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58)
던전 견문록-158화(158/319)
# 158
던전 견문록
제 159 화
김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영은 그의 침묵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군요, 저는 평생 이곳에 남게 되겠군요.”
김진우는 그녀의 체념 어린 표정을 보면서도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하지 않았다.
비록 그 시작은 다운 잼에 중독된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결국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녀의 남은 인생을 지저에 처박아 버렸으니 이제 와서 무슨 위로를 건네랴.
전부 위선이고 기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설픈 위로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뭐, 예상했던 일이에요.”
하지만 이준영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꽤나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오히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할 일이라도 달라며 그를 재촉했다.
“그 표정은 뭐예요. 그럼 제가 평생 진우씨를 원망하며 저 거지 같은 방에 처박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이미 한 번 폐인이 되었던 전적이 있는 그녀인지라 이런 반응을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가 비록 좀 병신 같은 꼴을 보이긴 했지만, 저 이준영이에요, 이준영. 진우 씨 아니었으면 아직도 다운 잼 가루라도 마셔보겠다고 콧등이 벗겨지도록 들개처럼 지저를 훑고 다녔을 거라고요. 그런 저를 폐인 신세에서 구해준 게 진우 씬데, 제가 고마운 것도 모르고 무작정 원망만 할 거라 생각했어요?”
실의에 빠져 또다시 폐인이 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지금 보이는 그녀의 모습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충격이 너무 커 현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지저의 삶이란 그저 투쟁뿐인 삭막한 인생이다. 그녀가 정말로 이 모든 상황을 완전히 납득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그런 그녀를 굳이 설득해 현실이 얼마나 시궁창인지 알려줄 생각 따위 없었다.
그녀가 받아들이고 말고를 떠나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를 다시 흔들어놓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저는 진우 씨 원망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실의 눈으로 살펴본 그녀의 심리 상태 역시 원망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애매한 포지션을 자각하고는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일단 준영 씨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는지는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죠. 지금은 몸을 회복하는 것만 생각해요.”
다운 잼이 고갈되다시피 한 지저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지저의 존재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음식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과거의 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쉬어요.”
비척거리며 오너 룸을 떠나려던 이준영이 방금 막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주인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김진우는 그만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
이준영의 일은 그럭저럭 원만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흑호의 미궁을 다스리던 옛 동료 덕에, 미궁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완화되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만 미궁에 속한 것도, 그렇다고 속하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한 위치가 문제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그녀 스스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으니,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되리라.
문을 걸어 잠그고 정비에 들어간 대미궁이었지만, 대미궁의 출입이 자유로운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릭샤샤를 비롯한 언더 엘프 순찰자들이었다.
언더 엘프들은 쉴 새 없이 대미궁의 경계를 넘나들며, 확장된 경계를 계속해서 지도에 추가해 나갔다.
또한 바깥의 동정을 살피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9층을 벗어나 다른 층을 살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원거리 탐색을 나섰다. 그 과정에서 그간 제법 공을 들였던 파티 홀이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격전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뭔가 일이 생긴 것 같나이다.”
릭샤샤의 보고에 김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파티 홀은 9층으로의 이주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미궁이 대미궁으로 변하며 9층 전체가 금역이 되면서 계획이 어그러져 버렸다.
부쩍 모아이들의 공격을 막아내기 버거워하던 파티 홀이었으니 고립무원의 지경에서 일을 당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도 미궁의 핵이 온전하게 사라진 것을 보아 몸을 피했을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하나이다.”
“하기야, 모아이가 쓸고 지나간 것이라면 그리 깔끔하게 사라졌을 리가 없지.”
순찰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파티 홀의 오너 룸은 격전의 와중에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했다.
만약 모아이들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 것이라면 파괴당한 핵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문제는 그녀가 과연 나에게 돌아올 것이냐… 그게 문제로군.”
미몽의 여왕, 아리아네가 디나리온의 사주를 받고 접근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 윤희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아니, 차라리 그녀 역시 디나리온의 의도대로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더욱 그럴싸했다.
