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62)
던전 견문록-162화(162/319)
# 162
던전 견문록
제 163 화
마치 어미의 젖을 찾는 갓난아이처럼 안젤라는 계속해서 그의 피를 빨았다.
퍼석퍼석하던 누런 머릿결이 금세 윤기를 되찾아 금빛으로 빛나고, 움푹 들어가 있던 광대와 눈자위에 보기 좋게 살이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흡혈을 멈추지 않았고, 김진우 역시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그조차도 현기증이 느껴질 즈음, 안젤라가 그의 손목에서 입을 떼어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탐스러운 입술이 떨어지고 잇새로 지나칠 정도로 쾌활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주인님!”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송장이나 다름이 없던 그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그의 품에 안겼다.
“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야…….”
쾌활했던 음성이 금세 젖어들었다.
“분명 피의 계약은 절대적인데, 주인님이 느껴져야 하는데, 주인님을 찾아야 하는데…….”
두서없는 말, 김진우는 굳이 진실의 눈을 통해 보지 않아도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과의 재회를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주인님이 느껴지질 않아서, 주인님이 사라져서…….”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어느새 다가온 윤희가 말했다.
“지상으로 와서도 계속해서 그녀는 제 주인을 걱정하더군요. 정말이지 보는 제가 다 감동받을 지경이었어요.”
이미 그도 짐작한 사실이다. 피의 계약으로 맺어진 주인과의 연결이 끊어진 순간, 그녀는 급속도로 죽어갔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본 그녀의 모습은 조금만 늦었다면 위험한 상태였다.
빌어먹을.
대미궁에게 사로잡혀 지상의 일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스스로가 한심해질 지경이다. 미안함과 자책으로 그는 자꾸만 금빛 머릿결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중에는 몸이 약해져서 주인님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찾아갈 수가 없었어요.”
간신히 울음을 멈춘 그녀가 조잘조잘 그간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윤희가 슬며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녀가 방을 나서기 전 그는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뭐, 저도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윤희는 그의 감사 인사에 필요 이상으로 당황해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아, 맞다. 주인님. 다운 잼! 다운 잼, 행방을 찾았어요!”
윤희가 떠나고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 안젤라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 어디지?”
다운 잼이 무더기로 발견된 맥을 찾았음에도 그는 귀가 솔깃하는 것을 느꼈다.
“어떤 커다란 건물인데, 입구 경비가 삼엄해서 끝까지 들어가 보지는 못했어요.”
“탐색자가 경비를 선 모양이군.”
그림자에 숨어 이동하는 안젤라의 은신술은 그도 집중하지 않으면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
그런 그녀가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면 필시 던전 베이비들이 경비를 섰을 것이다.
“조금 쉬었다가 그쪽으로 가보도록 하지.”
말로 백번 듣는 것보다 직접 한 번 보는 게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안젤라의 재잘대는 입을 막고는 방을 나섰다.
마침 기다리고 있던 윤희가 그를 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김진우가 그보다 빨랐다.
“아직 설명할 것이 남았군.”
그렇게 말한 그의 눈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섬뜩할 정도로 번뜩이고 있었다.
“설명할 수 있어요.”
윤희가 눈에 띄게 당황하여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 설명해야 할 거야.”
처음에는 대미궁의 지배에서 벗어난 여파로 느껴지지 않았던 미궁의 기운이 지금 이 순간,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그가 심어두었던 보잘 것 없는 미궁의 핵이 뿜어내는 기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리고 김진우는 이 기운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왜 지상에 파티 홀이 존재하는지.”
사라진 지상의 미궁,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 한 파티 홀의 기운에 그의 눈이 번뜩였다.
***
윤희는 그의 협박 아닌 협박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전처럼 안광을 줄줄 흘려대며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라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렇게까지 기운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그의 존재감에 짓눌리고 있었다.
이게 하이로드의 힘인가.
존재의 격이 다르다. 사납게 몰아치는 것이 아닌 더 높은 격, 더 강대한 존재감으로 조용히 찍어 눌러 온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그의 기운에 저항할 수 없었다.
“저, 저는 혼혈이에요. 어머니의 피가 흐르긴 하지만, 저는 미궁에 속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요.”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대 말고도 많은 혼혈이 지상에 올라와 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대와 같은 말을 하는 이는 없었지.”
수많은 혼혈들이 자신의 태생을 숨긴 채 지상에 올라와 활동하고 있지만, 개중 그 누구도 그녀처럼 미궁에 의지하지 않았다.
“달라요. 그들과 저는 다른 존재들이에요.”
“더 설명해봐.”
호기심이라도 느낀 것일까. 뒤늦게 그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그녀는 막혔던 숨이 탁 트이는 것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목가를 쓰다듬었다.
“저는 노예니까요.”
“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김진우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보며 윤희는 이를 악물고 설명을 이어갔다.
“심층의 백작들은 혈족이라고 무작정 믿을 정도로 온화하지도 만만하지도 않은 존재들이에요. 디나리온이 비록 내 친부이긴 하지만, 그는 나를 완전히 믿지 않았어요.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아요. 심지어 순혈의 후계자조차도 그는 완전히 믿지 않아요.”
