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59)
던전 견문록-159화(159/319)
# 159
던전 견문록
제 160 화
61. 지저의 맥(脈)
[전투는 시작하기도 전에 끝이 났습니다. 경계까지 접근했던 모아이들은 대미궁의 한 끼 식사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모아이들은 오래도록 다운 잼을 섭취하지 못해 쇠약해진 것은 물론, 지저의 악의에 오랜 시간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일그러진 존재들입니다. 그런 모아이들에게 흡수한 생명력을 던전 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변환 과정에서 상당한 에너지가 손실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아이들의 맹목적인 집착과 에너지는 대미궁을 만족스럽게 만들었습니다.]모아이들이 미궁의 경계까지 출몰했다는 소식에 걱정했던 것도 잠시,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상황이 정리 되었다. 새삼 대미궁의 저력에 병력의 공백을 걱정한 스스로가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포만도가 내려간 대미궁이 언제 주민들을 집어삼킬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아이들이 대미궁의 배를 채워주었다는 사실이 그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지금의 지저라면 넘치도록 많은 것이 모아이들이니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대미궁의 포만도를 유지할 방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모아이들은 9층에 이변이 닥친 후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층의 중앙이라 할 수 있는 대미궁의 코앞까지 진출해왔다.
1년간 죽을 고생을 하며 통로 너머로 몰아냈던 노고가 무색해지고 만 것이다.
하기야, 방어선을 이루던 미궁들이 전부 사라진 지금 9층은 무주공산이나 다르지 않았으니, 호시탐탐 9층을 노리고 있던 모아이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전력의 공백이 생긴 김진우는 대미궁에 칩거한 상태, 릭샤샤와 언더 엘프들이 간간히 전해오는 정보만이 유일한 외부와의 접점이었다.
하지만 병력 하나가 아쉬운 지금의 상황에서 언더 엘프들을 위험천만한 모아이 무리로 밀어넣을 수도 없었으니,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고립무원의 상태가 될 게 뻔했다.
이대로라면 그간의 공이 무색하게 9층 전체를 모아이들에게 점령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더욱 우서의 존재가 중요했다. 탐식의 덩어리들은 그가 잃은 9층의 눈과 귀를 대신해 줄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서가 샛길로 빠지지 않고 미궁으로 찾아온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물론 가장 먼저 찾아올 거라 생각했던 그가 가장 늦게 당도한 것은 수상쩍었지만, 합류를 꺼릴 이유는 없었다.
“왔군.”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는 요란스러운 기척이 오너 룸에 뛰어드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왕이시여!”
그 호들갑스러운 기척만큼이나 경망스러운 우서의 음성에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물주머니를 찬 것처럼 제 몸에 덕지덕지 탐식의 덩어리를 매단 꼴이 우스웠던 탓이다.
“꽤 늦었군.”
실소를 내뱉은 그가 이내 정색하며 질책하듯 물었다.
“미궁이! 미궁이!”
그런 김진우를 보며 우서가 제 딴에는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있던 그는 시큰둥하게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소멸당한 미궁을 되살리는 법을 모른다.”
그는 오코누토시를 비롯한 미궁을 잃은 이들에게 해주었던 설명을 다시 한 번 늘어놓았다. 일견하기에 무성의하기까지 한 그 태도에 우서는 복잡한 얼굴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굳이 진실의 눈을 사용할 것도 없이 몸이 흐물흐물해졌다가 다시 단단해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분노와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실제로 진실의 눈이 알려온 우서의 상태도 그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한다면 그대가 내 미궁에 머물 자리 정도는 마련해줄 수 있다. 왕처럼 군림하던 전의 생활에야 비할 수 없겠지만, 그대와 일족이 짐승처럼 지저를 헤매다 지저에 먹혀버리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겠지.”
우서는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하기야, 하루아침에 멀쩡하던 미궁이 사라지고, 집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어 이제는, 다른 이의 미궁에서 군식구로 지내게 생겼으니 그 처지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말락수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대미궁에 얹혀사는 처지가 되지는 않았으리라.
우서 역시 결국은 다른 이들이 그러했듯 무기력하게 김진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서와 탐식의 덩어리들이 대미궁의 주민이 되었습니다.] [우서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비록 전투 능력은 크게 뛰어나다고 할 수 없지만, 생존력과 번식력만큼은 발군입니다.] [다른 이들이 오직 핵의 소환 능력으로만 일족을 늘릴 수 있다면, 우서와 탐식의 덩어리들은 충분한 에너지만 제공이 된다면 제 몸을 분열하여 얼마든지 일족의 수를 늘릴 수 있습니다.] [형태조차 고정되지 않은 이 점액질 덩어리들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질척질척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조금만 신경이 소홀해져도 대미궁 전체가 점액질로 뒤덮일지도 모릅니다.]우서는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미궁을 잃고 대미궁에 얹혀사는 처지가 된 것은 다른 이들과 같았지만, 우서와 그 일족은 번성의 가능성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던지라 김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우서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오! 하마터면 잊을 뻔했습니다. 제가 왜 늦었냐 하면…….”
“용건만 간단히.”
그대로 두면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꺼내 늘어놓을 우서의 성격을 아는 그는 단박에 말을 잘라냈다.
그의 짐작이 맞았는지 우서가 움찔 놀라 몸을 움츠리더니 눈치를 살피다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라는 게 꼭 무언가를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 난 어린아이 같았다.
“제가 우연히 발견한 건데 말입니다.”
김진우는 대답대신 눈빛으로 재촉했다.
“먼저 이걸 보십시오.”
왠지 기고만장한 우서가 우웩하고는 무언가를 토해냈다.
“음…….”
