말을 싫어한다. 그대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디나리온의 능력은 무의식과 불확실을 다루는 악몽의 재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끔찍할 정도로 불확실성을 싫어했다.
그렇기에 철혈의 아나톨리우스가 되도 않을 거래로 나가들의 왕에게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꽤나 쓸 만한 축에 속하던 미몽의 여왕과, 불패의 용병까지 보내 9층을 감시토록 했다.
“벌은 이야기가 끝난 뒤에 받을게요. 부디 제게 기회를 주세요.”
그런 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우스라 불린 여인은 ‘만약’을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혹시 그가 파편에 접촉한 것이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어. 같지도 않은 별동대에 파편을 섞어 넣었을 때도 조용히 넘어갔던 그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신중하고 교활해. 그런 그가 찬탈자의 눈에 띄는 위험을 자초할 리가 없다.”
별동대에 인위적으로 숨겨두었던 고대 군주의 파편은 디나리온이 어렵사리 구한 옛 군주의 파편이었다. 지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광휘의 군주’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쓰던 옛 군주의 파편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하찮은 것이었지만, 그의 생각을 확인해 주기에는 충분했다.
옛 군주의 힘은 지금 지저의 존재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저 깊디깊은 14층에 웅크리고 있는 찬탈자의 수작인지, 그도 아니면 원한을 잊지 않은 고대 군주들의 잔존 사념 때문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귀족들을 비롯한 미궁의 주인들이 그 힘을 다룰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런 힘을 집어삼킨 것이 바로 나가들의 왕이었다. 분명 힘을 얻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나가들의 왕은 11층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 속에서도 단 한 번도 그 힘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다른 백작들의 시선을 의식한 탓이리라.
“그래도 한 번 확인을 해봐야겠군.”
생각에 잠겨 있던 디나리온이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윤희를 불러 들여라. 그대의 생각이 맞다면 그녀에게 필시 변화가 생겼을 테니까.”
윤희 역시 디나리온이 고대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해 뿌려둔 지저의 수많은 씨앗 중 하나였다.
가장 근처에 두고 지켜보았지만 반밖에 섞이지 않은 지저 귀족의 피가 옛 군주의 파편에 닿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결국 쓸모가 없어져 내다 버린 그녀였건만, 이런 식으로 활용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아나톨리우스와 파르테논이 낌새를 눈치채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대가 직접 가보는 것이 좋겠군.”
“왕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블랙 머천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라. 지금은 웅크리고 있다고 하나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자들이다. 어쩌면 아래층 존재들 이상으로 위험한 이들일지도 모른다.”
“명심하겠나이다.”
허공에서 울려대던 요사스러운 음성이 곧바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디나리온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 9층 어딘가에 있을 나가들의 왕을 생각하며 어둠을 응시했다.
“나가들의 왕이여.”
그는 마치 눈앞에 김진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읊조렸다.
“부디 그대가 가는 길이 나와 다르지 않기를 바라노라.”
그렇게 말하는 디나리온의 눈빛이 어쩐지 지독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
9층의 이변을 알아차린 것은 디나리온뿐만이 아니었다. 각기 9층에 심어둔 첩자들과의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나톨리우스와 파르테논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입이 무거운 수하를 보내 9층을 정찰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만약 입을 꾹 다문 9층의 통로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목적한 바를 이루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입을 닫은 통로는 그들을 거부했고, 그들은 9층으로 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포탈을 통해 8층으로 향했다 다시 9층으로 향한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꽉 막혀버린 통로를 보고는 바로 돌아와야 했다.
각기 생각하는 것도, 원하는 것도 달랐지만 두 백작들의 조치는 한결같았다. 그들은 최대한의 수완을 동원해 9층의 이변이 저 아래층까지 퍼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것이 무슨 목적에서였던 간에 그 덕분에 김진우는 9층의 상황이 곧바로 하이로드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11층의 세 백작이 시간을 벌어준 덕에 무사히 9층을 수습할 수 있었다.
[변화가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하이로드의 격에 맞는 미궁은 지저에 단 하나뿐입니다.] [대미궁이 생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