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76)
던전 견문록-176화(176/319)
# 176
던전 견문록
제 177 화
이준영은 미궁의 운영에 서툴렀다. 만약 그녀가 9층에 자리를 잡았다면 김진우의 도움 없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혈사자의 미궁은 지상도 지저도 아닌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파티 홀과 만드라고라 미궁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미궁의 주인들은 1년이 넘는 시간을 전쟁 속에서 보내온 미궁 운영의 스페셜리스트들이었다.
그녀는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이준영은 미궁의 방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상황을 금세 깨닫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쓸 곳을 찾았다.
그녀는 탐색자로 오랜 시간을 활동해온 만큼 지상에 해박했다.
멈추었던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김진우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각종 첨단 설비들이 그녀를 통해 반입되기 시작했고. 감시 장비와 지상의 무기가 속속 파주에 위치한 김진우의 안가에 설치되었다.
“어차피 이곳에 관심을 보일만 한 이가 있다면 그건 협회의 탐색자나 같은 던전 베이비들뿐이겠죠. 그리고 그들은 크리쳐처럼 단단한 외피를 두르고 있지 않아요.”
암시장에서 웃돈을 주고 구해온 권총에 실탄을 삽탄하며 이준영이 차가운 얼굴을 해보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탐색자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총탄 한 방에 죽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흠.”
김진우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애매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지저와 지상을 두고 선택을 강요받았을 때, 얼마나 오랜 시간 깊은 고민을 해야 했던가.
그에 반해 그녀는 지저의 편에 서는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필요하다면 더 구해올 수는 있지만, 이보다 성능이 좋은 것들을 구하려면 기존에 제가 거래해 왔던 딜러들을 통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정체가 노출될 위험이 있어요.”
그의 표정을 보고 오해라도 한 모양인지 이준영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더는 무리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어지간한 놈들은 그림자 마술사가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안가 아래 펼쳐진 그림자 마술사들의 대규모 환상 마법은 1년간의 전쟁통 속에서 모아이들의 눈을 피했을 정도로 은밀했다. 어중이떠중이 정도는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중 눈속임을 피해 안가로 들어올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모리건이 나서면 그만이었다.
검은 흉조라는 진명을 찾은 모리건의 힘은 심층의 던전 베이비들조차도 우스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녀가 부르는 장송곡을 피할 수 있는 이는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안가의 방비를 마친 김진우는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이준영은 그간 무식할 정도로 힘에 의존해왔던 그의 방식에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협회의 가장 아픈 곳부터 공격한다.
다운 잼의 이동 루트를 따를 뿐 아니라, 그녀는 송종철이 운영 중이던 사업소 몇 군데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끄으으.”
사지가 비틀린 채 바닥을 뒹구는 사내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진우는 시선을 돌렸다.
[반쯤 부서진 하급 다운 잼. 이미 절반 이상이 부서져 상당량의 에너지를 소실한 다운 잼은 이미 다운 잼이라 부를 수도 없는 물건입니다.] [하급 다운 잼 가루. 용도, 효능 불명의 이 가루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어지럽게 놓인 실험 기구 사이로 놓인 색색의 가루와 파괴된 다운 잼,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의지 강한 이준영마저도 완전히 폐인으로 만들었던 마물.
그들은 마약을 만들고 있었다.
“개자식들.”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언질을 받았지만, 새삼 화가 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송종철의 이중적인 수작도 수작이지만, 지금 지저에서는 없어서 난리인 다운 잼을 이따위 용도로 쓴다는 것 자체가 용납할 수 없었다.
화가 난 김진우는 부서진 다운 잼 조각과 가루를 한데 모아놓고 처리 방법을 고민했다.
“어떤 놈이야!”
그때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떼의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빨리도 왔군.”
이제껏 협회의 수많은 지점을 공격했지만 이만큼 빠르게 지원 병력이 도착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곳이란 뜻이겠지.”
척 보기에도 레벨이 높아 보이는 던전 베이비 몇을 노려보며 김진우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의 두눈에서 푸른 광망이 줄기줄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그 새끼다!”
근래 하도 난리를 피워댔더니 금세 정체를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깊게 그림자 깔린 후드 아래를 볼 수 없을 테니까.
“끄악!”
김진우가 움직였다. 그리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협회의 지원군이 바닥에서 버르적거리던 사내들과 같은 처지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불과 수 분에 불과했다.
개중에는 레벨 8의 던전 베이비도 있었지만, 그 역시 김진우의 일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컥!”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 중 하나가 목을 부여잡으며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가 시작이었다.
바닥에서 부러진 사지를 부여잡고 신음을 내뱉던 사내들이 하나둘 마른기침을 토하다 목을 부여잡았다.
가만히 그들이 하는 양을 살펴보던 김진우는 사내들과 드잡이질하는 도중에 한켠에 모아두었던 다운 잼 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졌음을 깨달았다.
“끄으. 사, 살려 줘.”
누군가가 바닥을 기어 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한 팔이 부러지고 양 다리가 박살이 났음에도 사내는 필사적이었다.
아무래도 사내들은 사지가 부러진 고통보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마물에 중독되는 게 더욱 두려운 모양이었다.
자업자득.
김진우는 표정을 굳히며 한걸음 물러났다.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사내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니 절망으로 시커멓게 물드는 추한 얼굴이 보였다.
사내뿐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자들도, 나중에 지원 차 나온 사내들도 전부 같은 모습, 같은 얼굴이었다.
그들은 피륙이 터져 나가고 골이 깨어지는 고통보다 다운 잼에 중독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힘겹게 숨을 참아내던 이들의 눈빛이 이내 몽롱해지고 말았다.
“헤에에…….”
