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56)
던전 견문록-156화(156/319)
# 156
던전 견문록
제 157 화
“그런가,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어.”
김진우의 말에 헤카림이 반색을 하고 앞으로 나서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발 빨리 차가운 음성이 이어졌다.
“뻔한 질문을 했어, 애초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는데.”
김진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낄낄대며 웃어댔다. 헤카림은 웃을 수 없었다. 그 미소에 담긴 섬뜩한 살의와 폭력성을 보았던 탓이다.
“분명 그대는…….”
반인반마, 신속한 기동력과 막강한 돌파력. 지저에 보기 드문 헤카림의 전투 방식은 익숙했다.
“철혈의 기사단 소속이었겠지.”
신속한 기동력으로 적의 심장을 단숨에 관통하는 전투 방식은, 김진우와 나가 용기사들 역시 즐겨 사용하는 전투 방식이기도 했다.
우직하게 맞붙어 적을 분쇄하고야 마는 지저의 전쟁은 힘과 힘의 싸움이다. 하지만 용기사들은 힘이 아닌 속도로 적을 산산조각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지저에서는 드문 전투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생소한 전술을 제안하고 훈련시킨 자가 바로 발자크였다. 그리고 발자크의 과거 소속은 철혈의 기사단이었다.
헤카림의 전투 방식은 놀랍도록 발자크와 닮아 있었다.
“더 할 말 있나?”
“와, 왕이시여!”
헤카림이 뒤늦게 무릎을 꿇으며 용서를 구했다.
“이미 늦었다.”
하지만 반인반마의 왕이 무릎을 채 다 굽히기도 전에 김진우는 이미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크아아앙!”
그 사실을 깨달은 헤카림이 굽혔던 다리를 튕겨내며 긴 창을 떨쳐냈다.
“바르톨로뮤에게 애병을 뺏기고도 살아남았다는 게 용하다 했더니,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가.”
비록 그의 몸에 닿지는 않았지만, 헤카림의 공격은 예사롭지 않았다. 일개 9층 미궁의 주인의 실력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력이 담긴 힘이었다.
이런 힘을 가지고도 바르톨로뮤에게 병기를 빼앗겼다는 사실은 말이 되지를 않았다.
“바르톨로뮤를 봐줬군.”
바르톨로뮤를 처치한 것은 삭풍의 보레아스, 그런데 헤카림의 힘은 보레아스 못지않았다. 그런 헤카림이 바르톨로뮤를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하물며 이 음흉한 반인반마의 왕이 바르톨로뮤와 마주쳤던 곳은 방어자의 이득이 전혀 없는 미궁 경계 밖이었다.
“생긴 거와는 다르게 꽤나 음흉해. 아나톨리우스도 꽤나 그대를 신뢰하고 있을 거야.”
힘과 심계가 모두 뛰어나니, 필시 철혈의 기사단에서도 꽤나 중하게 여겨질 게 분명한 헤카림, 김진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런 그대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나톨리우스 놈도 꽤나 속이 쓰리겠지.”
정신없이 사방을 베고 찔러대던 헤카림의 창이 멈추었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창의 사거리 안쪽으로 파고든 김진우가 창대를 움켜쥔 것이다.
“이익!”
어떻게든 그를 떨쳐내기 위해 헤카림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육중한 반인반마에 비하면 차라리 초라하기까지 한 이 작은 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서 전해라. 신뢰를 배신한 대가는 비싸게 받겠다고. 그대로 아나톨리우스에게 전해라.”
헤카림의 손이 헐거워졌다. 상대의 말에서 희망을 보았던 탓이다. 하지만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만약 죽어서도 갈 수 있다면 말이야.”
김진우의 주먹이 굉음과 함께 휘둘러졌다.
펑!
그 일격으로 헤카림은 상반신의 3분지 1이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가고 말았다.
바들바들.
머리를 잃은 반인반마가 몇 번인가 경직된 몸을 떨더니,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쿠웅.
침묵이 내려앉은 지저, 배신자의 거체가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말락수스를 비롯한 이들의 귓가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헤카림이 쓰러지자 반인반마들이 잇따라 무릎을 꿇었다. 원래대로라면 주인과 함께 소멸되었을 그들이지만 아무래도 이미 미궁과 핵을 잃은 터라 소멸의 운명을 피해간 모양이었다.
“아리아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반인반마들 사이에서 김진우가 돌아보았다.
“왕이시여!”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떤 아리아네가 핼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대의 배후는 누구인가.”
“악몽의 디나리온, 그분이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녀는 헤카림의 숨겨진 힘에 놀랐고, 그를 장난치듯 제압한 왕의 힘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체념을 넘어 이제는 완전히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녀의 대답이 즉각적이었다.
“목적이 뭐지?”
“숨기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이곳은 상황을 말씀드리기에는 듣는 귀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미 그의 처분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기색이 역력한 아리아네의 대답에 김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군. 그 질긴 목숨, 조금 더 살려두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그가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갔다. 고개를 숙인 아리아네가 무기력하게 뒤를 따랐다.
“자, 하던 일은 마저 해야지?”
두 명의 배신자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던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
“으아아아아!”
우측으로 구분되었던 이들 중 몇이 발작적으로 괴성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숨기고 있던 반인반마들의 왕마저 허무하게 당해버린 지금, 도저히 왕에게 대항할 용기가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순식간에 탈주자들이 늘어났다.
