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77)
던전 견문록-177화(177/319)
# 177
던전 견문록
제 178 화
김종빈과의 약속 장소는 파주의 으슥한 산기슭이었다. 척 보기에도 매복하기에 적당하고, 주변에 민가가 없으니 혹여 소란이 있더라도 무마하기에 좋을 장소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김진우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조용한 곳에서 만나기를 바라는 것은 오히려 자신쪽이었다.
그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힘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 당연하게도 인적 드문 산기슭이 유리했다.
게다가 약속 시간이 저녁이었으니, 어둠에 익숙한 그에게는 더없이 반갑기만 했다.
문자 대신 전달받은 GPS의 위치에 도착한 김진우는 느긋한 얼굴로 상대를 기다렸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도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렸던 김종빈을 대신해서 나타난 것은 은밀하게 접근하는 일백에 가까운 기척이었다.
“역시 함정이네.”
완벽하게 포위망이 갖춰졌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어차피 큰 기대도 안 했다.”
김진우의 말에 풀숲 한구석이 바스락거리다 일단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왜 왔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군.”
말을 걸어온 것은 송종철 패거리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묵직한 분위기를 가진 사내였다. 김진우는 사내를 한참이나 살펴보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전혀.”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지만, 그는 여전히 느긋했다. 마치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이 다소 거슬렸는지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나만 묻지. 협회를 습격한 거, 네 짓이냐?”
사내의 질문에 김진우는 대답대신 질문을 했다.
“아버지는 무사하시냐?”
“네놈 하기에 따라서 달라지겠지.”
아예 작정하고 나온 것인지 아버지의 납치에 대한 혐의를 부정조차 하지 않는 사내였다.
“지금 어디 계시지? 모셔온 거 아닌가?”
“그럴 리가.”
김진우가 실망한 얼굴을 해보였다. 이런 돼먹지 않은 수작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혹시 모를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탓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화나 소설과는 달리 상대는 굳이 이런 장소까지 중요한 인질을 데려올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실망한 그를 향해 사내가 다시 물었다.
“다시 묻겠다. 협회를 습격한 건 네놈 짓인가?”
“아닌데.”
김진우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지껄여댔다. 만약 이곳이 지저였다면 사실대로 말하고 전부 쓸어버렸겠지만, 이곳은 지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전화로 상황을 보고하고 있을지 몰랐고, 굳이 그간의 행적을 자인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의 부정에도 여전히 의혹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마치 속을 들여다볼 것처럼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않았다.
김진우는 사내를 마주 바라보다 말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풀어줄 거지?”
“일단 이것부터 마셔라.”
사내는 미리 준비해온 것인지 품안에서 작은 유리 플라스크 하나를 꺼내, 던져주었다.
검지 손톱만 한 플라스크에는 영롱한 빛깔의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이걸 마시면 아버지를 풀어주는 건가?”
김진우의 질문에 사내, 협회의 간부 박성진은 뻔뻔하게 대꾸했다.
“일단 그렇다고 해두지.”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김진우가 플라스크의 내용물을 마실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플라스크 안의 내용물이 뭔지 아는 이라면 누구라도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 상대는 액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걸 마시면 난 폐인이 될 텐데?”
역시나 상대는 액체가 다운 잼을 갈아 만든 마약의 농축액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걸 마시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거야.”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 진짜 피가 섞인 것도 아닌 양부를 위해 저 마물을 들이마실 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박성진도 억지로 그를 설득하려고 굳이 열을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마시지 않는다 해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2중, 3중의 족쇄일 테니까.
“그럼 마시도록 하지.”
하지만 김진우는 그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했다. 플라스크의 뚜껑을 따고 단번에 내용물을 비워낸 것이다.
“어, 어!”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박성진은 얼빠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마셨어. 이제 그쪽이 약속을 지킬 차례야.”
잔뜩 인상을 찌푸린 김진우의 말에 그는 당황하고 말았다. 송종철의 지시를 받고 오기는 했지만 상대가 정말로 다운 잼의 농축액을 마실지는 몰랐던 탓이다.
회유가 불가능하다 내부적인 평가가 있는 강자, 송종철은 김진우라는 인물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자의적인 협력이 안 된다면 억지로라도 고삐를 채워 부려먹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덜컥 다운 잼의 농축액을 마신 것이다.
