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54)
던전 견문록-154화(154/319)
# 154
던전 견문록
제 155 화
59. 선착순
미궁의 경계와 방어를 위해 설치한 위성 미궁을 제외하고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이 바로 우서의 미궁이었다.
대미궁의 탄생과 동시에 정신을 차린 우서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켜 단단하게 세웠다.
“이게 뭐야!”
휑하게 변해버린 탐식의 미궁, 온갖 고생을 다 하며 겨우 얻은 듀얼 코어가 금이 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시간으로는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의식의 흐름이 멈춰 있었던 우서에게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미궁이 갑자기 망해버린 꼴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충격받은 우서가 제 자리에서 마구 펄떡거리며 난동을 피워댔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위태롭던 두 개의 핵이 완전히 부서져 먼지로 변해버렸다.
“어? 이런 망하아아알!”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린 미궁의 잔재를 움켜쥔 우서가 절규했다. 평소 촐싹거리고 생각 없어 보이던 우서였지만, 나름대로 나가의 요새를 따라 듀얼 코어까지 도입할 정도로 야망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야망을 이루어줄 근간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으니, 미치지 않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으허어어어.”
급기야 나중에 가서는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얼빠진 소리를 내뱉던 우서가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도 잠시, 미궁을 살펴 본 우서는 재기의 가능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미궁의 흔적만을 발견하고는 다시 광분해 날뛰어댔다.
이번에는 정말로 화가 났는지, 멍하니 주변에 늘어서 있던 점액질 덩어리들이 몇이나 그 난리통에 휘말려 소멸되고 말았다.
“후우…….”
한참을 그리 날뛰어대던 우서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겨우 진정된 건가 싶었지만, 딱딱하게 일어선 점액질 피부를 보면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실제로도 우서는 주책 맞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날이 선 모습이었다.
날카롭게 눈을 번뜩이던 우서가 흐물거리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점액질로 둘러싸여 있던 사랑스러운 미궁이 이제는 퍼석하게 말라 있는 것을 본 그가 다시 우울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다시 흐물거리며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서가 사라지고 그 뒤를 따라 탐식의 덩어리들마저 사라졌다.
적막해진 미궁에 남은 것은 바싹, 말라버린 토굴과 한때 이곳에 미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을씨년스러운 흔적들뿐이었다.
그사이로 길게 이어진 점액질의 흔적이 저 멀리 대미궁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궁을 잃고 토굴로 내몰린 이들은 전부 대미궁으로 향했다.
이제껏 벌어진 9층의 이변들은 전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나가들의 왕이 일으킨 것이니, 필시 이번 일도 그가 관여했을 거란 생각이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설령 그가 벌인 짓이 아니라고 해도 어쩌면 그에게 해결책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대미궁으로 향하는 이들 중에는 충격과 분노로 이성을 잃은 이들 역시 존재했다.
그들은 이동 중에 만나는 모든 이들을 적대했으며, 개중 흥분이 지나쳤거나 과격한 성정을 지닌 이들은 이동 중인 이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대미궁이 가까워질수록 그렇게 분노에 휩싸인 무리는 늘어만 갔다. 급기야 이성을 잃은 이들이 무리를 이루고 대규모로 다른 이들을 습격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미궁을 잃은 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닥쳐! 아무도 못 믿어! 네놈들이 수작을 부렸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
밑도 끝도 없는 분노, 그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상실감과 분노를 보상받기를 원했고, 실의에 빠져 무력하게 걸음을 옮기는 다른 이들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사냥감들은 분노보다 실의가 컸고, 상실감이 큰 만큼 무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무력하게 폭도들에게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질이 드세기로 유명한 망치와 모루의 왕 말락수스를 필두로 하여 아직 이성이 남아 있는 아리아네와 헤카림등이 폭도 무리 몇을 격퇴했다.
하지만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미궁과 그 핵은 지저의 주민들이 야만과 본능보다 이성을 따르게 만드는 근원이었다. 미궁이 없다면 그들은 지저를 헤매는 야생 크리쳐나 비스트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 존재의 근간을 잃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와 본능에 잠식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개중에는 벌써부터 언어와 이성을 잃고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간 이들조차 존재할 지경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동료가 사나운 짐승이 되어 달려드는 경우가 이어졌다. 당연하게도 아직 이성이 남아 있던 이들은 잘게 무리를 쪼개 다른 무리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나가들의 왕이 세운 깃발 아래 세워졌던 얄팍한 연합이 단숨에 깨어져 나가고, 9층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워졌다.
설상가상으로 방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통로를 넘는 모아이들의 수마저 늘어나고 있었다. 대미궁으로 향하는 길은 그렇게 지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지옥은 대미궁에 도착하고나서야 비로소 끝이 났으니, 일만이 넘던 난민과 폭도는 절반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
***
“왕이시여!”
대미궁의 경계에 도착한 이들이 목놓아 왕을 부르짖었다. 봉신의 계약은 진즉에 깨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김진우를 왕이라 불렀다.
하기야 주종의 관계를 벗어났다고 하나 이제 와서 감히 전승의 사령관에게 대거리를 할 정신 나간 이들은 없었다.
폭도들마저도 미궁의 경계에 도착하자 다른 이들을 습격하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대미궁의 동정을 살필 정도였다.
하지만 폭도들의 인내심은 길지 않았다. 거듭된 호출에도 나가들의 왕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그들은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9층의 모든 미궁이 무너졌는데, 이곳만 멀쩡하다는 건 뭔가 나가의 왕이 수작을 부린 것이렸다!”
