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60)
던전 견문록-160화(160/319)
# 160
던전 견문록
제 161 화
맥을 발견한 김진우는 고민했다. 예전이라면 이곳에 방어용 미궁을 생성해두고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으로 다운 잼을 지켜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대미궁에서 다소 떨어진 맥을 지켜낼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노다지를 그대로 방치해 두자니 맥의 가치는 너무나 컸다.
결국 그는 고민 끝에 우서에게 명령했다.
“탐식의 덩어리들을 풀어 당분간은 이 통로 자체를 은폐하라.”
우서는 질색을 했다.
“이 정도 통로를 완전히 감싸려면 제 몸이 반쪽이 됩니다. 아니, 반쪽이 아니라 반의 반쪽이 되고도 남습니다요.”
이미 한 번 같은 방식으로 맥을 은폐한 적이 있는 우서였지만, 김진우의 요구는 과한 감이 있었다.
그는 우서의 눈이 닿지 않는 통로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고, 또 그만큼이나 넓은 영역을 은폐하기를 원했다.
“부탁하지.”
“이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겠습니까?
좀처럼 쓰지 않던 부탁이란 말까지 하며 자신에게 신신당부하는 김진우가 우서의 입장에서는 도통 이해가 가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우서가 생각하는 나가들의 왕은 비록 무더기라고는 하나 아직 여물지도 않은 다운 잼에 이리 가치를 둘 만큼 한가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이는 우서가 다운 잼의 무더기에 가려진 맥의 존재를 모르는 탓이기도 했고, 정예 병력이 증발한 대미궁의 상황을 모르는 탓이기도 했다.
“가치라…….”
김진우는 잠시 통로를 둘러보았다.
“그게 무엇이든 쓰기 나름이겠지.”
미미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보니 그는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
“오! 다 왔군요! 드디어!”
어지간한 임프보다 더 작아진 몸을 한 우서가 대미궁의 외곽을 발견하고는 펄쩍거렸다.
그렇게 마냥 기뻐하는 우서와는 달리 김진우는 어쩐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묘한 위화감, 분명 우서가 힘을 소진하며 걸음이 느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미묘하게 단축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놀랍군, 아직도 확장 중이라니.”
릭샤샤와 언더 엘프들의 보고는 놀라웠다. 대미궁은 모습을 드러낸 이후 꾸준히 경계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어제와 오늘의 대미궁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확장된 경계는 하루를 꼬박 걸어서야 끝과 끝을 만나게 될 정도가 되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주민의 수는 물경 1천이 넘어갔다.
아직은 거대한 규모에 비해 열악한 시설 탓에 다소 휑하기는 했지만, 이래서야 차라리 미궁이 아니라 하나의 도시라고 해도 좋을 판국이었다.
언젠가 대미궁의 비밀을 완전히 풀어내 모든 것을 통제 하에 두게 되었을 때, 그때가 벌써부터 기대되는 김진우였다.
하지만 지금은 먼 미래보다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모리건.”
릭샤샤를 돌려보낸 그는 모리건을 비롯한 고대 영웅들을 불러 모았다.
“그대들이라면 대미궁에 대해 조금은 아는 게 있겠지.”
그렇게 운을 뗀 그가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 우리 미궁은 끊임없이 외곽을 확장중이다. 그리고 나는…….”
부쩍 고분고분해진 모리건과 고대 영웅들이 그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그가 선언하듯 말했다.
“미궁이 그 경계를 확장하는 방향에 관여하려 한다.”
“아…….”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따로 생각하는 것이 있으신지요?”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도미니크가 모두를 대신해 물었다.
“여기, 바로 여기까지 대미궁을 확장시키는 게 목표다.”
대미궁으로 진화한 뒤로 하루에도 몇 번씩 순찰자들에 의해 갱신되는 9층의 지도, 김진우는 그중에서도 미궁과 이틀 거리에 놓인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바로 우서가 발견하고 김진우가 그 존재를 확인한 9층 지저의 맥이 있는 위치였다.
“이곳만 손에 넣으면, 미궁은 끝없이 확장될 것이다.”
비록 던전 에너지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에너지가 손실되기는 하지만, 모아이들은 꽤나 좋은 에너지원이었다.
