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70)
던전 견문록-170화(170/319)
# 170
던전 견문록
제 171 화
백 선생은 여전히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김진우는 그가 무언가와 자신의 가치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만약 그 저울추가 반대편으로 기운다면 백 선생이 중간에서 야료를 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껏 갈무리해 두었던 하이로드의 기운을 일부나마 드러냈다.
“억!”
갑작스레 돌변한 기세에 백 선생이 고민하던 표정 그대로 굳어버렸다.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김진우는 결코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나직하게 자신의 용건을 밝혔을 뿐이다.
하지만 백 선생은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질려버린 얼굴로 입을 어버버거렸다.
“정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밝히지 않아도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찾기 위해 당신에게 맡긴 것이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아쉽지만 물러나겠다는 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결코 온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 선생은 이런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도 충분히 그 말을 알아들을 정도로 영악했다.
이대로 돌려보내면 결코 앞으로 서로 좋은 얼굴로 마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처리할 쓰레기들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갈지도 모른다.
백 선생은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했고, 그래서 선택했다.
“연락처의 주인은 김종빈이란 사람일세.”
눈을 질끈 감고 겨우 한 마디를 토해낸 백 선생을 보며 김진우가 풀어두었던 기운을 다시 갈무리했다. 겨우 압도적인 기세에서 해방된 백 선생이 숨을 길게 내쉬며 목가를 쓰다듬었다. 잠깐 사이에 부쩍 늙어버린 백 선생은 더듬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탐색자 협회의 간부일세.”
***
“주인님?”
거처에 돌아온 김진우를 본 도미니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잠깐 사이에 그의 기세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불같이 화가 난 표정을 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눈에 힘을 주고 무언가를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김진우가 전에 없이 분노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상에서는 어쩐지 긴장감 없어 보이던 그가, 왠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저의 대미궁 한복판에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다시 그가 대미궁의 의지에 잠식된 건 아닐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기가 죽지 않는 도미니크마저 짓눌린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만큼 김진우의 표정은 섬뜩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붙잡고 있었으니까.
“단순한 사기는 아닌 것 같네. 협회의 간부씩이나 되는 친구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인질극을 벌이겠나.”
“제가 목적이군요.”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지.”
백 선생과의 대화를 떠올린 그가 이를 갈아붙였다.
“도미니크.”
한참만에 겨우 입을 뗀 김진우가 도미니크의 이름을 불렀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곧장 대답하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간 내가 너무 점잔을 떨었던 모양이다.”
“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도미니크가 어벙벙한 얼굴로 반문했다. 지금이라도 설명해 주면 좋으련만 그는 제 할 말만 해댔을 뿐이다.
“가만있으니, 그저 먹기 좋은 사냥감으로 보였던 모양이야.”
그제야 김진우의 말을 알아들은 도미니크가 그 이상으로 분개하여 말했다.
“감히 주인님을 두고 그리 생각하는 작자가 있다면, 결코 편하게 죽지는 못할 거랍니다.”
싸늘하게 살기를 담은 그녀의 말에 김진우가 그제야 피식,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그럴 생각이다.”
그렇게 말한 그가 그간의 사정을 도미니크에게 명령했다.
“에스페토스를 불러들여라.”
그의 말에 도미니크가 되물었다.
“에스페토스라면…….”
“그림자가 필요하다.”
김진우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
“어머니, 저 왔습니다.”
김진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어머니를 대했다.
마치 아버지의 일 따위는 까맣게 모른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 연기가 어찌나 천연덕스러웠는지, 어머니와 현지가 내심 서운함을 표했을 정도였다.
“그래, 밥 먹어라. 그간 어디서 뭘 먹고 다녔는지 몰라도, 집에서 먹는 밥이 최고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색치 않고 그를 반겨 주었다. 1년간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며 상머리에 앉아 찬을 수저 위에 올려주는 모습을 바라보던 김진우가 조용히 거실 한 켠에 웅크린 어둠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안젤라. 그간 다른 일은 없었어?
“어머니. 이것 좀 싸주세요, 가져가서 좀 먹을게요.”
“그럴래?”
머릿속으로는 안젤라와 대화하는 동시에 겉으로는 태연하게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었다.
‘뭐, 이분들이 주인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는 것 말고는 딱히 얻은 게 없네요.’
어둠 속에 은신한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안젤라는 다소 따분한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조만간 움직임이 있을 거야. 그러니 그때 가족을 잘 부탁해.’
탐색자 협회가 꾸민 일이라면, 자신이 협회를 다녀간 지금쯤 슬슬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송종철과 정찬식만큼은 자신의 힘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테니까.
물론 그마저도 그가 숨기고 숨겨 눈꼽만큼 드러낸 ‘던전 베이비’로서의 능력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진정한 그의 정체를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당연하게도 안젤라와 같은 어둠 속의 호위가 붙어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하리라.
