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75)
던전 견문록-175화(175/319)
# 175
던전 견문록
제 176 화
67. 배신자
“송종철은 변절자예요.”
이미 송종철이 겉과 속이 다른 인물임을 알고 있는 김진우조차 아연해질 정도로 이준영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새끼는 처음부터 탐색자의 권익이고, 던전 베이비들의 아픔이고 안중에도 없는 쓰레기였어요.”
그렇게 과격하게 말문을 연 그녀는 속사포처럼 송종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과거, 우리가 토굴을 전전하며 짐승처럼 살던 시절, 모두가 다 똑같은 처지였던 건 아니에요. 개중에는 약삭빠르게 지저의 존재에 붙어 호의호식했던 이들이 있죠. 그게 송종철과 그 일당들이에요.”
이번에는 김진우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로를 위해도 살아남기 힘든 시절이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어른들이 죽어갔으며, 다른 이들 역시 그렇게 서로를 위하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12층에서 지상에 오른 이는 자신 혼자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동족의 고혈을 빨아먹고, 미궁의 주인에게 아양을 피우며 살아오던 존재가 있었다니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 말을 믿지 못하는군요.”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왜 송종철을 그대로 둔 겁니까. 제가 알기로 인간 사냥꾼 놈들을 비롯한 쓰레기들은 정부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는 물었다. 동족의 피를 마시고 고기를 뜯으며 배를 채워온 수많은 사냥꾼이 처벌을 받거나 사회에서 격리당했다.
그런데 왜 송종철 일당만 그대로 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는 소수에요. 지상에서 적응하고 살아남으려면 서로 뭉쳐야 했죠. 지금이야 우리도 사람 취급받고 살지만, 전쟁이 막 끝났을 때 우리를 같은 사람 취급해 준 이들은 거의 없었어요.”
이준영은 말했다, 지상인들이 얼마나 매몰차며 이중적인지. 겉으로는 전쟁의 피해자네 뭐네, 떠들어대던 그들이 정작 자신들을 지저의 괴물 보듯 했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나마 우리가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이나 이 정도지, 그때 당시엔 우리끼리 패를 갈라 싸우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실수였죠.”
의심암귀(疑心暗鬼)라는 말이 있다. 마음속의 의심이 귀신을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그 당시 던전 베이비들의 상황에 대입해보면 그때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고, 무슨 생각으로 그러한 악수를 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외압과 핍박 속에서 버텨왔을 것이다.
사회적인 위치가 격상된 지금에 와서도 던전 베이비들의 비정상적일 정도의 유대감과 결속력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석연치 않은 점은 있었다.
“왜 바로잡지 않은 겁니까. 그 뒤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텐데.”
김진우의 질문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송종철과 그 일당의 과거를 아는 이들은 탐색 중에 사고당하는 일이 잦았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동료들이 죽고 난 후였죠. 그에 반해 송종철은 동료를 위하는 진짜 사내로 꽤나 입지가 다져진 상태였고.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거죠.”
알 만했다. 지금의 송종철이 누리는 명성과 입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 그는 아마도 오래 전부터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천천히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익이 탐색자들에게 돌아갔고, 그 결과 지금의 탐색자들은 송종철이 자신들의 권익과 자리를 수호하는 수호자라도 되는 양 여기고 있었다.
진실을 아는 대다수의 던전 베이비들은 이미 죽고 난 후였고, 남은 이들은 송종철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했다.
이준영 역시 그 침묵한 부류 중 하나였으리라.
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길고 긴 시간이 지난 오늘, 마침내 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제가 송종철과 그 일당을 증오하는 게 꼭 과거의 일 때문만은 아니에요. 만약 그들이 정말 개과천선해 전날의 과오를 바로잡으려던 것이라면 저 역시 받아들였을 거예요.”
이준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맞아요. 그들의 악행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어요.”
그녀는 아직도 그들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며 이를 갈았다.
“제가 다운 잼에 중독된 것 역시, 송종철의 수작이에요.”
이건 또 무슨 말인지. 김진우가 정색하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운 잼으로 만든 마약의 생산과 유통을 쥐고 있는 게 바로 탐색자 협회랍니다.”
김진우 역시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다. 사라진 다운 잼이 전부 협회로 향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쩌면 그들이 마약을 유통한 배후가 아닐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녀가 다운 잼에 중독되었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녀가 부연 설명을 했다.
“저는 한 번도 마약 따위로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해본 적이 없어요.”
다운 잼에 중독되어 짐승처럼 살아왔던 얼마 전의 자신이 떠오른 것인지 그녀의 눈빛에 자괴감이 스쳐갔다.
“설마…….”
“맞아요. 찬식이, 정찬식이 제가 모르는 사이에 저를 중독시킨 거죠.”
김진우는 엉망진창으로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이제야 맞춰진 듯한 기분이었다. 강인하고 올곧은 그녀가 고통을 잊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댔다는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에 송종철이라면 이를 갈아대던 이준영과 늘 함께하던 정찬식이 협회에 있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데 이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찬식이 송종철과 붙었군.”