새삼 놀라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지저의 백작들 뿐 아니라 지저를 살아가는 존재라면 다른 이를 믿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심층의 백작들처럼 자신의 친족에게 끔찍한 저주를 걸지 않았다.
“이게 바로 그 증거에요.”
“그건…….”
“후계자의 징표, 하지만 후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를 자랑스러워 하지 않아요.”
뽀얀 살결 위에 새겨진 희미한 낙인이 마치 오래된 흉터처럼 흉물스러웠다.
“시술자의 의지를 거부할 경우,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끔찍한 저주, 우리는 이걸 노예의 낙인이라 부른답니다.”
이번에는 김진우도 놀랐던 모양이다.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는 그를 보며 그녀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 저주의 영향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저나 디나리온 둘 중에 하나가 죽거나, 저주의 힘이 닿지 않는 곳으로 향하는 것뿐이랍니다.”
아마도 그래서였던 모양이다. 그녀가 지상의 볕을 그리도 기꺼워했던 것은.
“그리고 저는 저주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어요.”
스스로가 지상에 미궁을 꾸려 나가겠다면 윤희를 말릴 이유는 없었다.
그간 들인 공이 아깝기는 하지만, 이미 대미궁이라는 통제 불능의 괴물이 버티고 선 지금의 9층에 파티 홀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강제로 무릎 꿇려 지저 어딘가에 자리 잡게 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결국 디나리온의 의도대로 놀아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진실의 눈은 그녀가 진실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말해주었다.
일이 이리저리 꼬인 지금, 차라리 그녀가 디나리온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 있는 게 어쩌면 서로에게 이득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의 결정을 지지할 수가 없었다.
지저의 존재들만큼이나 음흉하고 간교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위험할지도 모르는 지상의 인간들 탓이었다.
기존에 심어두었던 핵이라면 모를까. 이미 업그레이드가 꽤나 진행된 파티 홀의 에너지는 지나치게 강력했다. 최악의 경우 인간들이 파티 홀의 존재를 발견하게 될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승권이니 뭐니 기만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또한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요. 노예의 낙인이 있다고 해서 제가 정말로 노예인 것은 아니에요. 제 계승권은 여전히 유효해요.”
윤희는 도망치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쇠약해진 안젤라를 버리고 지상 어딘가에 몸을 숨겼을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그를 피해 달아나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제발.”
무릎을 꿇고 간절히 애원하는 윤희.
경매장에서 사들인 노예, 하지만 악몽의 디나리온의 후계자이자 지상인의 피가 섞인 지저의 혼혈. 그 복잡한 관계를 떠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그녀의 절박한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지저라는 괴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없이 약하고 가엾은 존재, 그게 바로 과거의 자신이었고 지금의 윤희였다.
“안젤라의 목숨 값인 셈인가.”
안젤라는 말했다. 비록 생명의 원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녀의 피를 통해 그나마 삶을 연명할 수 있었노라고.
이미 그녀를 돕기로 마음 먹은 김진우였지만, 어느 정도 명분은 필요했다. 그것이 지저를 살아가는 그의 마음가짐이었고, 매뉴얼이었다.
무조건적인 선의가 아닌 주고받는 상호보완적인 관계, 어쩌면 말장난일지도 몰랐지만 그는 다소 억지로나마 그녀와 자신의 관계를 그렇게 규정지었다.
“좋아, 그대를 도와주도록 하겠다, 대가는 받겠지만.”
하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앞으로 윤희가 필요로 할 도움은 안젤라의 목숨 값보다 클 테니까.
“그게 무엇이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값을 치르겠습니다.”
윤희가 고개를 숙였다. 진실의 눈은 그런 그녀의 마음에 한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았노라 말했다.
봉신의 계약으로도 잡아두지 못했던 그녀가,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제약이 풀린 순간 진심으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곧 사람을 부르겠다. 지저까지 파고들어서야 그대가 도망친 이유가 무색해지겠지만, 미궁 위에 흙을 올려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정도라면 어렵지 않겠지.”
아마도 꽤나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진우는 이를 수고롭다 생각하지 않았다.
윤희와 파티 홀의 존재로 그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어낼 자신이 있었다.
그녀의 파티 홀은 그가 통제 불능의 괴물, 대미궁의 고삐를 채우기 전까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될 것이다.
또한 최악의 경우, 그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고마워요.”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는 윤희의 진심 어린 인사에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을 바라보며 호의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고마워할 거 없어.”
하지만 그는 그녀의 감사 인사를 시큰둥하게 받아넘겼다.
“그대의 파티 홀 옆에 나의 미궁 또한 들어설 것이니.”
그에게는 운 좋게 대미궁의 식탐을 피해간 미궁의 핵이 아직 남아 있었다.
1년간의 처절했던 전쟁에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심어놓았던 지상의 핵, 그는 앞으로 그 핵을 본격적으로 키워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