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61)
던전 견문록-161화(161/319)
# 161
던전 견문록
제 162 화
62. 대미궁의 또 다른 이름
포탈을 넘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부유감과 아찔함이라고 하기에는 위화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꿈속을 헤매듯 몽롱하던 정신이 어거지로 현실과 맞춰지는 듯한 느낌, 그 괴리감에 그는 신음했다.
그리고 그 끔찍한 기분이 언젠가 겪어보았던 것임을 깨달았다.
“악몽…….”
디나리온과의 강제적인 만남, 그 이후에 느껴지던 불쾌함이 바로 지금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디나리온을 만나 악몽을 꾸기는커녕 애초에 잠을 잔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산조각 부서져 흩어져 버린 감정의 여운은 놀라울 만치 악몽의 권능과 닮아 있었다.
지금의 그는 마치 기나긴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김진우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둘러싼 이 기묘한 어긋남의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미궁.
지저에 유일무이한 이 괴물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리고 지상에 오른 지금 대미궁과의 유대가 약해졌으며, 그 덕에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맙소사.”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닭살이 돋아 피부가 꺼끌꺼끌하게 일어났다. 등가로 차가운 한기가 흘러내리며 천길 낭떠러지 위에 선 것처럼 머리가 아찔해졌다.
수천의 폭도들과 수백의 모아이들을 집어삼킨 괴물은 그것도 모자라 주인의 정신마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대미궁은 그의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괴물이었다. 이 거대하고 음험한 괴물은 탐욕덩어리였다.
[하이로드 김진우가 대미궁의 진명(眞名)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그간 걸어온 행보는 평화보다는 폭력에, 화합보다는 지배에 가까웠습니다. 당신은 사나운 전사이자, 탐욕스러운 통치자입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겁화이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탐욕 그 자체입니다.] [대미궁은 그런 당신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 존재입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이 유일무이한 대미궁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탐식자입니다.] [대미궁의 진명은 ‘탐욕(貪慾)’입니다.]뒤늦게 떠오른 메시지를 본 순간 짐작이 확신이 되었다.
[하이로드로 각성한 당신의 힘은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 의해 탄생한 탐욕의 대미궁은 고대 열 군주의 대미궁에 비견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입니다.] [서둘러 힘의 불균형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정신은 욕심 많은 대미궁에게 집어삼켜지고 말 것입니다.] [고대 군주의 파편, 또는 옛 권능의 파편을 모으십시오. 그것만이 당신이 이 탐욕스러운 괴물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아무래도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품에 안은 모양이다. 김진우는 길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을 정리했다.
비록 통제 불능의 괴물에게 집어삼켜질 뻔했지만, 상황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대미궁을 통제할 방법의 실마리는 찾아냈으니까.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한 순간, 가야 할 길이 정해졌다.
우스투스와 같은 존재를 찾아 고대 군주의 파편을 흡수하고, 지저 귀족의 인장을 찾아 옛 권능의 파편을 흡수한다.
그리고 힘을 키워 말 안 듣는 괴물의 종아리를 회초리 칠 것이다. 그럼 대미궁은 다시는 자신을 넘보지 못하게 되리라.
주인도 못 알아보는 괴물의 만행에 그는 정말로 화가 났으니까.
“왕께서 여긴 어떻게…….”
생각에 잠겨 있다 갑작스러운 기척의 등장에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이내 그 정체를 깨닫고는 멍한 얼굴을 해보였다.
“윤희?”
언더 엘프들에게 미궁을 버리고 떠나 종적이 묘연하다 들었던 윤희가 그의 앞에 있었다, 그것도 사이즈도 맞지 않는 그의 커다란 티셔츠로 간신히 몸을 가린 모습으로.
***
“왕과 연락이 끊겼을 때, 상황이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윤희는 꽤나 무덤덤한 어투로 지나간 일을 풀어 놓았다.
“모아이들은 이제 파티 홀의 지척까지 접근했고, 저와 그림자 소환수들이 그들을 막아내기에는 힘이 부족했어요.”
대미궁 탓에 거의 보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세상과 단절되었던 김진우였다.
바로 직전에도 더는 버티기 힘들다 하소연했던 윤희와 파티 홀이니만큼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더 버티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고 많은 곳 중에 왜 지상으로?”
지상은 윤희에게 익숙한 곳이 아니다. 스스로도 이유를 모를 묘한 그리움과 향수가 있는 곳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지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도피처의 선정에 있어서 그다지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지상에 무지한 그녀는 던전 베이비 한 사람 몫도 하지 못하는 반편이였으니까.
하지만 나름대로 지상으로 도피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았다.
“디나리온, 그의 전령이 저를 찾아 왔어요.”
“디나리온이?”
이미 미몽의 여왕이 첩자였음이 드러난 지금 김진우는 그녀의 말을 전부 믿을 수 없었지만, 내색치 않고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해보였다. 최소한 진실의 눈을 통해 살펴 본 지금의 그녀는 거짓이 없었다.
“그는 제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눈치였어요.”
“아…….”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비록 후계 경쟁에 밀려나 블랙 머천트의 경매 상품이 되었던 그녀라지만, 친부가 직접 부르는 것이라면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최소한 지상보다는 11층 백작의 미궁이 그녀에게 더욱 익숙하고 안전한 곳이었다.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왜지?”
