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55)
던전 견문록-155화(155/319)
# 155
던전 견문록
제 156 화
단순히 나가들의 왕이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공기가 달라졌다. 흥분한 폭도들이 내뿜는 날숨으로 잔뜩 들떠 있던 주변의 세상이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이 멈춰버린 듯한 광경이었다.
“왜? 방금 전처럼 더 떠들어보지 않고?”
그의 말에 가뜩이나 낯빛이 좋지 않았던 폭도들의 얼굴이 꺼멓게 죽어버렸다.
대체 언제부터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폭도들은 눈알을 굴리며 슬그머니 발을 빼낼 시늉을 해보였다. 하지만 김진우는 그들이 물러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앞으로든 뒤로든 단 한 발자국이다.”
조금 전의 경고는 여전히 폭도들의 발을 묶어두고 있었다.
사납게 으르렁거린 것도, 그렇다고 해서 힘을 실어 으름장을 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도 수천에 달하는 폭도들의 발이 꼼짝없이 묶여버렸다.
차라리 이곳이 예전의 9층이었다면 좁고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몇쯤은 몸을 빼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이 있는 곳은 이변 이후 생겨난 널찍한 공터였다. 그들이 왕의 경고를 피해 숨을 곳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라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을 그 작은 소리에 주변의 눈총이 쏟아졌다. 정작 소리를 낸 당사자도 제 풀에 놀라 양손으로 입을 가릴 정도였다.
그야말로 숨을 쉬는 것조차 왕의 허락을 구해야 할 것만 같은 상황, 그들은 단 한 사람에게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폭도들의 난동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멀찍이 물러나 있던 난쟁이들의 왕이 신음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목 끝에 걸려 차마 나오지 않는 마지막 말을 간신히 삼키며 그는 왕과 폭도들을 바라보았다.
“음…….”
평소라면 재잘재잘 지껄여댔을 말 많은 아리아네조차 말을 아꼈다.
그만큼 그들이 보는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나가들의 왕은 애초부터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는 자신들이 불가능하다 말했던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실천해왔다. 망자들의 왕, 발리셔스와의 전쟁이 그러했으며, 9층을 침공한 귀족 연합군과의 전쟁이 그러했다.
그런데 그는 당연히 패배할 거라 생각했던 전쟁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
발리셔스는 미궁을 통째로 헌납하고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으며, 10층의 귀족들은 병사 하나 챙기지 못하고 혼이 빠져라 도망쳐야 했다.
그런 나가들의 왕이니 9층의 모든 이들이 봉신의 계약을 한 것이다. 비록 힘과 공포로 강요된 굴종이었지만 그가 9층을 지배하기에 부족한 인물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군.”
아무리 지저에 그가 유일무이한 층의 정복자라고 해도 지금 보이는 모습은 도가 지나쳤다.
당장에라도 미궁을 들어엎을 듯했던 수천의 폭도들이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그의 눈치만 살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물며 지금의 폭도들은 미궁을 잃어 이성보다 본능이 지배하는 상황이었다. 저보다 몇 배는 크고 거대한 괴수들에게도 이를 드러내고 손톱을 뽑아드는, 기질 드센 지저의 전사들이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벌레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좋아, 아주 좋아.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어쩌면 내 화가 풀릴지도 모르겠어.”
씨익, 하고 웃어 보이는 왕의 모습이 그렇게 섬뜩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으로 그의 화가 풀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침묵이 흐른다. 피가 바싹 마를 듯한 압박감 속에서 모두가 왕의 눈치만 살펴보았다.
“호오.”
감탄인지 무엇인지 모를 왕의 탄성이 들려왔다. 슬그머니 고개를 든 이들이 그대로 왕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심연(深淵).
그들이 본 왕의 눈빛은 무저갱이었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검은 눈동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심령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 검은 눈동자를 본 순간 그들은 발가벗겨진 채 단두대에 끌려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불과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그들이 심연과 마주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나 다름없는 순간이 지났을 때, 멀쩡하게 제 자리에 서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은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을 잡으며 주저앉았다.
공포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렇게 몸집을 키운 공포라는 이름의 괴물은, 석상처럼 굳어 있던 이들을 하나 둘 집어삼켰다.
“으으으…….”
괴물은 폭도와 폭도 아닌 자들을 가리지 않았다.
멀찌감치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말락수스와 난쟁이들이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엎드려 몸을 떨며 후회했다.
처음부터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곳은 미궁을 잃은 자신들을 구제해줄 구원자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처형장이었다.
