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79)
던전 견문록-179화(179/319)
# 179
던전 견문록
제 180 화
쾅!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짝이 박살 나 흩어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악!”
바로 곁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송종철은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존재감이 온몸을 찍어 눌러왔다.
저벅저벅.
바닥에 흩뿌려진 나무 조각들이 밟히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마치 고막을 파먹는 듯한 그 끔찍한 소음에 송종철이 진저리 쳤다.
“너…….”
“진즉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너무 돌아왔어.”
간신히 꺼낸 한마디를 끝마치기도 전에 들려온 나직한 음성, 송종철의 눈앞에 피투성이 모습의 김진우가 나타났다.
“반갑다, 송종철.”
그는 푸른 안광이 넘실거리는 시선으로 송종철을 지긋이 바라보다 히죽 웃어보였다.
“이 간신배 새끼야.”
김진우의 입가에 걸린 섬뜩한 미소를 보는 순간 송종철은 눈앞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자신이 꺼낼 수 있는 최고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네 양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냐!”
가족을 끔찍하게 아끼는 김진우라면 자신의 말이 통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좀 사내답기를 바랐는데 말이지.”
힘주어 말한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준비한 모든 수가 소용없을 거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재빠르게 바닥에 주저앉으며, 애원했다.
“나도 원해서 한 게 아니야! 나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이 번쩍거리더니 끔찍한 통증과 함께 구역질이 올라왔다.
새빨간 핏물과 함께 떨어져 내리는 하얀 이 부스러기, 송종철은 완전히 박살 난 턱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어차피 네깟 놈이 우두머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성큼 다가왔다.
“자, 잠깐!”
설마 협상이나 거래도 없이 이대로 자신을 죽이려는가 싶어 송종철이 덜그럭거리는 턱을 부여잡고 애원했다.
“내, 내가 아는 건 전부 말해줄게!”
그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돈, 명예, 권력! 원하는 대로 다 주겠어! 아니, 지상에 흥미가 없다면 지저에서라도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내 뒤에는 니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흥미 없어. 이 새끼야.”
싸늘한 음성에 송종철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뒷통수가 간지러워지는 느낌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오른발을 들어 올리는 김진우의 모습이 보였다.
쾅!
머리가 박살 난 시체가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김진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사방을 훑듯이 스쳐갔다.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시체뿐, 하지만 김진우는 마치 누군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무실 한켠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괜히 간 보다가 후회하게 될 텐데.”
“역시 눈치채고 있었군요.”
놀랍게도 허공이 일렁이더니 바싹 메마른 음성 하나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숨어서 입만 놀려댈 생각인가?”
“저는 겁이 많아서 말이죠. 분노한 하이로드 앞에 모습을 드러낼 깜냥은 없습니다.”
‘하이로드’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김진우의 살기가 짙어졌다.
“워, 워! 진정하시기를.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니랍니다.”
슥삭거리는 미세한 소음과 함께 목소리가 한참 멀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훑어본 그는 이내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길게 숨을 내쉬며 살기를 갈무리했다.
“내 정체를 아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지겠어.”
“정보라면 저보다 송종철에게 듣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렇기야 하겠지만, 보통 이런 놈들은 마지막에 시간을 끌면 뒤통수 맞기 십상이거든.”
그렇게 말한 김진우의 시선이 허공 어딘가에서 멈춰섰다. 박수라도 치며 맞장구를 칠 것만 같았던 음성이 시끄럽게 조잘대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위치가 간파되는 것이 염려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얕은 수작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보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슬쩍 둘러보던 그가 손짓했다.
퍼드득!
날개짓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모리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그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낯선 존재의 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있었다.
“지저 쪽에서 얻는 게 더 편하지.”
***
볼일을 마친 김진우는 협회를 벗어났다.
박성진을 통해 협회의 행사에 깊게 관여한 이들만 골라 처단하다 보니 협회 건물 내에 생존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만큼 협회의 내부는 손 쓸 수 없을 만큼 곪아 있었고, 던전 베이비들 역시 썩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협회를 손에 넣는다는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이렇게 썩어버린 협회를 흡수해봐야 얻는 것도 없을뿐더러, 송종철이 말했던 배후의 인물들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끄으, 이제 좀 놔주셔도 될 거 같은데.”