“멀쩡하다 뿐인가! 지금 보니 전보다 더욱 휘황찬란해졌으니, 필시 그자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일 것이로다!”
그렇게 떠들어대는 몇몇 이들을 보며 말락수스가 혀를 찼다.
“죽고 싶으면 무슨 소린들 못해. 제 정신이 아니군.”
“미궁을 잃고 이성을 상실한 거죠.”
아리아네가 말락수스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지난 전쟁의 부상이 아직도 회복이 안 된 것인지 여전히 낯빛이 좋지 않았다.
“나중에 왕께서 납시면 그때는 어찌하려고.”
말락수스는 저들을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행여나 간신히 멈춘 분란이 다시 시작될까봐 저어되는 눈치였다.
“괜히 저놈들 때문에 불똥이나 튀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말락수스가 기억하는 나가의 왕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모습에 속아 함부로 대들었다가는 미궁은커녕 제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하고 만다. 그렇게 9층과 그 인근에서 멸망한 미궁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는 진정으로 나가의 왕이 저들로 인해 분노하지 않기를 바랐다. 분노한 나가의 왕은 자신들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존재였다. 괜한 일에 휩쓸려 낭패를 보지 않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저들의 오만에 동참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저도 이 상황이 왕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은 지울 수 없군요.”
“큰일 날 소리!”
아리아네의 말에 말락수스가 기겁했다. 그는 하얗게 질려 아리아네의 입을 막고는 대미궁의 입구를 살펴보았다.
잠시 기다려 보아도 아무런 낌새가 보이지 않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모두 알게 될 터, 굳이 자청하여 벌을 받을 필요는 없어.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는 말자고.”
“하지만 생각해봐요. 이상하지 않아요? 갑자기 우리의 미궁이 사라진 것만 해도 이상한데 그의 미궁은 전보다 더욱 더 거대해졌어요.”
아리아네의 말에 이번에는 말락수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무심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이내 수많은 이들이 자신과 아리아네의 대화를 듣고 있음을 깨닫고는 아차 싶은 얼굴이 되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험한 길을 걸어야 했나. 갈수록 희미해지는 의식을 부여잡고 겨우 일족을 이끌고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금에야 나가의 미궁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다들 이성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이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었다.
실제로도 폭도들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눈에 언뜻언뜻 조급한 분노와 광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필시 자신 역시 저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아니야,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발 물러나 있는 게 좋을 것 같구만. 왕을 적대하고 이제까지 두 발 붙이고 지저에 버티고 선 놈은 본 적이 없으니…….”
은연중에 나가와 그 왕의 위세를 상기시켜주니, 그나마 다들 애써 이성을 붙잡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이 닿은 것은 어디까지나 이곳에 오는 동안 이성을 유지했던 이들 뿐이었다.
폭도들은 나가들의 왕이 나타나지 않자, 점점 기세등등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분명 도적놈이 무슨 짓을 벌였을 거야! 다운 잼도 말라버린 지저에서 갑자기 이런 성장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쩌면 그가 우리의 미궁을 소멸시킨 원흉일지도 모르지. 전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알 수가 없었어.”
이제는 한때 자신들이 섬겼던 왕을 도적놈이라고 칭하기까지 하는 폭도들이었다.
“우리는 왜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그가 잘못이 있다면 직접 만나 들으면 될 것을!”
“만약 저 안에서 일을 꾸몄다면, 증거 역시 저 안에 있을 테지. 증거를 없애기 전에 우리가 직접 확인하는 거야!”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혼란스러움, 그리고 이곳까지 오며 벌였던 전투와 살육의 광기가 채 가시지 않아 그들은 점점 더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눈앞에 떡하니 놓인 미궁은 자신들의 상실감을 모두 채워주고도 남을 정도로 풍족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전이었다면 절대로 벌이지 않았을 일을 벌이고 말았다.
“어차피 나가들이라고 해봐야 1천도 채 되지 않는다!”
“그가 떳떳하다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을 리가 없노라! 필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도주할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나가들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게 틀림이 없다!”
되도 않을 소리를 지껄인 누군가를 따라 폭도들이 하나둘 대미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폭도의 무리가 아닌 이들 중에서도 이 말도 안 되는 선동에 휩쓸려 은근슬쩍 그 대열에 합류하는 이들마저 생겨났다.
“대체 왜 왕께선 아직도 침묵하시는가!”
갑갑한 마음에 말락수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폭도들이 미궁의 경계를 침범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가장 먼저 핵을 탈취하는 놈이 가장 큰 몫을 갖는다!”
벌써부터 나가들의 미궁을 차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대는 폭도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앞서기 위해 이제는 일말의 조심성조차 없이 미궁의 경계를 넘는 만행을 보였다.
“거기까지.”
이제 막 폭도 무리의 선두가 미궁의 경계를 침범했을 때, 속삭이듯 낮은 음성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는 놈은 두 동강을 내주지.”
요란한 발소리도 성급한 환호도, 그 어느 무엇도 이 나직한 속삭임을 가릴 수 없었다.
“확인해보고 싶은 놈은 시험해 봐도 좋아. 제 몸이 가로로 쪼개질지 세로로 쪼개질지 예상해보는 것도 분명 재미난 경험일 테지.”
기묘할 정도로 울림이 깊은 음성. 언제 나타난 것인지 김진우는 미궁의 외곽에 삐딱하게 서서 폭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
기고만장해서 날뛰어대던 폭도들이 그 무심한 시선에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들은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침범한 미궁의 주인이 어떤 존재인지, 또 그가 어떤 식으로 수많은 적들을 분쇄해 왔는지,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폭도들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