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63)
던전 견문록-163화(163/319)
# 163
던전 견문록
제 164 화
63. 지상의 미궁
대미궁의 탐욕은 지상까지 닿지 않았다. 지상에 심어두었던 핵은 건재했고, 한때 나가의 요새를 잃었을 경우를 대비해 심어두었던만큼 그 잠재력이 결코 하찮지 않았다.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의도치 않게 둔 절묘한 한 수였다.
당장에라도 한계까지 미궁의 등급을 성장시키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지금이야 등급이 낮아 존재감이 미미한 미궁이지만 앞으로도 그러란 법은 없었다.
미궁을 업그레이드하더라도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준비를 하려면 지저에 내려가야 했다.
미궁의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다운 잼이 지저에 있었으니까.
“아…….”
포탈을 넘자마자 도미니크를 만났다. 평소라면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반겨주었을 그녀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달려오려다 멀찍이 물러나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지 못한 분위기에서 나눴던 지난 대화가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도미니크.”
그대로 두었다가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서서 다가오지 않을 모양새였다.
결국 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이름을 부르니 그제서야 허둥지둥대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마저도 몇 걸음 오지 않고 멈춰서는 그녀였다.
“주인님…….”
풀이 잔뜩 죽은 음성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고개를 푹, 하고 숙인 도미니크가 입술을 악다무는 것이 보였다.
“주인님!”
무언가 결심이라도 했는지 결연한 각오가 느껴지는 눈빛을 한 그녀가 다부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직도 자신이 대미궁의 탐욕에 잠식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또다시 잔소리를 시작할 그녀의 표정에 그가 씨익 웃어보였다.
무언가 막 입을 열려던 그녀가 그 미소를 보고는 순간 멍한 얼굴을 해보였다.
“고마워, 덕분에 머리가 맑아졌어.”
미안하다, 내가 야속했노라, 사과도 필요 없었다. 그저 고맙다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는지 도미니크는 멍한 얼굴로 눈만 껌벅여댔다.
“고마워, 도미니크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김진우가 한 번 더 고맙다 말을 하자 그제야 그녀는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울컥한 얼굴을 해보였다.
“주인님!”
방금 전의 의기소침했던 음성과는 확연히 달라진 음성, 기어이 도미니크의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해서, 이제 주인님이 저를 안 보실 거라고…….”
그날의 스스로가 대체 어떤 눈빛으로, 어떻게 그녀를 대했던 것일까. 대미궁에 잠식되었던 의식이 깨어났지만, 그때의 자신이 그리고 그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름대로 대단한 각오로 자신에게 직언했을 거란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당장 눈앞에서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한 그녀는 혹시라도 주인에게 미움받고 버려지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하는 작은 강아지였다.
“고마워.”
“아니요, 제가 감사드려요. 다시 돌아와 주셔서. 주인님이 다시 주인님으로 돌아와 주셔서, 제가 감사해요.”
그 대가 없는 헌신과 봉사에 김진우는 가슴께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왕의 조언자, 도미니크의 조언은 듣기 불편했지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했습니다. 대미궁의 탐욕에 잠식되어 의식이 혼몽했던 당신이지만, 당신은 현명하게 조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당신은 대미궁의 음험함을 깨닫고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극복할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현명한 왕과 충성스러운 조언자의 관계는 지저에 보기 드문 미담이 될 것입니다.] [가장 현명한 조언도 왕에게 닿지 않아서야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훌륭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고, 당신을 위기에서 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도미니크의 능력, 왕의 조언자로서의 능력이 한 단계 성장했습니다.] [도미니크가 새로운 능력을 얻었습니다.] [특수 능력, ‘일깨움’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앞으로 그녀의 조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에게 올곧게 전달될 것입니다. 설령 당신이 또다시 대미궁에게 의식을 잠식당해도 그녀의 조언만큼은 당신을 일깨울 것입니다.]“아…….”
도미니크와 김진우가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에 놀란 그의 눈에 몸을 움찔대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자신의 몸에 일어난 미묘한 변화를 느끼고 당황하고 있는 눈치였다.
“축하해, 도미니크.”
“아… 이건 대체…….”
그러고 보니 그녀의 음성이 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단지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신비로운 음색에 그가 다시 한 번 감탄하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음…….”
도미니크에게 일어난 변화로 분위기가 좋아졌지만, 이는 잠시였을 뿐이다. 또다시 자신의 의식이 무언가에 침범당하고 있음을 느낀 김진우가 빠르게 지난 일을 설명해 주었다.
“미궁 스스로가 주인을 지배하려고 하다니…….”
그녀는 대미궁이 스스로의 자아를 갖고 제 주인마저 집어삼키려고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지, 경악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래서 당분간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지금도 슬슬 무언가가 울컥하는 게, 오래 머물렀다가는 저번처럼 의식이 온전치 않아질 거야.”
일단은 고대 군주의 파편과 귀족의 인장을 모아 스스로의 힘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충분히 힘이 모이기 전에 돌아왔다가는 그 사나운 의지에 잠식되어 버리고 말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도미니크가 필요한 것을 좀 챙겨줘야겠어.”
현명한 도미니크라면 굳이 하나하나 설명해주지 않아도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해줄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다운 잼부터 시작해서 소환석까지 도움될 만한 것들은 싸그리 긁어모아 왔다.