그 참을 수 없이 더러운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사실 우서는 형체가 고정되지 않은 점액질 덩어리, 그가 입으로 무언가를 토해냈다고 그게 실제 토사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서가 토해낸 돌덩이는 끈적끈적한 액체로 흥건하게 젖어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비위가 상하거나 말거나 우서는 자랑스럽게 지껄여댔다.
“그게 뭐지? 내 눈에는 그냥 돌덩이로 보이는군.”
그의 시큰둥한 대답에 우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덜 여물었지만, 분명 다운 잼입니다. 비록 아직은 다운 잼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놈이지만.”
아직은 거무튀튀한 외관에 다운 잼 특유의 영롱함도 없는 돌덩이에 불과했지만, 분명 다운 잼은 다운 잼이었다.
“그 와중에 잘도 챙겼군. 운이 좋았던 모양이야.”
하지만 김진우는 놀라지 않았다. 모아이들이 분탕을 치기 시작한 후로 거의 고갈되다시피 한 다운 잼이라고는 하나,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운이 좋다면 몇 개 정도는 건질 수 있는 게 덜 여문 다운 잼과 하급 다운 잼이었다.
그런데 우서는 그런 다운 잼을 들고 한껏 우쭐거리고 있었다.
“분명 평범한 다운 잼이죠. 하지만 이런 게 무더기로 있다면 어떨까요?”
이번에는 어지간한 김진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게 무더기로 있다고?”
놀라움이 가득한 그의 음성에 우서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네, 분명 덜 여물기는 했지만, 이런 다운 잼이 무더기로 있었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는 우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했다.
“안내해라.”
***
우서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은 특별한 것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지저의 통로였다. 하지만 기생수의 능력을 빌어 확인해 본 통로는 결코 평범한 통로가 아니었다.
[기생수의 능력 ‘탐사’가 활성화됩니다.] [다운 잼의 씨앗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막 여물기 시작한 다운 잼의 씨앗은 품고 있는 에너지도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분명 다운 잼입니다.] [다운 잼의 씨앗을 발견했습니다.] [다운 잼의 씨앗을 발견했습니다.] [다운 잼의 씨앗을…….] [다운 잼의…….]길게 이어진 통로의 거의 전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건…….”
그가 지저를 무수히 헤매고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엄청난 광경, 녹색 빛에 둘러싸인 통로의 모습이 차라리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에너지를 모았군요.”
모아이들에게 다운 잼의 씨앗이 발견될 것을 우려해 뿌려두었던 탐식의 덩어리들은 이미 우서의 몸에 들러붙은 상태였다.
개중에 하나가 품고 있었던 다운 잼의 씨앗을 본 우서가 놀랍다는 투로 이야기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김진우는 우서의 말 따위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기생수의 감각과 시스템 메시지 창이 미친 듯이 울려댔던 탓이다.
[9층의 맥(靈脈)을 발견했습니다.] [지저의 에너지가 흐르는 맥을 발견한 것은 크나큰 행운입니다. 평소 지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맥을 발견하기란 여간해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나가의 요새가 대미궁으로 진화하며 생긴 9층의 지각변동이 맥을 감싸고 있던 암석을 걷어낸 듯합니다.] [아직은 품고 있는 에너지도 그 등급도 보잘 것 없는 다운 잼의 씨앗에 불과하지만, 맥을 따라 흐르는 막대한 에너지는 씨앗들을 빠르게 성장시킬 것입니다.] [지저의 맥은 차라리 다운 잼의 광맥이라고 해도 좋을 존재입니다.]그냥 다운 잼의 씨앗이 아니었다. 무려 광맥이었다. 지금 김진우는 다운 잼이 무더기로 성장 중인 광맥을 발견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제가 다 꿀꺽했겠지만, 아시다시피 미궁도 잃은 마당에 과욕을 부리다가는…….”
우서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하기야 불과 며칠 사이에 이 정도로 에너지가 축적된 다운 잼의 씨앗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한 다운 잼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다운 잼의 향기는 온 지저에 퍼진 모아이들을 불러 모으고도 남으리라.
모아이들은 다운 잼의 기운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우서에게는 모아이들로부터 다운 잼을 지켜낼 능력이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욕심 많은 우서가 그에게 9층의 맥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엄청나군.”
그의 말에 우서가 주절주절 공치사를 해댔다. 하지만 우서와 그가 보는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우서는 그저 다운 잼의 무더기를 보았을 뿐이고,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9층의 맥을 발견했다.
그 진정한 가치를 알았다면 우서는 끝없이 몰려드는 모아이들과 사투를 벌이는 일이 생기더라도 맥을 독차지했을 것이다.
김진우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을 해보였다. 잠시 얼굴 근육을 꿈틀 댄 그는 맥의 존재에 대한 놀라움은 터럭만큼도 드러나지 않는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만들어냈다.
“상을 내려야겠군. 따로 원하는 게 있는가?”
비록 맥의 존재를 말해줄 수는 없었지만, 우서의 공이 워낙에 큰지라 그도 완전히 우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지간한 요구 정도는 들어줄 생각이었다.
“상을 바라고 한 일은…….”
“두 번 묻지 않아. 신중히 대답하도록 해.”
“그럼 가장 좋은 자리에 제가 거할 수 있게 해주시고, 이곳에서는 나는 다운 잼의 일부를 제게 주십시오.”
간사하게 웃으며 공치사를 하던 우서가 김진우의 차가운 한마디에 금세 태도를 바꿔 미주알고주알 원하는 것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좋아, 다 들어주도록 하지.”
김진우는 선선히 우서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눈치를 살피며 이런저런 말을 해대던 우서는 그가 생각보다 쉽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자 뒤늦게 아쉬운 얼굴을 해보였다. 아무래도 더 바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은 원하는 것을 말했고, 김진우는 수락했다. 그리고 그의 왕은 말을 번복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우서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렇게 놓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