그의 질문에 그녀는 다소 경직된 얼굴로 대답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으니까.”
윤희는 잠시의 텀을 두고 바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왕과 연락이 두절된 순간, 깨달을 수 있었거든요. 그에게 필요한 것은 미궁의 주인이자 후계자인 윤희가 아니라, 고대 군주의 힘을 담을 그릇이라는 것을.”
그렇게 말한 그녀가 김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하도 많이 뒤통수를 맞았더니,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아서 말이지.”
실제로 그는 그녀가 하이로드와 관련된 사안을 전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리아네가 제 정체를 실토했어. 그녀 역시 하이로드에 대해 알고 있더군. 이런데도 내가 그대의 말에 놀란다면 곧 죽어도 할 말이 없겠지.”
아리아네의 자백을 받았을 때, 그가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저를 원망하지 않으시나요?”
“원망? 어차피 먹고 먹히는 지저, 그런 유치한 감정놀음할 생각은 없어.”
지나칠 정도로 덤덤한 말투, 어쩌면 그가 놀라지 않는 것은 탐욕의 대미궁에 사로잡혀 짧은 시간 너무도 많은 분노를 토해낸 탓에 더 이상 소모할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던 탓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해가 되는 건 아니야. 만약 하이로드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도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힘이기도 하죠.”
김진우는 그녀가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하이로드의 힘과 대미궁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저의 형제, 자매들이 고대 군주의 힘을 재현하려다 희생되었어요. 이제 와서 새삼 그가 그간의 실패를 만회할 만한 무언가를 찾았을 것 같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위험과, 그가 생각하는 위험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힘의 구현이 실패했을 경우를 우려하고 있었다.
“그의 권능은 악몽, 살아 있는 존재인 이상 그의 권능을 피해갈 수는 없어요. 누구든 잠을 자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상으로 도망쳤어요.”
윤희는 자신이 할 말은 모두 끝이 났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진실의 눈을 통해 살펴 본 그녀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디나리온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군.”
“뭐가 말인가요?”
“난 그대에게 내 집의 위치를 알려준 적도, 포탈을 연결할 기회를 준 적도 없었는데?”
김진우는 그녀를 길들이기 위해 지상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이용했다. 당연하게도 그녀 스스로의 능력으로 지상으로 향하게 둘 정도로 그는 허술하지 않았다.
“도움을 받았어요.”
“도움?”
윤희는 다소 질렸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쁜 남자네요. 지금이라면 생각이 났을 줄 알았는데.”
봉신의 계약에서 풀려난 탓인지 그녀는 그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흡혈귀, 그녀의 도움을 받았어요.”
“안젤라!”
뒤늦게 맹목적인 흡혈귀의 존재를 떠올린 그가 안젤라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과 완전히 연락이 끊긴 그녀는 9층으로 향하는 길이 막혔음을 깨닫고, 저를 찾아왔어요. 그리고 저는 그녀와 함께 지상으로 도망쳤지요.”
안젤라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다른 이들이 봉신의 계약으로 강제적인 굴종의 관계를 맺었다면, 그녀는 피의 계약으로 섬길 주인을 스스로 택했다.
그리고 피의 계약은 봉신의 계약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계약이었다. 주인의 피를 생명의 원천으로 삼는 이 지독할 정도로 끈끈한 계약은 한 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그녀는 지금 거의 소멸되기 직전이랍니다.”
주인의 피를 마시지 못하면 급격하게 기력이 쇠하다가 끝내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안젤라는 어디 있지?”
윤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몸을 돌려 그를 안내했다. 잠깐 사이에 꽤나 익숙해졌는지 그의 안가를 마치 제 집처럼 활보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태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생명력이 고갈되어 죽어가고 있을 안젤라의 상태를 우려했던 탓이다.
“들어가 보세요.”
그녀의 안내를 따라 평소 침실로 사용하던 자신의 방에 도착한 그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주, 주인님?”
새하얀 시트가 올려진 황막한 침대 위, 그 시트만큼이나 창백한 안색을 한 안젤라가 있었다.
평소라면 그를 보기가 무섭게 들러붙었을 그녀는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운지 간신히 그의 음성에 대답만 해주었을 뿐이다.
불과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 아름답고 도도하던 흡혈귀는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아 마치 시체처럼 변해 있었다.
“주인님!”
그녀는 당장에라도 마른기침을 토해낼 것만 같은 바싹 메마른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저, 다운 잼의 행방을 찾았어요. 주인님이 안 계신 동안에도 주인님 명령대로 했어요.”
생명력의 원천을 잃고 죽어가던 와중이었음에도 그녀는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것처럼 제 공을 늘어놓았다.
일말의 원망도 보이지 않는 그 한결같은 모습에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다가가 한때는 탐스러웠던, 하지만 지금은 퍼석퍼석하게 갈라진 금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했어, 안젤라. 수고했어.”
“헤헤.”
바보처럼 헤죽 웃어 보이는 안젤라의 모습을 보며 그는 날카롭게 손톱을 세우고, 손목을 그어냈다.
“아아.”
힘이 없어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던 그녀가 새빨간 생명의 정수를 한 방울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바싹 말라 갈라진 입술이 살점 채로 떨어져 나갔음에도 그녀는 고통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그의 피를 탐했다.
생기를 잃고 미이라처럼 말라 있던 그녀의 몸이 조금씩 생기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