왕의 눈빛은 단두대에 올릴 사형수, 펄떡거리는 제물을 찾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고 난 후였다. 이제 와서 몸을 빼 도망치기에는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등을 돌리는 순간 살해당하고 말 거라는 예감에 그들은 그저 왕의 단두대에 제 목이 걸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왕의 시선이 자신을 피해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락수스.”
왕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기 시작했다.
“좌측에 가서 서라.”
“와, 왕의 뜻대로.”
왕의 호명이 이어졌다. 때로는 좌측으로 때로는 우측으로, 그들은 왕에게 이름이 불릴 때마다 마치 네 발로 기듯이 어기적거리며 자신의 자리에 가 섰다.
그들은 옆에 선 자의 면면을 살피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에 선 자신은 단두대를 둘러싼 구경꾼일까. 그도 아니면 단두대 앞의 사형수일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왕의 총애를 받던 이들이, 왕을 거역하지 않은 이들이 곁에 서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러한 심정은 아리아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리아네.”
“왕이시여.”
그녀는 어느덧 남은 이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왼쪽은 말락수스가 있다. 난쟁이들의 왕은 다른 미궁의 주인들에 비해 나가들과 관계가 원만한 편이었다. 봉신의 계약을 맺은 것 역시 다른 이들보다 일렀으며, 단 한 번도 왕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그에 반해 우측에는 대부분이 폭도였다. 그들은 왕이 나타나기 전까지 폭언을 서슴치 않았으며, 나가들의 미궁이 제 손에 쥐어진 것처럼 떠들어댔다.
언제부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은 아마도 저들을 살려두지 않으리라.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확신했다. 오른쪽이 단두대, 왼쪽이 그 처형장 밖이었다. 그리고 이변이 없는 한 자신 역시 말락수스의 곁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그녀가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중앙으로 나오라.”
왕은 어쩐 일인지 그녀를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세우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헤카림.”
반인반마 헤카림, 일백 반인반마들의 왕이자 그녀와 함께 가장 먼저 왕에게 봉신의 맹세를 했던 존재였다.
“그대 역시 중앙으로 서도록.”
그런 그가 자신의 곁에 섰을 때,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
수없이 많은 폭도와 난민들을 마주했을 때, 김진우는 자신의 세상이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난쟁이들의 왕. 안도감. 두려움.] [붉은 개미들의 왕. 두려움.] [두 머리 늑대들의 왕. 공포.]쭉 늘어선 이들의 머리 위로 자그마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외눈박이 군주의 능력이 활성화된 모양이었다.
“호오.”
덕분에 그는 비교적 쉽게 피아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개중에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미몽의 여왕, 아리아네와 반인반마들의 왕, 헤카림이었다.
[미몽의 여왕. 두려움. 갈등. 우려.] [반인반마들의 왕. 갈등. 공포.]우호적인 이들은 자신의 등장에 안도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적의를 품었던 이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아리아네와 헤카림만이 유독 맹렬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그들의 갈등이 얼마나 큰지, 다른 이들의 감정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만약 다른 때였다면, 그는 이를 눈여겨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한 때 지저에서 가장 현명했던 외눈박이 군주의 능력을 각성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들의 생각을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0층 귀족들의 침공, 때를 맞춘 몽마들과 반인반마들의 등장, 그리고 봉신 계약. 다소 작위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들이 배신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은 가장 먼저 봉신의 맹세를 하고 기꺼이 제 목숨을 맡겨왔었던 이들이니까.
하지만 헤카림을 불러냈을 때, 무릎을 꿇고 사지를 벌벌 떨어대는 아리아네를 본 순간 그는 확신하게 되었다.
배신.
이들은 분명 목적을 갖고 접근한 자들이다. 그런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진실의 눈이 그들이 떠올린 절망을 끄집어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가.”
김진우는 내친 김에 뻔뻔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그들을 몰아세웠다.
“와, 왕이시여…….”
아리아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의문이 가득한 것을 보니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났다는 상황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그와 반대로 헤카림은 다소 태연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헤카림이 뻔뻔하게 의뭉을 떨었다.
“그대들을 움직인 것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헤카림은 제법 연기력이 뛰어났다. 우직하다 못해 아둔하게 느껴지는 외모와는 달리 헤카림은 능청스러웠다.
하지만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성한 진실의 눈은 실시간으로 헤카림의 감정 상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아리아네.”
미몽의 여왕은 그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몸을 떨어댔다.
“그대 역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던 미몽의 여왕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미몽의 여왕. 체념.]“좋아, 그대는 잠시 왼쪽으로 가 있도록.”
대답은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심리 상태만 보아도 그녀의 결정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헤카림이었다.
“헤카림,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대의 뒤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를 말하라.”
“우둔한 머리로는 왕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겠나이다.”
헤카림의 말에 김진우가 서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