“성급하기는, 차라리 용서를 구했다면 살려줬을지도 모르는데.”
김진우가 혀를 차며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냉기 풀풀 풍기는 분위기는 용서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폭도들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죽어라 도망쳤다. 그들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개중 가장 몸이 날랜 자들 몇은 벌써부터 공터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정도였다.
그대로라면 폭도들 대부분을 놓칠 상황,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호들갑을 떠는 대신 지독스러울 정도로 느긋하게 읊조렸다.
“미궁 폐쇄.”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미약한 한마디였지만, 그 한마디의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카드득!
넓은 공터의 바닥이 파도처럼 출렁이다 단단하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순식간에 사방이 막혀버렸다.
[당신의 의지에 따라 대미궁이 완전히 폐쇄되었습니다. 당신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미궁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갑작스레 돋아난 벽을 넘지 못해 발길음 멈춘 폭도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 벽을 두들겨댔다.
겁에 질린 비명과 고함 소리가 난무하고 서로가 서로를 짓밟아대는 아비규환의 광경이 벌어졌다.
“원망하려면 아리아네와 헤카림, 또 그들의 주인을 탓하라. 이들이 없었던들 그대들의 처지가 지금과 같았을까.”
아리아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사실을 토대로 그와 아나톨리우스의 관계를 간파하는 이들이 생길 수 있었다. 사소한 가능성이었지만 김진우는 허투루 보지 않았다.
그는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오늘의 일이 조용히 끝나기를 바랐다.
비록 첩자를 심어두는 방법으로 뒷통수를 때리기는 했지만, 아나톨리우스와 디나리온은 아직 쓸모가 있었다. 관계를 더 지속해나갈 필요가 있었다.
또한 가급적이면 아레아네의 정체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운이 좋다면 뒤에서 수작질한 대가를 그대로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자면 우선적으로 이 자리에 있었던 대화가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것들을 막아야 했다.
어차피 그대로 두면 이성을 잃고 말 못하는 짐승이 되어 지저를 떠돌다 죽어갈 이들이었지만, 어쩌면 저들 중 운 좋은 몇몇은 백작들과 접촉하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들이 이곳에서 겪은 일을 떠벌렸다가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고 만다.
그는 괜한 동정심에 분란의 씨앗을 그대로 둘 정도로 무르지 않았고, 그래서 말했다.
“남김없이 먹어치워라.”
직접 나서서 손을 더럽힐 것도 없었다. 짧은 한마디를 내뱉는 것만으로도 그는 분란의 씨앗을 제거할 능력이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궁 전체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마치 무저갱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끔찍한 괴성이 사방에서 울려대고, 진동이 점차 심해졌다.
그리고 막 공터를 벗어나려던 폭도들이 균형을 잃고 비틀대던 그 순간, 땅이 솟구치고 천장이 내려앉았다.
“살려줘!”
“부디 용서를!”
겁에 질려 내지르는 비명과 단말마가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하지만 이내 대미궁이 내뱉은 사나운 포효에 그들은 그대로 집어 삼켜졌다. 그렇게 대미궁은 폭도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다시 공터가 원래의 모습을 찾았을 때, 폭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말락수스를 비롯한 이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압도적인 힘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이었지만, 대미궁이 폭도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웠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들은 결코 그의 힘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 아니다. 그가 이따금씩 내비치는 위험스러운 기운과 헤카림을 단숨에 쓰러트린 힘 역시 두려웠지만, 자신들이 느끼는 공포는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보다 근원적인 공포, 그들은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들이 두 발을 딛고 선 이곳, 이 미궁 자체가 공포의 근원이었다.
과거의 경계만을 기억하여 대미궁 깊숙이 발을 딛은 순간, 이미 제 스스로 끓어오르기 시작한 솥단지 속으로 몸을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대미궁이라는 거대한 솥단지는 수천의 폭도들을 삼키고도 여전히 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욱 더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말락수스를 비롯한 이들의 머릿속으로 보이지 않는 어둠이 탐욕스럽게 군침을 흘리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은 그들을 맹목적으로 만들었다.
“왕이시여!”
그들은 앞다투어 꿇어앉아 머리가 깨져라 바닥에 찧어댔다.
“저들에게 동조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왕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 느긋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음성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아쉬워.”
왕을 둘러싼 공기가 다시금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정말로 아쉬워. 그대들이 만약 저들을 막아섰다면, 난 정말로 그대들을 믿을 수 있었을 텐데.”
왕의 날 선 음성에 말락수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면 스스로도 폭도들이 성공할 수 있을 거란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모양이다.
수천에 달하는 폭도들을 과연 나가들이 이겨낼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했으리라.
최악의 경우 폭도들에게 집중 공격당하게 될까 염려되어 나서지 못했던 스스로의 우유부단함이 한스러웠다.
“어쩌면 그대들 중에도 내가 저들에게 당하기를 바랐던 이가 있을지 모르지.”
차가운 냉기가 사방을 지배한 순간, 이 자리에 모인 모두는 알 수 있었다.
왕의 차가운 분노에 육신은 얼어붙을 것처럼 떨려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은 아직도 끓는 솥단지 안에 있었다.
“카이만, 우측으로.”
“헬무트, 우측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형이 다시 집행되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