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67)
던전 견문록-167화(167/319)
# 167
던전 견문록
제 168 화
“내가 글쎄.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하다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김진우는 이미 진실의 눈을 통해서 그가 이 상황을 의도했으며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무슨 꿍꿍이가 있어 정찬식을 충동질시켰을 게 분명했다.
협회라면 이를 갈아붙이던 정찬식이 이곳에 있는 이유나, 흥분해 자신에게 달려든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냉담하게 송종철의 말을 잘라냈다.
“그다지 관심 가는 화제는 아니군.”
이제 막 신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던 송종철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김진우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협회에서 요즘 일반인을 상대로 장사도 하나?”
“장사?”
송종철이 그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해보였다. 표정만 보면 정말로 몰라서 되묻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진실의 눈은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다운 잼. 누가 협회에서 500만원이나 주고 샀다더군.”
정확하게는 속이 빈 다운 잼이었지만.
아무리 던전 베이비라도 보는 것만으로 다운 잼의 내용물이 비었는지 아닌지를 알아본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어느 정도의 진실을 숨긴 채 송종철을 떠보았다.
“아, 그거?”
끝까지 잡아뗄 거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다르게 송종철은 빠르게 그의 말을 인정했다.
“물건에 임자 있나. 필요하고 값을 치를 돈이 있으면 사는 거지.”
하지만 여전히 송종철은 숨기는 것이 많았다. 그는 다운 잼의 내용이 빈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떠들어댔다.
“요즘 물량이 넘치는 모양이군?”
“그럴 리가. 그동안 꼬불쳐 두었던 것들 처분하는 거야.”
어쩐지 겉도는 듯한 대화, 하지만 송종철과 김진우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송종철은 그의 속을 전혀 들여다볼 방법이 없었고, 그에게는 진실의 눈이라는 비현실적인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뭐, 내가 상관할 부분은 아니긴 하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송종철은 그가 선선히 물러나는 것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심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호의적인 미소였다.
“그래, 그간 뭘하고 지냈는지 좀 이야기해보는 게 어때? 그래도 우리, 제법 친하잖아? 나, 나름대로 그쪽한테 꽤 호의를 보였다고.”
던전 베이비의 탄생에 관련된 비사를 말해준 것이 송종철이고, 심층으로 통하는 우회로라며 우스투스를 소개시켜준 것도 송종철이었다.
나름대로 득을 본 것이 없진 않으니 그의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적당히 맞장구치며 그간의 이야기를 뭉뚱그려 이야기해 주었다.
“그냥 지저도 다니고, 바빴지.”
“역시 최고 레벨의 던전 베이비는 다르구먼. 지금 같은 상황에 지저를 들락거린다니. 우리 같은 평범한 탐색자들은 그저 입구에 흘러나오는 크리쳐나 잡고 일당이나 땡겨받는데 말이야.”
별 의미 없는 대화. 하지만 두 남자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상대방을 떠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한 쪽도 밀리지 않는 대등한 대화였지만, 송종철은 이미 기세에서 지고 있었다.
1년간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지?
겉으로는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친한 척을 해보인 송종철이지만, 그는 내내 김진우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펴본 12층의 던전 베이비는 1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놀라울 만큼 달라져 버린 김진우의 기도에 놀라고 말았다. 여상스럽게 떠들어대는 음성에는 알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으며 흔들림 없는 새까만 눈동자는 속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도 깊었다.
이따금씩 무심한 듯 자신을 스쳐 가는 시선과 마주할 때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으니, 마치 제 속이 낱낱이 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불편했다. 그러한 시선을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지를 않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아무 것도 없는 한쪽 벽면에 자꾸만 머물다 가는 김진우의 시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교롭게도 그의 시선이 자꾸만 멈춰 선 그곳에는 그가 특별 주문 제작한 금고가 벽 속에 고이 감추어져 있었다.
“레벨 12의 이름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만. 명색이 탐색자 협회 회장인데, 이렇게 후달리게 만드는 걸 보면.”
찝찝한 기분도 잠시, 송종철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그곳에 금고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신의 눈에도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벽면. 그 너머의 비밀 금고를 간파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지나치게 김진우를 높이 평가한 나머지, 이런 강박에 시달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두 가지 있었으니, 속을 들여다보듯 투명한 시선은 김진우가 하이로드의 특수 능력, 진실의 눈을 활성화시켰던 탓이고, 그가 자꾸만 벽면을 쳐다본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을 보이지 않는 존재, 기생수를 말이다.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기생수의 감각에 잡혔습니다.
-기생수의 능력 ‘탐사’가 활성화됩니다.
김진우는 한쪽 벽면이 녹빛으로 번뜩이는 것을 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찾았다.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고 자신의 주의를 돌리려는 송종철의 시도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는 시늉을 해보였지만, 기생수의 능력은 여전히 활성화된 상태였다.
-다운 잼 무더기를 발견했습니다. 개중에는 이미 사용되어 쓸모없어진 다운 잼도 있지만, 대부분의 다운 잼은 조금의 에너지도 손실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김진우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벌써 가게?”