“어쩌면 처음부터 송종철의 사주를 받고 움직였을지도 모르죠.”
까만 눈동자 뒤로 스쳐가는 고통의 빛이 그녀가 정찬식의 배신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화나지 않습니까?”
김진우는 이준영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화가 났었죠. 하지만 지금 저는 분노보다 기대가 크답니다.”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실의 눈이 그리 말했고, 흔들림 없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그리 말해주었다.
“어째섭니까?”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가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송종철이 당신을 적으로 만들었으니까.”
대화가 끝이 났을 때, 이준영을 바라보는 김진우의 눈빛은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말한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진실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 그인지라, 그녀가 송종철과 협회에 붙을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탓이다.
이준영 역시 그런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제법 살가운 태도로 그를 대했다. 이래서야 마치 과거 함께 탐색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와 그녀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가 진우 씨, 아니 진우님을 배신하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어요”
그는 대미궁을 다스리는 하이로드이자 그녀의 생살여탈권을 쥔 절대자였고,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의탁한 신출내기 지저의 일원에 불과했으니까.
그녀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는 받아들였다. 비록 지저의 시스템이 강제하는 충성과 복종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맹세는 진심이었다.
“시킬 일이 있다면 뭐든지 말해주세요. 그게 무엇이든 저는 따르겠어요. 이를테면…….”
짓궂은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이준영의 모습은 억지로 만들어낸 요염한 몸짓 탓인지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완전히 과거의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 짓궂은 농담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알아챘음에도 그저 웃고 말았다.
“진짠데.”
그녀는 그런 그를 보며 입을 비죽이는 시늉을 해보이다, 이내 제 꼴이 우스운 걸 느꼈는지 뺨을 긁적이며 시원하게 웃어 재꼈다.
그렇게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는 꼭 과거, 탐색자 팀을 이끌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거침없어 보였다.
***
이준영으로부터 송종철의 과거를 들은 김진우는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힘으로 협회를 박살 내려던 그는 이제 완전히 집어삼키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계획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더해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송종철과 반목해왔던 무리들을 은밀하게 규합했다.
“지금 당장은 그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정도로 충분해요. 그 정도로도 위축되었던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될 거에요.”
그렇게 모은 인원들은 탐색 도중에 지저에서 의문사하는 경우를 경계하여 지저에 발길을 끊은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자신들 말고도 협회의 행보를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을 얻었다.
당장 김진우 자신만 해도 뒤를 받쳐주는 세력이 없으니, 지상에서의 행보가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본신의 무력이 비할 곳 없는 그조차도 이런 신세이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지상은 복잡하군요. 강자가 약자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니.”
가만히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도미니크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강함이 미덕이고 약함이 죄악이라 생각하는 지저의 존재인 그녀에게는 이러한 지상의 모습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저의 율법처럼 지상에도 법이라는 게 있거든.”
마음 같아서야 협회고 뭐고 다 때려 부수고 간판을 내리게 하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그랬다간 당장 범죄자의 낙인이 찍혀 지상에 발도 붙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감히! 하찮은 지상인 따위가!”
그 이야기를 들은 도미니크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혼자 상상하고는 격분해 씩씩거렸다.
차갑고 지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금세 흥분해 떠들어대는 그녀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이준영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귀여운 아가씨네요.”
아무래도 지상에 올라온 뒤로 부쩍 여유가 생긴 그녀의 미소는 넉넉한 느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짓궂은 장난기가 가득한 말이었지만, 김진우는 무시하고 진지하게 도미니크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좋은 부하지. 그녀가 없었다면 나 역시 이곳에 없었을 테니까.”
“그래 보이네요.”
그 맹목적인 애정과 충성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도미니크를 보며 이준영이 공감을 표했다.
“도미니크는 현명하지만 지상에 익숙하지 않아. 그러니 앞으로 준영이 네가 많이 도와줘야 할 거야.”
충성 맹세 이후 주종 관계가 되었다지만 당장 말을 놓은 지 불과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하대는 어색함이 없는 것을 넘어 자연스럽게 따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게 카리스마라고 하던가.
이준영은 저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끄덕여 그의 명령을 받드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작게 감탄을 토해냈다.
처음 보았을 때의 다소 어리숙하게 느껴지던 평범한 사내는 이제, 사람을 눈 밑으로 보는 오만함이 더없이 자연스러운 절대자가 되어 있었다.
그게 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어 이준영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말았다.
“하아.”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준영은 자신을 노려보는 서늘한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세로로 길게 갈라진 보랏빛 신비한 눈동자가 마뜩찮은 빛을 잔뜩 머금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그녀가 어색한 얼굴로 웃어 보였지만, 도미니크는 마주 웃어 보이기는커녕 더욱 더 굳은 얼굴을 해보였을 뿐이다.
“그러니 둘이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김진우의 당부에 이준영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