방금 전까지의 필사적인 발버둥이 무색하게 사내들은 금세 헤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쾌락에 잠식된 사내들의 얼굴은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그는 그런 흉한 광경을 지켜보는 취미 따위 없었다.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던 그가 그대로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추가적으로 협회의 병력이 도착했고, 그들은 내부의 상황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건물 밖으로 몸을 빼냈다.
건물 안에 갇힌 사내들은 그 뒤로 한참의 시간이 흘러 방독면으로 완전무장한 협회의 인력이 오고 나서야 구출되었다. 아니, 수거되었다.
“이 새끼들 완전히 맛이 갔네.”
짐짝처럼 차에 실리는 그 순간까지도 정신 못 차리고 헤롱거리는 사내들을 본 협회의 인물들은 넌덜머리를 쳤다.
“위에 연락해서 보고해.”
“뭐라고 할까요?”
“뭘 뭐라고 해! 있는 그대로 말해! 건진 거 하나도 없고, 지키던 애들이나, 도와주러 간 애들이나 다 병신 됐다고 그대로 보고해!”
“끄응, 알겠습니다.”
벌써부터 길길이 날뛰어대는 송종철의 모습이 걱정되는지 꽤나 지위가 있어 보이는 사내가 기겁을 해보였다.
“아오, 들어가기 싫다.”
부하에게 보고를 떠넘긴 사내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있을 송종철과 마주하는 것이 꺼림칙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시련은 이제 시작이었으니, 그 뒤로 같은 일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된 것이다.
“형님, 나 성진인데…….”
「너 뭐하는 새끼야! 왜 이제야 전화를…….」
그는 세 개의 사업장에서 입은 손실에 대해 보고해야 했고, 그때마다 정신이 쏙 빠질 정도로 욕을 먹고 말았다.
“어떤 새낀지 잡히기만 해봐!”
연이은 질책에 하얗게 질린 성진이란 사내가 얼굴도 모르는 습격자를 욕해댔다.
***
김진우가 하루 동안 박살 낸 사업소의 수가 무려 네 개였다.
그런데 그렇게 박살 낸 사업소에서 나온 부서진 다운 잼과 가루들의 양이 어지간한 미궁을 단번에 상위 미궁으로 업그레이드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엄청났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중독되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이쯤 되면 다운 잼으로 만든 마약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지 않는 것이 차라리 신기할 지경이었다.
“양만 잘 조절하면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을 거예요. 어느 정도 일상생활도 가능하고요.”
이준영은 자신처럼 완전히 폐인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며,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중독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을 거라 말했다.
또한 증세가 겉으로 티가 안 날 뿐이지, 금단 증세는 다 똑같다며 협회가 다운 잼을 빌미로 그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을 거라 말했다.
그녀의 예측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고, 김진우가 듣기에도 상당히 그럴싸했다.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대체.”
심각한 얼굴로 협회의 만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는 드르륵, 하고 울어대는 휴대폰의 진동에 손을 들어 대화를 중지시켰다.
“누구십니까.”
「기, 김진우 씨 되십니까?」
잔뜩 겁에 질린 수화기 너머의 음성을 들으며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김종빈이라고…….」
김종빈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입가에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며, 스피커폰을 켰다.
「다른 게 아니라, 따로 만나 뵙고 말씀드릴 게 있어서…….」
통화를 마친 김진우는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함정일 가능성이 높아요.”
“지금 시점에서 김종빈이 연락할 이유가 없어요.”
도미니크와 이준영이 정색을 하고는 그를 만류했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김종빈의 연락이 수상하다는 이유였다.
그녀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협회를 흔들어놓았지만 그저 재산 손실이 크다 뿐이지 간부들이 신상에 두려움을 느낄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김종빈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전화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쩌면 이번 사건을 벌인 범인이 나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
비록 에스페토스를 내세워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송종철과 협회는 바보가 아니었다.
수십의 탐색자를 단신으로 박살 내는 무력과, 협회에 이를 드러낼 정도의 동기, 지금쯤이면 그들은 용의선상에 있는 모든 인물에 대한 조사를 끝마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알게되었으리라.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이들 중 단신으로 수십의 던전 베이비를 박살 내면서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강자는 없다는 사실을.
국내 최고 레벨인 김진우조차도 순수한 던전 베이비의 능력만으로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송종철과 협회는 단 한 번도 12층에서 태어난 던전 베이비의 진짜 힘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들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김진우를 제외한 이들 중에 일을 벌일 만한 이가 없다는 것뿐이고, 모든 게 베일에 감춰진 12레벨의 던전 베이비는 망상과 억지 비약 속에서 다시 용의선상에 올랐을 것이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꼴이지만, 가능성은 있어요.”
이준영 역시 생각 끝에 그의 의견에 동감을 표했다.
“저 역시 직접 만나보기 전에는 12레벨의 던전 베이비가 어떤 괴물인지, 혼자 상상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녀는 심층에서 태어난 던전 베이비라면 기상천외한 능력 하나쯤은 있을 거라 상상했었노라 말했다.
“그래서 직접 보니까 어땠지?”
김진우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이준영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상상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의 괴물이었죠.”
상층까지 기어 올라온 지옥 거미들을 홀로 감당하며 남았을 때는 정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희생했을 거라 생각했다며, 그녀는 다소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래, 상상. 저들이 함정을 팠더라도 나에 대해 아는 게 없지.”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짓궂은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살벌한 구석이 있었다.
“만약 그들이 함정을 팠다면…….”
검은 눈동자 뒤로 어른거리는 푸른 섬광.
“그들이 상상도 못했던 힘으로 부숴버리면 그만이야.”
잠깐의 고민이 무색하게 이미 결정을 내린 그의 얼굴에는 한점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