“다음에 또 만날 일이 있겠지.”
“캬, 이제 정말 좀 친해진 건가? 그쪽이 다음을 기약하다니.”
“멋대로 생각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송종철은 그가 이 자리에 더 머물 생각이 없다는 사실에 굉장히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다음에는 밥 한 번 먹자고.”
마지막까지 속내를 내비치지 않은 송종철이었지만, 김진우의 기척이 사라지자 완전히 표정이 돌변했다.
“상식이랑 자철이가 저 친구 따라가 봐. 도대체 왜 온 건지, 또 어디로 가는 건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어.”
그 말에 문밖에서 짧은 대답이 들려오고는 이내 발소리가 들리다 사라져버렸다.
“제길. 뭐가 이렇게 찝찝하지.”
“꼴 좋군. 그렇게 자신 있다고 하더니, 협회장이니 뭐니 해도 최고 레벨의 던전 베이비는 버거운 모양이지?”
곁에서 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정찬식이 분풀이라도 하듯 이죽거렸다. 하지만 송종철은 그의 말을 듣고만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찬식이, 불쌍해서 어쩌나. 남자인 내가 봐도 우리 찬식이는 저 친구한테 상대가 안 되는데. 하긴 뭐, 이미 이준영도 저 친구한테 다 넘어갔을 테니 다 부질없는 이야기지만.”
“헛소리 작작 해. 준영이는 그런 헤픈 여자가 아니야.”
“누가 이준영이 헤프데? 그냥 저 친구가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거지. 요즘 대세 아냐? 나쁜 남자 스타일. 내가 여자라면 아주 그냥 껌벅 죽겠구만.”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는 이준영을 언급하니 금세 꼬리를 마는 정찬식이었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왜 떠나고 나서 이렇게 안달복달해. 그럴 거면 차라리 다운 잼 중독이고 뭐고, 묶어두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하지.”
아무래도 정찬식이 괜히 이유 없이 흥분한 것은 아닌 듯했다.
이준영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눈에 띌 정도로 몸을 움찔거리는 그의 모습은 방금 전까지의 사나운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그런 그를 보며 송종철이 혀를 찼다.
“이해가 안 가, 진짜. 다운 잼 준다고 확 자빠트렸으면 될 걸.”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너야말로 함부로 지껄이지 마. 내가 누군지 잊었어? 송종철이야, 송종철. 너 이새끼가 무슨 마음으로 이준영이한테 다운 잼을 줬는지 내가 모를 거 같아? 내가 입만 열면, 네놈 이미지는 단숨에 시궁창에 처박히는 거야. 고마운 줄 알아야지.”
송종철의 눈이 번뜩이자 정찬식이 필요 이상으로 주눅 든 얼굴을 해보였다. 그래도 한때는 협회에 대항하던 강단 있는 탐색자 팀의 리더였던 그라고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너무 그렇게 비 맞은 개처럼 있지 마. 내가 조만간 저 친구 제대로 흔들어 볼 테니까. 혹시 알아? 너한테 다시 기회가 올지.”
그의 말에 정찬식이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
탐색자 협회를 나선 김진우는 뒤에 미행이 따라붙었음을 느끼고는 피식 웃어보였다.
“집 가는 길이니까, 따라올 필요 없어. 너희들 대장도 우리 집 어딘지 아니까.”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다시 경쾌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겨우 가로등의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끄응, 저걸 무슨 수로 미행해.”
하지만 그 소리마저도 이내 적막함에 먹혀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주인님.”
골목을 벗어난 김진우는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불쑥, 튀어나온 안젤라를 보고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먼저 가라니까.”
안젤라는 그의 대답에 배시시 웃어보이고는 팔짱을 끌어안듯 안겨왔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같이 가면 좋잖아요.”
데이트 기분이라도 내는 모양인지 그녀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예전과는 달리 근래 들어서는 굳이 이러한 그녀의 스킨쉽을 밀어내지 않게 되어버린 그가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왜요? 미행이라도?”
“아니, 그건 아닌데.”
탐색자 협회가 있는 방향을 잠시 바라보던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뭐, 두고 온 게 있어서.”
“뭘 두고 오셨는데요?”
두고 온 것이 있다는 말에 안젤라가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조만간 다시 가지러 갈 거니까.”
점점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김진우를 보며 안젤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도 그는 굳이 입을 열어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김진우의 눈에 순간적으로 푸른 안광이 번뜩이다 사라졌다.
***
사고는 끊이지 않았지만 공사는 멈추지 않았다. 이곳 터에 마가 끼었느니, 저주가 내렸느니 흉한 소문이 돌고, 작업을 꺼리는 인부들이 많아졌지만, 김진우는 더 많은 보수로 상황을 무마시켰다.
“이걸 이렇게 작업해 놓으면, 우리가 일을 두 번 하게 되잖아!”
“그럼 미리 미리 얘기를 하든가, 왜 이제 와서 난리야! 그쪽 아저씨들 일하는 동안 우리는 공으로 놀고 있을까?”
오늘도 다툼이 있었다. 감독관의 중재로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작업장의 분위기는 흉흉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