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78)
던전 견문록-178화(178/319)
# 178
던전 견문록
제 179 화
김진우는 처음부터 박성진이 미궁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봤다. 그것은 하이로드의 힘이었으며 더 깊고 위대한 미궁의 주인의 오롯한 권능이었다.
의문은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어떤 경로로 미궁을 얻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패자의 모든 것은 승자의 것. 그게 지저의 율법이지.”
지금은 싸움을 걸어온 적을 박살 내는 것만이 중요했으니까.
“포탈.”
그의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포탈이 열렸다. 박성진의 것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하고 더 깊은 포탈이 허공에 쩍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경악한 박성진의 중얼거림은 이내 묻혀버리고 말았다.
키에에에엑!
박성진의 소환수, 거대 지네가 온 사방의 소란을 집어삼켜버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 처절한 비명도 이내 끝이 났으니 포탈을 넘어온 헤임달이 지네의 머리통을 그대로 바수어버린 것이다.
지네의 비명은 참극을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포탈을 넘어온 발자크와 퀀투스를 비롯한 영웅급 소환수들이 지네 소환수를 처참할 정도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우두머리만 남겨두고 마음껏 먹어 치워라!”
“왕의 뜻대로!”
포탈을 넘어온 대미궁의 영웅급 소환수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박성진은 그 광경을 얼이 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끄아아악!”
던전 베이비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피륙이 베이고 뼈가 잘려져 나갔다.
그렇게 쓰러진 던전 베이비들의 그림자 사이에서 언더 엘프들이 튀어나왔다.
“경고를 듣지 그랬어. 그랬다면 살려줬을지도 모르는데.”
온 사방이 비명으로 가득 찼다. 거대 지네가 내지르는 듣기 거북한 괴성부터, 던전 베이비들의 단말마까지. 온 세상이 비명과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비명과 죽음은 오로지 협회측 병력의 것들이었다.
협회의 매복자들은 강했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한 언더 엘프들은 던전 베이비의 천적이었다. 릭샤샤가 이끄는 언더 엘프들의 칼날은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이었고, 그들이 여태껏 상대해왔던 거대 크리쳐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내 대열을 다잡고 대등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몸만 빠르지 별거 아니야!”
“제길! 벙커만 가져왔어도!”
“팔 하나 잘린다고 안 죽어! 그냥 무시하고 밀어내! 밖으로 밀어내기만 하면 우리가 이긴다!”
과연 지저에서 구를 대로 구른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들 다운 선전이었다.
“모리건.”
“왕이시여.”
“지켜보고만 있을 건가?”
아직까지는 언더 엘프들이 잘 해주고 있었지만, 던전 베이비들의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꾸물거리다가 피해가 생기는 것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김진우의 재촉에 모리건이 못마땅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 환장하는 전투마저 망설이는 것을 보니 한동안 릭샤샤의 명령을 따라야 했던 것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불만이 크다고 해서 왕의 명령을 거부할 정도로 모리건의 충성은 얕지 않았다.
퍼드득!
“악!”
죽음을 부르는 검은 흉조의 날개짓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단단하게 잡혀 있던 던전 베이비들의 대열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잠시나마 대등하던 전투의 양상이 모리건의 합류로 다시 기울었다.
언더 엘프들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숨어드는 것을 보며 김진우는 이내 전투에서 눈을 돌렸다.
덜덜덜.
그와 눈이 마주친 박성진은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쯧.”
만약 미궁의 주인이 아닌 던전 베이비만의 능력으로 싸움을 걸어왔다면 저리 시작하기도 전에 비참한 모습이 되진 않았으리라.
던전 베이비들은 상대에게 압도될지언정 포기하는 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박성진은 던전 베이비이자 지저 미궁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김진우는 그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강대한 대미궁의 지배자였다.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하이로드 특유의 존재감에 그는 끊임없이 몸을 떨었다.
그렇게 박성진은 협회측의 병력과 자신이 야심차게 소환한 지네들이 전부 살해당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주변을 정리해라! 혹시라도 생존자가 있어선 안 된다!”