“명만 내리신다면 그녀의 흔적을 쫓겠나이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다만 한 명의 전력이 아쉬운 상황이니만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처리하도록.”
그의 명령에 릭샤샤가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오너 룸을 빠져나갔다.
“음… 근데 뭔가를 빠트린 기분인데.”
가만히 앉아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김진우는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 찌푸려진 얼굴에 주름만 깊어졌다.
“아! 우서!”
한참만에 겨우 찝찝함의 정체를 깨달은 그가 언더 엘프 몇을 불러다 미궁의 외곽을 순찰하라 일렀다.
“우서 외에는 어느 누구도 미궁으로 들이지 말라.”
그의 말에 언더 엘프들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
같은 시각 김진우가 생각나지 않는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을 때, 대미궁의 지척에서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망할 놈들아! 그만 좀 달려들라고!”
수백의 모아이들이 너른 공터를 차지하고 달려드는 끔찍한 광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경망스러운 욕설, 그 음성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우서였다.
어느 누구보다 이르게 이변의 원인을 짐작하고 미궁을 나섰던 우서가 어쩐 일인지 지금에서야 대미궁의 인근에 도착한 것이다.
“그만 꾸물거리고, 좀 넘어가! 서두르라고!”
평소였다면 주변과 동화되는 특유의 능력으로 모아이 무리를 통과했을 그였지만, 미궁이 멸망해버린 지금, 탐식의 덩어리들을 죄다 끌고 온 터라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아이고! 저 아까운 놈들!”
우서는 쉴 새 없이 입을 놀려댔다. 그간 살뜰하니 모아두었던 탐식의 덩어리들이 모아이들에게 짓눌리고 해체당하는 것을 보며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내가 미쳤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후회를 가득 담은 음성이 다시 한 번 지저에 울려 퍼졌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모아이들은 끈적끈적한 탐식의 덩어리들을 붙잡고 우악스럽게 제 입에 욱여넣기 바빴다.
“으아! 저 아까운!”
우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커다란 주둥이로 탐식의 덩어리를 통째로 삼켜버린 모아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계란 노른자라도 마시듯 탐식의 덩어리를 빨아들이고 있던 거대 모아이가 우서의 공격에 비명을 질렀다.
“뱉어!”
우서는 점액질의 몸을 길게 늘여 모아이의 목을 졸랐다. 결국 거대 모아이가 켁켁거리며 반쯤 삼켰던 탐식의 덩어리를 도로 뱉어냈다. 그렇게 구사일생 살아나온 탐식의 덩어리가 우서의 허리춤에 척, 하고 들러붙었다.
“옳지!”
이리 저리 흩어진 탐식의 덩어리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던 우서가 그 광경을 보고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야 겨우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이 떠올랐던 탓이다.
“모두 모여!”
한창 격전 중이던 탐식의 덩어리들이 모아이들을 뿌리치고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탐식의 덩어리가 꼬리를 잡혀 모아이들에게 삼켜지고 말았지만, 결국 우서는 수하들을 한군데 모으는데 성공했다.
“전부 붙어!”
몸을 넓게 펼쳐 모아이들을 밀어낸 우서가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점액질 덩어리들은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몸에 붙으라고! 이 멍청한 놈들아!”
미궁이 있을 때는 말하지 않아도 잘만 따르던 탐식의 덩어리들이 이제는 말귀조차 어두워졌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거듭된 호통에도 여전히 굼뜨기만 한 탐식의 덩어리들, 결국 보다 못한 우서가 가장 가까이에 있던 덩어리 하나를 잡아, 척 하니 허리춤에 붙였다.
“이렇게 붙으라고!”
그제서야 꾸물거리며 그에게 들러붙는 탐식의 덩어리들이었다.
“진즉에 이렇게 할 걸!”