저 정도 양이라면 어지간히 강건한 심층의 던전 베이비라도 단번에 이지를 상실하고 약쟁이가 될 터, 가급적이면 온전한 협조를 바라던 송종철의 의도와는 어긋나고 말았다.
“이런 멍청한!”
뒤늦게 그가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이미 플라스크 안의 내용물은 전부 목구멍으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아버지를 풀어줘, 이제.”
김진우는 여전히 맹목적으로 아버지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박성진에게 그의 양부를 풀어주고 말고를 결정할 권한은 없었다.
“끄응, 기다렸다가 쓰러지면 수거해 간다.”
이제 박성진은 대놓고 김진우를 무시하고 있었다. 농축액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들이마신 이상 그의 신병을 구속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많은 탐색자들과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그러하듯 김진우 역시 약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약쟁이가 될 것이고 그를 통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지금이야 강건한 심층 던전 베이비의 육체가 약에 저항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곧 개처럼 기어 자신에게 약을 갈구할 것이다.
“보고 먼저 할까요?”
“끄응, 지금 보고하면 저 친구 망가트렸다고 욕 좀 먹을 거야. 나중에 들어가서 보고하도록 하자.”
“하긴, 저번에 형님 된통 욕먹었죠.”
기껏 일백에 달하는 고 레벨의 던전 베이비들을 끌고, 협회의 숨겨진 힘까지 준비해왔는데 일이 너무 허무하게 끝이 났다. 박성진과 부하들이 맥 빠진 얼굴로 지껄여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음?”
그런데 시간이 꽤나 지났음에도 김진우가 쓰러질 생각을 하지를 않았다. 심층이 아니라 무저갱에서 살아나온 던전 베이비라도 쇼크가 올 정도의 농축액을 마셨건만 여전히 꼿꼿이 서 있었다.
“왜 멀쩡하지?”
일말의 중독 증세도 보이지 않는 상대를 보며 박성진은 뒤늦게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네가 약속 지킬 차례야.”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김진우. 그러고 보니 상대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양부의 안위와 포위망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약속.”
어눌하게 눌어붙은 혓바닥, 이제야 겨우 약 기운이 도는 것인가.
“저, 저!”
곁에 있던 수하가 기함을 지르고 박성진은 뜨악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비틀리다 못해 요동치는 김진우의 이목구비가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약… 속.”
이제는 어딘지 모르게 목소리마저 괴이하게 변해버린 상대의 모습은 기괴하기만 했다.
처음의 단정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귀 옆까지 찢어진 눈과 젤리처럼 위아래로 출렁이는 콧날까지, 도저히 인간이라고 봐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뭔가 이상한데요?”
“애들 준비시켜! 낌새가 이상하다!”
박성진이 비명처럼 수하들에게 전투 지시를 내리려는데, 바로 곁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어지간히도 독하게 나오는구만.”
“누구냐!”
허리춤의 칼을 뽑아 휘두르며 사납게 소리친 박성진은 이제 완전히 괴물처럼 흐물흐물해진 김진우의 곁에 언제 나타난 것인지 웬 후드 쓴 사내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긴 누구야. 니들이 만나자고 했던 그 사람이지.”
“너, 너는…….”
사내가 후드를 뒤집어 내렸다.
“적당히 장단 맞춰주다가 네놈들 아지트로 들어가는 게 원래 계획이었는데, 설마 약까지 동원할 줄은 몰랐어.”
“기, 김진우!”
이목구비가 완전히 뭉개져 밋밋한 표면만 남아 있는 괴물과 얼굴을 드러낸 사내를 바라보던 박성진이 비명을 질렀다.
황당하게도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김진우였다.
“쯧, 약에 이런 효과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네.”
외양이 완전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 자신의 대역. 거울 망령의 왕을 보며 김진우가 혀를 찼다.
외양 복제 능력이 풀려버린 에스페스토였지만, 그다지 타격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원래는 에스페스토를 이용해 협회의 심처에 잠입해볼 생각이었지만 다 틀려버리고 말았다. 하기야 박성진의 반응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시나리오에서 한참이나 벗어났을 때부터 실패는 예견된 일이었다.
외양의 완벽한 복제에 비해 거울 망령의 연기는 어딘지 어색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역시 네놈이 범인이었구나!”