어지간해서는 미궁의 병력까지 소환할 생각이 없던 김진우였지만, 일백에 달하는 던전 베이비들과 소재층 미상의 지네들까지 처리하면서 본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이기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전투가 길어지는 와중에 자신의 힘이 노출되어 보고가 들어가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지저와는 달리 이곳에는 휴대폰이란 만능도구가 있었으며, 전투 영상이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끄으으.”
그의 귓가에 살아남은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생존자를 찾아 눈을 벌겋게 뜨고 돌아다니던 언더 엘프가 금세 그 위치를 추적해 단숨에 확인 사살을 가했다.
지저의 존재에 의해 지상인이라 할 수 있는 던전 베이비가 살해당하는 장면은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지만, 그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김진우는 애초에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적에게 되도 않는 인정을 베풀 정도로 무르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협회에 이용당한 선량한 던전 베이비였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겠지만, 박성진은 이들 앞에서 양부의 실종에 대한 혐의를 인정했고, 거리낌 없이 포탈을 열었다.
그 말은 이들이 그저 협회의 언저리를 맴도는 이들이 아니라 협회의 악행에 깊게 관여한 이들이란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굳이 변명거리를 찾는 것도 우습군.”
채 감기지 못한 시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김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다. 그저 먹느냐 먹히느냐, 짐승들의 싸움에 불과하다.
그의 눈가에 어려 있던 일말의 찝찝함마저 이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서늘한 이성이 자리를 잡았다.
근방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염탐꾼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송종철은 박성진의 능력을 단단히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흔적 지우고, 조금 애매하다 싶으면 아예 땅을 들어엎어서라도 덮어버리도록.”
경험 많은 탐색자라면 나중에라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철저할 정도로 흔적을 지우라 명령했다.
이미 포탈을 통해 대부분의 소환수가 돌아가고 남은 것이라고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김새를 한 언더 엘프들뿐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지운 흔적을 발견한다 해도 미궁 간의 전투가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다.
언더 엘프들은 과연 추적과 탐색에 능한 이들답게 꼼꼼하게 전투의 흔적을 지웠다.
그들이 작업을 모두 마쳤을 때는 제법 눈이 밝은 축에 속하는 김진우조차도 제대로 된 흔적을 찾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흔적을 지웠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당장 한 번 열리면 24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는 포탈도 문제였고, 연락이 끊긴 병력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할 협회의 탐색자들도 문제였다.
“너.”
전투가 끝이 난지 한참이 지났건만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도 들지 못하던 박성진이 김진우의 호명에 몸을 떨었다.
“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주, 중간에 보고가 없으면 추가 인원을 보내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이로드의 권위 앞에 완전히 굴복한 박성진은 가장 비천한 노예처럼 그의 말에 복종했다.
“한 시간쯤 지났나. 지금쯤이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겠군.”
이 정도의 전력을 파견했으니 한 시간 기다리는 것도 많이 기다린 것이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협회에서 파견한 추가 인력이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걸 어쩐다.”
만약 협회의 인물들이 이곳에 당도하게 되면 굳이 대미궁의 소환수들마저 불러낸 이유가 무색해지고 만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본신의 능력이 노출되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적들을 상대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포탈은 열었고, 적들은 이곳으로 오고 있다. 어차피 실전이라는 것이 꼭 계획대로만 흘러가라는 법은 없었으니, 그는 계획을 아주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연락해.”
김진우는 심령이 거의 제압되다시피 한 박성진에게 태연하게 명령했다.
“네?”
“전화해서 작전 성공했고, 목표 포획해서 데려간다고 해.”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박성진이 눈을 데굴데굴 굴려댔다.
“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면 오던 놈들도 오다 말 거 아냐.”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탄로 날 얕은 수였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시간을 버는 데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번 시간으로 협회가 이런 이름 모를 산기슭에 신경도 쓰지 못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의 말에 박성진이 주춤주춤 일어나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렇게만 말하면 되는 겁니까?”
“왜? 뭐, 더 할 말 있어?”
별 것도 아닌 핀잔에 화들짝 놀라 박성진이 휴대폰을 부여잡고 전화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혹시라도 허튼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있었지만 김진우는 구태여 으름장을 놓는다거나 경고하지는 않았다.
그저 앞에 서서 오연하게 박성진의 얼굴을 바라보는 정도로 충분했다.
