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74)
던전 견문록-174화(174/319)
# 174
던전 견문록
제 175 화
김진우는 표정을 굳혔다. 처음 그녀에게 협회에 대한 정보를 얻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이준영의 이러한 요청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저의 시스템에 구속받지 않는 지상인, 지상에 별다른 연고가 없고 지저의 존재에 가까운 윤희와는 입장이 달랐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대미궁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밖에서 떠들어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본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아요. 약속할게요.”
사정을 모를 리 없는 그녀가 다시 한 번 부탁했다.
기질 드센 그녀가 애절한 표정으로 이렇게나 부탁하는 것을 보니, 중독에서 벗어난 것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독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멀쩡한 정신으로 이 음습한 지저에서 홀로 견디는 게 쉬운 일은 아니리라.
“음…….”
한때 자신에게 호감을 표했던 여성의 애절한 부탁을 계속해서 거절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때의 감정에 휘둘려 분란거리를 만드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절 믿겠어요?”
이제는 이준영의 몸짓이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결국 김진우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
“주인님.”
도미니크가 대미궁을 다녀온 김진우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이미 한 번 대미궁의 악의에 침식되었던 전적이 있는 자신의 주인이 못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걱정 마. 나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염려가 가득한 도미니크를 웃는 얼굴로 안심시킨 김진우가 다시 포탈을 돌아보았다.
“아…….”
그런 그의 뒤로 이준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음습한 지하를 벗어나 마침내 지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한지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약속은…….”
“꼭 지킬게요.”
감상에 젖어 있던 그녀가 말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준영을 지상으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것만 같았던 그가 어떤 이유에선지 그 간단한 한마디에 더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주인님?”
도미니크가 경계심 가득한 눈길로 이준영을 바라보는데, 그가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김진우는 눈짓으로 그녀에게 기다려 달라 말을 하고는 다시 포탈을 넘어섰다.
“으으, 그렇지 않아도 나가려던 참입니다!”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 모리건이 붙들려 있었다.
“지상이라고는 하나, 이곳 역시 나의 미궁이다. 그리 겁을 집어먹을 거 없어.”
파리한 안색을 한 모리건이 그 말에 발끈했다.
“겁을 먹은 게 아니라, 단지 지상의 공기가 너무 기분이 나빠서…….”
제 스스로도 같잖은 변명이라는 걸 아는지, 도로 입을 다물어 버리는 모리건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보면, 난생 처음 디뎌본 지상이 어지간히 낯설었던 모양이다.
김진우는 그 당당하고 무서운 것 모르던 까마귀가 저리 조심하는 모습을 보니 우습기도 했지만, 그녀를 지상에 적응시키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이 그려져 심정이 복잡하기만 했다.
“도미니크, 모리건을 부탁해.”
대강 상황을 설명하고는 귀찮은 짐을 도미니크에게 떠넘긴 그는 이준영에게 눈짓을 보내고 돌아섰다. 미리 이야기가 되었는지 그녀는 곧장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향한 곳은 아직 규모가 작은 파티 홀도, 만드라고라의 미궁도 아니었다. 미궁과 미궁 사이에 놓인 조그마한 공터, 그 어두운 통로가 김진우의 목적지였다.
공터에 도착한 김진우가 품속을 뒤지다 최상급 다운 잼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 최상급 다운 잼의 빛깔이 예사롭지 않았다.
평범한 다운 잼과는 달리 당장에라도 무언가가 뚫고 나올 것만 같은 광채, 이준영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긴장한 얼굴을 해보였다.
“다시 말하지만,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의 말에 이준영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녀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다운 잼을 넘겨주었다.
“어차피.”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다운 잼을 잠시 바라보다 그를 향했다.
“각오하고 있어요.”
다운 잼을 움켜쥔 손이 높게 들렸다가 내리찍듯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활성 상태의 핵이 설치되었습니다.]이준영의 눈이 허공을 쫓았다.
좁은 공간이 빛무리에 휩싸이고 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섬광에 둘러싸인 새하얀 세상에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되돌릴 수 있는 선택이란 없어요.”
말이 끝나는 순간, 최상급 다운 잼이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다 마침내 미궁의 핵이 되었다.
[미궁, 혈사자의 성이 생성되었습니다.] [핵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까지 다소 시간이 필요합니다.]혈사자의 미궁은 김진우가 언더 엘프를 찾아 8층까지 올라갔을 때, 그 주인인 마르쿠스를 죽이고 얻은 핵이었다.
당시 왕성하게 활동 중이던 핵을 그대로 옮겨둔 탓인지 미궁이 다시 자리를 잡는데 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혈사자라는 이름에 걸맞는 피처럼 붉은 빛을 한 미궁의 핵은 금세 자리를 잡고, 이준영과 동기화를 시작했다.
“저도 이제 지저의 일원이 된 건가요?”
희미하게 빛나는 혈사자 미궁의 핵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준영이 물었다.
“아니요, 이제 각인 과정이 남았습니다.”
그의 대답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각인이 전부 끝나면…….”