그리고 그 모아이들은 다운 잼이라면 기가 막히게 그 위치를 파악해내 몰려드는 존재들이었다.
만약 9층 지저의 맥을 대미궁의 경계 안에 둘 수 있다면, 모아이들은 불꽃에 들러붙는 부나방처럼 끊임없이 몰려들어 대미궁의 배를 채워줄 것이다.
“아아… 그런 곳이 있다니…….”
그의 설명을 들은 이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지저를 오래도록 살아온 고대의 존재들에게도 지저의 맥은 생소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감탄하는 것은 잠시였을 뿐이다. 그들은 곧 왕의 채근에 자신이 아는 바를 전부 털어놓기 시작했다.
***
저마다 아는 바를 털어놓는 고대 영웅들에 의해 오너 룸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모리건과 헤임달은 미궁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보다 전장을 쏘다니는 시간이 더욱 긴 이들, 도움이 될 턱이 없었다.
릭샤샤를 비롯한 언더 엘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뿌리조차 찾지 못하고 지저를 헤매던 떠돌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머리를 맞댄다 한들 무언가가 나올 리가 없었다.
“전부 도움 안 되는 것들 뿐이로군.”
김진우의 말에 한창 신나서 떠들어대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자신들이 주제를 한참은 벗어났음을 깨닫고 겸연쩍은 얼굴을 해보였다.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할 게 아니라, 지금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찾으란 말이다.”
다소 메마른 그의 대답에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숙였다.
“쯧.”
그런 그들을 보며 그가 혀를 찼다. 그 쯧, 하는 소리에 모리건을 비롯한 이들이 더욱 더 죄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방법을 찾아야 해, 방법을.”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끊임없이 방법을 강구했다.
침입자들로 배를 채우는 대미궁, 그런 침입자를 불러 모아줄 맥의 존재, 이 두 가지 전제를 하나로 연결하기만 한다면 대미궁의 포만도가 떨어져 주민들이 희생될 경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뿐인가.
맥을 대미궁의 영역 안에 두는 데만 성공한다면, 굳이 모아이들과 드잡이질하느라 힘을 뺄 이유가 사라진다.
모아이들은 끊임없이 대미궁의 배를 채워줄 에너지원이 되어줄 것이며, 9층을 호시탐탐 노리는 수많은 침입자들로부터 9층을 지켜낼 사나운 번견(番犬)이 되어 줄 테니까.
“주인님, 지금 주인님은 잘 하고 계세요.”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가 고개를 들어 속삭이는 음성의 주인을 찾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도미니크의 표정에 어쩐지 안타까움이 가득해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요 근래 너무 쫓기시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최근의 주인님은 정말로 여유가 없어 보이세요.”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 진심으로 즐거워 웃는 일이 사라져 버렸다. 늘 메마른 미소만을 입가에 달고 살 뿐, 정말로 웃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부디 여유를 찾으세요. 비록 사라진 나가들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미궁은 누군가 쉬이 넘볼 수 없을 거예요. 만약 있다고 한들 폭도와 모아이들처럼 곧 후회하게 되겠죠.”
확실히 여유가 없긴 한 모양이다. 평소라면 그녀의 말에 한 번쯤은 되돌아봤을 김진우는 메마른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다른 이들은 달리 할 말 없나?”
그는 도미니크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소득 없는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모두가 자리를 떠났음에도 도미니크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왕의 모습이 무언가 이상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소 퉁명스러운 왕의 음성에도 간언했다.
“주인님, 부디 여유를 찾으세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왕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도미니크는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왕은 정상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왕의 조언자인 그녀만큼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왕은 무언가 이상했다.
“차라리 지상에 한 번 올라가보시는 건 어때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왠지 그가 잠시 지저를 떠나 있는 것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위대한 정복자의 고향이 볕 따뜻한 지상이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에게 지상에 다녀올 것을 조언했다.
“주인님도 지상에 다녀오시면 그래도 여유가…….”
“도미니크.”
하지만 왕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평소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폭급한 얼굴을 한 그는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비록 하이로드의 자격을 얻고, 대미궁을 얻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약자다. 지저에는 열 개의 대미궁을 멸망시킨 귀족들이 있고 그들은 하이로드의 힘을 원하지. 게다가 모아이들은 무주공산이 된 9층을 거덜 내기 위해 들개처럼 헤매고 있고.”