그런데 그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꾸려온 짐을 소중하게 안은 그녀는 도무지 짐을 건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미니크?”
“저도 함께 가겠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김진우가 뜨악한 얼굴을 해보였다.
“본격적으로 지상의 미궁을 성장시키실 생각이라면, 저 하나 지낼 곳은 충분하겠지요.”
그녀는 그의 거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도미니크가 없으면 대미궁은 누가…….”
“주인님마저 집어삼키려던 흉악한 대미궁을 제가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어차피 이곳에 남아 있어도 할 일이 없으니, 차라리 주인님을 따라가겠어요.”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다. 하이로드에 오른 그마저도 통제하지 못했던 대미궁을 고작 대리자에 불과한 그녀가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이 생기면 까마귀와 릭샤샤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예요.”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모리건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진실의 눈을 통해 살펴본 그녀의 충성은 비록 그 대상이 잘못되었을지언정 진심이었다.
릭샤샤 또한 그간 언더 엘프들을 휘하에 두고 경험을 쌓아 제법 쓸 만해졌으니, 믿고 미궁을 맡길 만했다.
“끄응.”
결국 그녀의 고집을 꺾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하지.”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도미니크가 굳은 표정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단호하게 제 주장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가 거절할까봐 조마조마했던 모양이다.
급기야 그녀는 아직 볼일이 채 끝나지도 않은 그를 두고 포탈을 넘었다.
“어지간히 걱정됐던 모양이네.”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어 자신을 두고 갈까 걱정한 그녀의 행동에 그가 결국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의 의식이 무언가에 잠식되어 감을 깨닫고는 남은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이동했다.
“진우 씨?”
이준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 배정되었던 방에 그대로 남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당분간은 돌아오지 못할 거 같아요.”
“아…….”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면 다소 미안한 감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를 지저에 처박아둔 장본인으로서 책임감이 느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또 싸우러 가는 건가요?”
“비슷합니다.”
대미궁의 탄생과 함께 다운 잼의 중독성을 벗어난 그녀는 고스란히 과거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녀를 들여다보고 모아이들과의 전투를 위해 나섰던 그를 떠올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조심해요. 그리고 너무 늦지는 말아요. 아직 저는 진우 씨한테 할 일을 듣지 못했어요.”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그녀에게 적당한 일을 주었을 수도 있었지만 대미궁의 탐욕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옥죄어 오고 있었다.
“혹시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말해요. 가능한 한 구해다 줄 테니까.”
그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 대신 한참이나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지상에 가는군요.”
“…맞아요.”
차마 거짓을 말하지 못해 한숨을 내쉬는 그를 보며 그녀가 복잡한 표정을 해보였다.
“저는 여전히 지상으로 갈 수 없겠지요?”
김진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가 돌아가면 일이 복잡하게 꼬일 가능성이 있었다. 아직까지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고, 그들 중 대다수는 지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혹시라도 그녀의 귀환으로 그들이 개입하게 되면 계획이 어그러지고 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꼭 배신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제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심지 곧은 여인이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자신의 뒤통수를 칠 일은 없다고 믿는 그였지만, 그래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미안합니다.”
그녀는 그의 사과에 다소 복잡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이곳에 적응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노라 말했지만, 역시나 지상에 대한 미련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불편할 정도로 매달린다거나 애원의 눈길을 보내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해해 볼게요. 아직은 제가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오래 이야기하기가 힘드네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맥이 빠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완곡한 축객령에 그가 망설이다 말했다.
“필요한 건 아무나 붙잡고 말하면 어지간해서는 구해줄 겁니다.”
적당히 인사를 나눈 김진우는 복잡한 심경을 숨긴 채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이준영이 그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진우 씨, 이야기 어디에도 할 생각은 없는데…….”
진심이 절절한 한마디였지만, 그는 이미 떠나고 난 뒤였다.
***
“내 이럴 줄 알았지. 주인님이라면 죽고 못 사는 이 나가 아가씨가 주인님만 올려 보내진 않을 거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
반나절 사이에 완전히 되살아난 안젤라가 도미니크를 보며 말했다.
“흥, 남이사.”
그녀의 입장에서야 죽다 살아났으니 이 도도한 나가마저 반가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는 도미니크는 훽, 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오랜만이야.”
그런 도미니크의 눈에 다소 어정쩡한 거리에 선 윤희의 모습이 보였다.
“당신은…….”
“사정이 있어서 함께하게 됐어. 그냥 그렇게만 알면 돼.”
뒤늦게 포탈을 넘어온 김진우가 대략적으로 상황을 뭉뚱그려 설명해 주었다.
“당분간은 업그레이드 없이 이대로 지내도록 해. 기운이 새나가지 않게 먼저 주변 공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사이에 간단한 계획을 세워둔 것인지, 그의 설명이 청산유수였다.
“하지만 여긴 나가 일꾼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가 작업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을 텐데요.”
현명한 도미니크와, 나름대로 영악하다 할 수 있는 윤희였지만 지상의 생활에 대해 무지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일할 필요는 없어.”
“그럼요?”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들을 보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선 돈이면 안 되는 게 없거든.”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지상, 그는 귀신이 아니라 귀신 일가족이라도 부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