“준영 씨도 이제 지저, 미궁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지상에서는 그렇게 얻지 못해 안달인 미궁의 핵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미궁의 핵을, 그것도 무려 8층에 존재하던 악명 높은 혈사자의 미궁을 얻었음에도 그다지 밝지 않았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미궁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김진우는 그녀를 통제하기 위해 지저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미궁의 주인이 된 이준영은 온전히 지상으로 돌아서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가 흑호의 미궁이 겪은 비극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았을 뿐더러, 핵이 파괴될 경우 미궁의 주인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설명을 모두 들었던 탓이다.
압박이라도 하듯 혈사자의 미궁을 둘러싼 파티 홀과 만드라고라의 미궁은 그녀의 턱 끝에 겨눠진 비수나 마찬가지였다. 만약에라도 허튼짓을 할 경우 저 냉정한 사내는 망설임없이 핵을 파괴할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그동안 지켜본 김진우란 남자가 살아가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렇군요.”
끝까지 자신을 믿지 못하고 마침내 족쇄를 채우고야 만 김진우가 원망스러울 법도 하련만, 그녀는 담담히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따로 그 이유를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를 다시 대미궁으로 돌려보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데리러 가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는 이제 진우 씨와 저, 같은 편이지요?”
어지간히도 그의 신뢰를 갈구하는 이준영의 태도에 김진우는 건성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 무성의한 대답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모리건, 입구를 지켜라.”
김진우는 아직까지 지상에 적응하지 못해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던 모리건을 파수꾼 삼아 세워두고 하루가 지나 이준영이 완전히 미궁에 묶이기를 기다렸다.
그사이에 백 선생에게 수차례 전화가 왔고, 탐색자 협회가 완전히 뒤집혀 습격자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거울 망령을 대역으로 세워둔 것이 주효했는지, 협회에서 그를 타겟으로 삼아 무언가를 획책하는 기미는 없었다.
「정말 자네 아닌가?」
“저는 그때 집에 있었습니다.”
뻔뻔스럽게 대꾸한 그는 백 선생과의 통화를 끝마치고는 서늘한 눈빛을 해보였다.
백 선생은 협회가 쑥대밭이 되고 분위기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지만, 그는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였다. 그는 아버지의 실종에 관여된 당사자들뿐 아니라 이를 묵인한 탐색자 협회까지 완전히 박살 낼 생각이었다.
백 선생은 탐색자 협회가 두 번 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 말했다. 하기야 그렇게 허무하게 습격을 허용했으니 지금쯤이면 단단히 독이 올라 방비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준비하고 습격자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김진우는 미련하게 방비가 끝난 협회의 본 건물을 다시 습격하지 않았다.
김진우는 자신이 대미궁에 묶여 있는 동안 안젤라가 파악해둔 다운 잼의 동선을 따라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협회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 시설은 철저하게 파괴했고 비밀리에 보관 중이던 다운 잼들은 모두 강탈했다.
당연하게도 협회는 완전히 난리가 났고, 수많은 던전 베이비와 탐색자가 습격당한 지부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김진우는 볼일을 모두 마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난 후였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협회의 지부 세 곳을 박살냈다.
비록 본 사무소를 습격했을 때처럼 많은 다운 잼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지부에서 다운 잼을 얻은 것은 부수익에 불과했다.
진짜 목적은 협회였지, 자잘한 다운 잼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그사이에 몇 번이나 백 선생의 전화가 왔지만, 그는 시치미를 뗐다. 나중에 가서는 한술 더 떠 신경질까지 내니 백 선생은 이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럼 정말 자네 말고 협회에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 자가 지금 협회를 흔들어놓는 건가. 이거 참 공교롭군.」
꼬박 하루가 지났지만 간밤의 소란은 진정되지 않았다.
협회는 온갖 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범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탐색자들간의 비상 연락망에는 간밤의 습격자에 대한 비공식적인 현상금이 걸렸다.
근래 들어 마땅한 벌이도 없던 탐색자들은 현상금을 보고는 눈이 돌아가 얼굴도 모르는 습격자를 찾는다고 소란을 피워댔다.
그 과정이 얼마나 소란스러웠는지, 짤막하게나마 뉴스에 탐색자와 관련된 기사가 다루어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김진우는 바깥의 일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준영을 맞을 준비를 했다.
마침내 24시간이 지나 혈사자의 미궁이 그녀를 주인으로 받아들였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준영이 다시 지상을 찾았다.
“진짜 제가 미궁의 주인이 되었군요.”
흑호의 미궁이 습격당할 때 암습으로 사망한 동료가 떠올랐는지, 그녀가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신기하네요. 저는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데, 이 핵이 부서지면 저도 죽는다니.”
“핵이 부서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 없기를 바랍니다.”
하루 사이에 완전히 동기화가 끝나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혈사자 미궁의 핵을 사이에 두고, 김진우가 나직하게 말했다.
“저도 그러길 바라요.”
이준영은 그 은근한 압박에도 서운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미궁에 대한 짧은 감상을 끝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가진 정보가 과연 진우 씨가 지불한 대가에 맞을지 모르겠군요.”
자유의 대가로 지불하기로 했던 협회의 정보. 이제는 그녀가 약속을 지켜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