이제야 알리바이의 비밀을 알아차린 것인지, 경악해 외치는 박성진을 보며 김진우가 물었다.
“하나만 묻자. 내가 만약 여기서 끝까지 저항했으면 어쩌려고 했지?”
대답대신 일백의 매복자들이 풀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안 들어도 뻔하구만.”
표정을 굳힌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한때는 되도 않을 회유를 한답시고 공을 들이더니 이제 와서 갑자기 생각을 고쳐먹은 송종철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그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버지의 실종에 협회 전체가 관여했음이 드러난 지금, 송종철이 악인이든 선인이든 상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요상한 수작을 부리는군.”
박성진의 말에 김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성진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에 분개하기는 했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는 눈치였다.
무언가 믿고 있는 것이라도 있는지 수십의 탐색자를 순식간에 박살 냈던 습격자를 앞에 두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압해!”
“안 죽이고 싸우려고? 그럼 난 죽을 걱정 없이 싸우겠네.”
히죽 웃으며 건들거리는 김진우의 태도에 박성진이 다시 명령을 번복했다.
“건방진 새끼, 그냥 죽여!”
“하지만 종철 형님이!”
“내가 책임진다! 어차피 남의 밑에 있을 놈도 아니야!”
매복자들의 기세가 한층 더 살벌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오히려 기꺼운 얼굴을 해보였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사방에서 몰려드는 협회의 매복자들을 보며, 김진우가 히죽 웃어 보였다.
“그래야 나도 망설임 없이 손을 쓸 거 아니야.”
그의 기세가 일순간 돌변했다. 이제까지만 해도 기묘한 여유만 빼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아 보였던 그의 분위기가 완전히 변해버렸다.
거대한 존재감이 해일처럼 일어나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박성진은 또 다른 김진우가 나타났을 때 놀라기는 했지만, 흔들리지는 않았다. 얼굴 밋밋한 괴물의 정체야 일단 적을 제압하고 캐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사납게 일어선 기세에 압도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다소 여유가 있었다.
어차피 탐색자 수십을 단숨에 박살 낸 그가 허무하게 당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기세가 강하기는 했지만 감당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전투는 기세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당장 스스로가 레벨 9의 고 레벨 던전 베이비이며, 수하들은 고르고 고른 레벨 6 이상의 던전 베이비들만 일백이다.
전원이 지저에서 구를 대로 구른 베테랑 탐색자들이며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들이었다.
“으으…….”
그런데 정작 믿었던 부하들은 김진우의 존재감에 억눌린 얼굴로 좀처럼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손만 뻗으면, 칼만 내지르면 피를 쏟아낼 정도로 무방비한 자세인데 한발자국을 내딛는 이가 없었다.
“나중에 한소리 듣겠지만…….”
결국 그는 숨겨두었던 한수를 꺼내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 저 건방진 놈에게 보여줄 작정이었다.
“포…….”
“경고하는데, 후회할 거야.”
막 필승의 주문을 외우려던 박성진은 그 나지막한 음성에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속을 들여다보듯 껄끄럽기만 했다. 그래봐야 소용없다고, 아무리 날뛰어봐야 손바닥 위라고 말하는 듯한 눈매가 지독스러울 정도로 거슬렸다.
하지만 그는 무시했다. 저 정도의 능력자를 제거하려면 숨겨둔 밑천이고 뭐고 전부 꺼내야 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김진우가 막았던 한마디를 기어코 내뱉고 말았다.
“포탈!”
허공에 생겨난 푸른 문, 그 너머의 익숙한 기운을 느낀 순간 박성진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굳어 있던 수하들도 뒤늦게 용기백배하여 김진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기묘할 정도로 가슴이 갑갑했다. 그리고 그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저! 저 표정!
허공에 생겨난 포탈과 그 너머에서 넘어온 사나운 병사들을 보고도 김진우의 표정은 여전히 느긋했다.
“분명 경고했다.”
사방으로 짓쳐드는 칼날과 공격을 보면서도 오직 자신을 향한 김진우의 시선을 보며, 박성진은 심장이 뚝,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나에게 자비를 바라지 마라. 경고를 무시하고 포탈을 연 순간…….”
김진우가 날 선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얀 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나운 미소, 그것은 포식자의 얼굴이었다.
“이곳은 지저의 율법이 지배하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