-걱정 마시고, 어머님이 주시는 찬부터 드세요. 손 아프시겠어요.
어디서 주워들은 것인지 넉살 좋게 어머님이라는 소리를 입에 담는 안젤라의 행동에 그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왜 그러니, 진우야.”
“아, 아니에요. 그냥 좀 웃기는 일이 생각나서.”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어머님이 하루 종일 보는 저 TV에서요. 드라마라고 했나? 재미있던데요?
지상에도 적응해도 너무 적응한 안젤라였다.
“어머니, 그럼 전 다시 가볼게요.”
마음 같아서는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어머니는 쉽사리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저 한 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오래 집에 머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내심을 알기에 그도 거사를 앞두고 시간을 내어 자꾸만 찾게 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어머니와 현지를 데리고 미궁으로 도망쳐.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명심할게요.
집을 나서고도 한참이나 머릿속에 울려대던 안젤라의 음성이 겨우 사라질 때 즈음, 김진우는 자신에게 따라붙은 그림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12레벨의 던전 베이비라는 타이틀 탓인지, 이번 그림자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꽤나 멀찌감치 떨어져 감시했다.
하지만 멀리 떨어졌다고 해서 그의 시선을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들은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계속해서 뒤를 쫓아왔다.
그들의 기척은 파주에 위치한 안가 인근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끊어졌다.
그사이, 안젤라를 통해 놈들이 다시 연락해 왔고, 자신이 이번 인질 사태를 눈치챈 것인지 떠보려고 여러 차례 어머니를 닦달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협박에 시달리고 있을 가족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지만, 김진우는 애써 화를 다스렸다.
어차피 대가를 치르게 될 일. 잠깐의 분노를 참지 못해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의 분노를 잠재우며 때를 기다렸다.
달빛조차 희미한 그믐밤이 오자, 그는 마침내 행동을 시작했다.
“내가 시킨 대로, 잘 부탁해.”
“이쪽은 걱정 말고 주인님이야말로 몸 안 상하게 조심하세요.”
도미니크에게 몇 가지를 더 당부한 그가 슬며시 안가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김진우가 향한 곳은 탐색자 협회였다.
이미 백 선생을 통해 김종빈이라는 탐색자가 대부분의 시간을 협회 사무실에서 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지라 그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건물 주변에는 은신한 감시자들이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근래에 무슨 당부라도 있었는지 유난스러울 정도로 삼엄한 경계였다.
어둠과 완전히 동화되는 능력이 있는 안젤라마저 꺼릴 정도로 기감이 예민한 감시자들. 김진우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
달빛조차 희미한 밤, 감시자는 늘어지게 하품하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가로등의 사각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던 탓이다.
“위에 보고해, 손님 왔다.”
단숨에 상황을 파악한 감시자의 빠른 대응에 곁에 있던 동료가 곧장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 이런!”
하지만 야음을 틈타 접근한 불청객의 행동은 그들의 대응보다 몇 배는 신속했다. 동료가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켜기도 전에 멀찌감치 있던 그림자가 지척까지 접근한 것이다.
“조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습격자의 주먹이 동료의 턱에 꽂혔다. 상대는 휴대폰의 버튼을 막 누르려다 그대로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이런 미친. 누구야, 너! 정체가 뭐야!”
뒤늦게 특수 고안된 방범봉을 꺼내 든 감시자가 습격자를 향해 외쳤다. 그 고함 소리에 금세 건물 안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대가리를 들이밀어.”
소리 쳐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는 것으로 1차적인 임무를 완수한 감시자는 순식간에 싸울 준비를 마쳤다.
상대는 여전히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은신을 위해 건물의 사각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감시자였으니만큼, 이를 쓰러트린 습격자 역시 어둠 속에 반쯤 몸이 걸쳐진 상태였다.
남은 감시자는 눈에 힘을 주고 상대를 살펴보았다. 지저의 완전한 어둠조차 꿰뚫어보는 던전 베이비 특유의 시각 능력이 발동되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감시자는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습격자의 턱선만 간신히 구분해 내었을 뿐이다. 어쩐지 그의 곁에만 어둠이 유독 짙게 깔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게 왠지 소름이 돋아 감시자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허세를 떨었다.
“넌 이제 죽었다고 복창해라, 새끼야.”
“생각보다 대응이 좋군. 몰래 들어가는 건 힘들겠어.”
기습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게 뻔한데도 습격자는 어쩐지 여유 있어 보였다.
그 모습이 괜스레 더 불길하게 느껴진 감시자가 곤봉을 꽉 움켜쥐며 으르렁거렸다.
“새끼야, 그럼 여기가 어디 동네 파출손지 알았냐.”
은신해 있던 동료들이 은밀하게 습격자를 포위하는 것을 느낀 감시자가 그제서야 한결 나아진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습격자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그리고 감시자는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