“종철 형님, 나 성진이요. 임무 성공했고, 김… 진우 잡아서 돌아갈 거요. 아, 애들? 다, 다치긴 좀 했는데 피해는 많지 않수. 아, 나도 좀 다쳐서. 그럼 레벨 12 잡는데 다 멀쩡하길 바라는… 여튼 가는 길이니까 가서 이야기합시다.”
다소 떨리는 음성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는 제법 훌륭하게 김진우의 지령을 수행해냈다.
“바, 바로 돌아오랍니다.”
“대충 한 시간 정도는 더 번건가.”
시계를 확인해본 김진우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 가자.”
“어딜 말입니까?”
설마 정말로 협회로 가자는 말은 아닐 거라 생각한 박성진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디긴 어디야. 우리 아버지 있는 곳이지.”
그의 말에 박성진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내해.”
이번에도 박성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넉넉지 않던 김진우가 슬슬 인상을 찌푸리자 머뭇거리다 포탈을 향해 돌아섰다.
“너 이 새끼, 설마…….”
김진우의 눈가에 다시금 푸른 광망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가장 은밀한 곳을 찾다 보니…….”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그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호텔 특실에 모셔두고 있다고 해도 화가 날 지경인데, 다른 곳도 아닌 지저의 미궁에 감금해 두었단다.
어느 누구보다도 지저의 미궁이 인간에게 얼마나 혹독한 환경인지 잘 알고 있던 김진우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
“이상타, 올 때가 지났는데…….”
“아무래도 몸이 성치 않으니 오는 데 시간이 걸리나 봅니다.”
“같지도 않은 소리! 걔들이 걸어오냐! 차는 뒀다가 뭐에 쓰는데!”
곧장 돌아오겠다더니 여전히 박성진을 비롯한 부하들이 도착하지 않자, 송종철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박성진은 협회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미궁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갔으니만큼 일이 잘못되었을 리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송종철은 어쩐지 불길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 탓인지 곁에서 알짱거리는 수하의 말이 하나하나 짜증이 났다.
“넌 근데 왜 여기 있어! 내가 부상자들도 있다고 가서 챙기라고 했지!”
“벌써 애들이 나갔…….”
“애들? 이 새끼가 벌써부터 네가 애들 시킬 짬밥이야!”
괜한 날벼락에 찔끔한 수하가 도망치듯 빠져나가는데, 다른 수하가 거의 엇비슷하게 사무실로 들어왔다.
“넌 또 뭐야!”
“성진 형님이 돌아왔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고라 송종철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래? 애들이랑 다 같이 왔디?”
“아뇨, 빨리 오려고 애들은 두고 자기만 먼저 왔답니다.”
이제야 불길한 예감을 떨쳐낸 것인지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진우는 당연히 끌고 왔겠지?”
“네, 아주 초주검을 만들어놨던데요? 온몸에 피가 낭자한 게, 절뚝거리면서도 겨우 걷는 게 내버려두면 죽을 것처럼 보였어요.”
“반항이 심했던 모양이구먼. 성진인 괜찮고?”
“성진 형님도 엄청 당했는지 얼굴이랑 온몸이 완전 박살 났던…….”
“이럴 게 아니라 내려가서 직접 봐야지.”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습격자의 존재도 지금 이 순간에는 중요하지 않았다. 레벨 12의 던전 베이비의 목에 드디어 족쇄를 걸었으니까.
신이 나서 계단을 내려가려던 송종철이 문득 멈춰섰다.
“가만, 김진우가 제 발로 걷고 있다고?”
“네, 무진장 아파 보였지만 제 발로 걷고 있던…….”
“근데 성진이가 혼자 그놈을 데리고 왔다고?”
그제서야 뭔가 송종철의 표정에서 이상함을 느꼈는지, 보고하던 사내가 굳은 얼굴을 해보였다.
“사지가 뜯겨져 나가도 이빨로 적을 씹어 먹겠다고 날뛰어대는 게 심층의 던전 베이비야. 그런데 지금 피투성이긴 해도 제 발로 걷는 김진우를, 성진이 새끼가 혼자 데려왔다고? 그게 뭔 개 같은 소리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 앞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