아무래도 핵과 너무 오래 떨어진 탓인지 제대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탐식의 덩어리들을 덕지덕지 온몸에 붙인 우서가 순간적으로 몸을 팽팽하게 당겼다.
마치 활처럼 휘어진 몸이 당장에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기운다 싶더니, 이내 쏜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단번에 십수 미터를 전진하는 놀라운 도약력, 하지만 모아이들을 벗어나기에는 그 수가 너무도 많았고, 힘이 부족했다.
결국 모아이들의 한가운데 떨어진 우서는 몇 번이나 더 도약하고 나서야 겨우, 대미궁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쪽은 좀 한가하네.”
간신히 살았다는 투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우서가 곧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아이들을 보며 질색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우서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탐식의 덩어리들이 곧 떨어질 것처럼 덜렁거렸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육신이 반쯤 붕괴된 탓에 민첩하지 못한 모아이들이지만, 탐식의 덩어리들은 그보다 몇 배는 느렸다. 당연하게도 기회가 생겼을 때 거리를 벌려야 했다.
“이런 망할!”
몸을 튕겨내던 우서가 막다른 길을 보고는 욕설을 내뱉었다. 기억에 의존해 찾아왔는데 아무래도 중간에 길이 어긋난 모양인지, 뻥 뚫린 통로 대신 단단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끄으으으으.
언제 따라붙은 것인지 바로 등 뒤까지 따라붙은 모아이들의 신음성을 들으며 우서는 고민했다.
“끙, 몸통 반은 사라지겠네.”
미궁을 잃은 지금은 점액질 한덩어리도 귀한 위급 상황이다. 그런데 영양가도 없는 모아이들을 상태로 기력을 소모하게 생겼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내가 진짜 미쳤지. 그냥 곧장 가면 될 걸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그렇게 투덜거린 우서가 또다시 미궁을 나선 직후의 행보를, 땅을 치며 후회했다.
하지만 이내 달려드는 모아이들을 보며 그는 온몸을 단단하게 일으켜 세웠다. 어차피 이리 된 거 최대한 빨리 포위망을 벗어나기로 작정한 것이다.
쿠구구궁.
그런데 그 순간 온 지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또 뭐야!”
이미 커다란 진동 이후 한 번 미궁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우서는 겁부터 집어먹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동이 그를 살렸다. 진동 끝에 막혔던 길이 뚫려버린 것이다.
“우서님, 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새롭게 열린 통로를 향해 막 발을 내딛으려던 우서는 나직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오오, 그대는!”
음성이 들린 곳을 확인해 보니, 어둠 속에 몸을 반쯤 파묻은 언더 엘프 하나가 있었다. 언더 엘프를 발견한 우서는 반색하며 말했다.
“왕께서 보낸 것인가!”
언더 엘프는 우서의 호들갑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곧장 몸을 돌려 안내했다.
“근데 왜 그대 혼자지? 다른 이들은?”
이미 바로 등 뒤까지 접근한 모아이들이 걱정된 우서가 그렇게 물으니, 언더 엘프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뒤는 걱정 안하셔도 되니, 지금은 일단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 말에 우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미궁의 안쪽을 향해 뛰어들었다.
끄아아아아!
우서가 그렇게 언더 엘프 안내자를 따라 사라지자, 모아이들이 사납게 포효하며 그 뒤를 따랐다. 사라진 우서와 언더 엘프를 쫓아 당장에라도 요절낼 것만 같은 사나운 기세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옥의 입구에 발을 내딛고 말았다. 그들이 텅 빈 통로라 생각했던 복도는 사실 대미궁의 입구였다.
그리고 대미궁은 그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고 교활한 포식자였다.
대미궁은 처음부터 사납게 모아이들을 집어삼키는 대신, 모아이들이 충분히 미궁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지막 모아이가 미궁의 경계를 넘었을 때 마침내 그 시커먼 속내를 드러냈다.
그렇게 수백의 모아이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채 인식하기도 전에 대미궁의 뱃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