처음이었다. 왕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말을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는 것은. 그래서인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당황하고 말았다.
“전 단지…….”
“도미니크.”
하지만 이번에도 왕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난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화를 참고 있는 그 표정이 그렇게 이질적일 수가 없었다.
“난 그저 우선순위를 두었을 뿐이야. 그리고 필요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러니 도미니크도 가서 할 일을 해.”
다른 이들을 대하는 것보다는 부드러웠지만, 그의 말은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더 이상은 조언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마저도 왕의 심기를 거스른 것인지, 왕의 표정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추측은 조금씩 확신으로 변해갔다. 지나칠 정도로 폭급한 모습을 보이는 왕의 모습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왕에게 미움받는 건 죽는 것보다 더한 형벌, 하지만 왕이 그릇된 선택을 하는 것은 더욱 더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왕이시여.”
도미니크는 처음으로 그를 주인이 아닌 왕이라 불렀다.
“지상에 남겨둔 안젤라를 생각하소서. 그녀에게 맡긴 임무가 중함을 왕께서도 알고 있음이요, 피의 계약으로 맺어진 그녀의 안위 또한 어떠한 상황에 있을지 심히 우려되오니, 왕께서는 부디 헤아려주소서.”
지금 이 순간 그녀는 하찮은 나가 시녀가 아닌, 진정한 왕의 조언자였다. 요요롭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에 현기가 서리고, 낭낭한 음성에는 외면할 수 없는 충정이 깃들었다.
이는 그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변화이자, 각성이었다.
진정한 왕의 조언자로 각성한 그녀의 음성에 왕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부디 청정을 되찾으시어, 흐림 없는 눈으로 놓치는 것이 없도록 하소서.”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있던 왕도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인사를 마치고 물러선 그녀는 등뒤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돌아보지 않아도 왕이 차가운 눈초리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홀로 왕좌에 앉은 그는 어쩐지 휑하기만 한 오너 룸을 둘러보았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화려하게 변한 오너 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왕좌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여유라…….”
그가 가만히 도미니크의 말을 곱씹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리다간 목이 남아나지 않겠지.”
바싹 메마른 표정만큼이나 퍽퍽한 음성, 그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1년에 걸친 처절한 전쟁은 정말로 지옥이었다.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제 몸뚱아리 하나와 나가들뿐이었던 시절, 피아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미궁의 주인들은 봉신의 계약이 무색하게 전혀 충성스럽지 않았으며, 영악했다. 비록 힘에 의해 굴종하기는 했으나 봉신들 중 상당수는 그의 추락을 바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살아남는 것이 미덕인 이 지저에서 그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으며,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의 힘과 영광은 탐욕스러운 이들의 질시를 받기에 충분했다.
하기야 그만 죽고 나면 지저에 유일무이한 듀얼 코어의 핵과 미궁이 임자 없는 보물이 된다. 나가의 미궁만 손에 넣으면 9층 전체를 발아래에 두고 권세를 누리는 것이다.
그들은 김진우의 죽음을 바랐으며 모아이들이 준동하는 지저는 그를 위험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외로운 싸움, 오지 않는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며 사투를 벌인 것이 부지기수였다. 전투가 끝이 나면 그들은 뒤늦게 얼굴을 비추며 사죄했지만, 그들의 검은 속내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부터 9층 미궁의 주인들을 아군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하이로드에 올라 진실의 눈을 얻었을 때, 그는 차라리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탐욕, 질투, 혐오.
온갖 추잡한 감정을 숨기고 자신을 바라보던 수많은 이들의 눈빛을 기억한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뒤에 숨기고, 질투와 혐오를 매끈한 혀끝으로 포장한 이들의 기만에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폭도가 되어 날뛰어 주어서, 구실을 주어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대미궁이 그들을 전부 받아들일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킥.”
실소가 흘러나왔다. 탐욕과 혐오로 뒤에서 수군거리던 이들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인 그가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정리할 일도 있으니…….”
도미니크의 말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여유를 찾지 않으면 부서질 정도로 스스로가 약한 것도 아니다.
지금은 단지 지상에 남겨둔 일이 있기에 지상으로 향할 뿐이었다.
“포탈.”
허공이 갈라지고 포탈이 열리고, 김진우는 지상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신음성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