협회를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모리건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시달려야 했던 정체불명의 존재는 계속해서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놔줘.”
이쯤이면 인적도 드물고 이야기하기에 충분하다는 판단이 선 것인지 김진우는 선뜻 부탁을 들어주었다.
몇 번인가 마른기침을 토해낸 정체불명의 사내가 뒤늦게 자신을 소개했다.
“지난 전쟁에서 만발치에서나마 몇 번 뵌 적은 있지만,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군요. 반갑습니다, 위대한 정복자시여. 11층 백작, 지혜의 군주이자 현자들의 여왕, 브륜테스님의 사자 타이레논이라고 합니다.”
타이레논이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깡마른 몸매에 유달리 창백한 피부가 바싹 마른 시체처럼 보이긴 했지만, 언뜻 봐서는 인간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렇듯 눈앞에서 전승의 위엄을 보고 나니, 소문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타이레논은 앙상한 팔을 요란스럽게 휘저으며 제 딴엔 멋들어진 자세로 인사해 왔다.
“누군가 했더니 타락의 군주가 보낸 사자였군.”
“타락이라는 이름은 브륜테스님을 잘 모르는 이들이 지어낸 이름일 뿐, 지저에서 가장 현명하고 자애로운 여왕께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입니다.”
시답잖은 말을 과장되게 늘어놓는 타이레논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만 했지만, 김진우의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브륜테스라면 당당한 11층의 백작들 중 하나이자, 가장 알려진 게 없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의 사자를 지저도 아닌 지상에서 만났으니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 현명한 여왕의 사자가 지상에는 무슨 일로 왔지?”
김진우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번들거렸다. 이미 진실의 눈은 활성화된 지 오래였고, 그는 타이레논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께름칙했는지 타이레논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솔직히 다 털어놓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 여왕께서는 입이 가벼운 자를 좋아하지 않으신답니다.”
“지금은 멀리 있는 여왕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더 손해일 텐데?”
은근한 협박에 타이레논이 엄살을 피워댔다.
“그리 살벌하게 말씀하시면 저 같은 잔챙이가 어찌 버티겠습니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제 충절을 지켜주소서.”
말로는 그렇게 죽는 소리를 하면서도 눈빛만큼은 교활하게 번뜩이는 타이레논이었다.
“그럼 그대의 충절이 꺾이지 않는 선에서 몇 가지 질문을 하지. 이것마저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도 더는 참지 못할 테니, 숙고하고 대답하도록.”
김진우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 이 이상의 양보는 없노라 엄포를 놓았다. 타이레논도 더는 대답을 회피하지 못하고 조용히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내가 하이로드에 올랐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저 보는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대의 주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얼마 전 협회의 금고를 털었을 때, 기묘한 시선을 느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기생수에도 잡히지 않은 기척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늘 타이레논과 만나고 나서야 확신하게 되었다.
이 음흉한 지저의 사신은 그날 이미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여왕께서는 모르는 것이 없으니, 이 또한 알고 계시겠지요.”
다소 두루뭉술한 대답이긴 했지만, 그는 더 파고들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송종철과 무슨 관계지.”
“그자와는 그저 서로 필요한 것을 사고 파는 관계였습니다.”
“송종철이 말한 뒷배가 타락의 군주인가?”
“지저의 위대한 군주께서 하찮은 인간 나부랭이의 뒤를 봐주시겠습니까?”
“그럼 송종철과 일당에게 미궁의 핵을 전달해준 것도 그대 주인의 뜻인가?”
“그저 거래 품목 중에 미궁의 핵이 있었을 뿐, 그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송종철 말고 그대와 거래중인 인간이 있는가?”
“값만 맞다면 누군들 거래하지 못하겠습니까.”
타이레논은 생각보다 대단치 않은 질문에 이제는 아예 안심하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김진우의 질문이 이어졌고, 타이레논은 어렵지 않게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질답이 끝났을 때, 그는 타이레논을 선뜻 놓아주었다.
“여왕께서도 위대한 정복자이자 전승의 사령관이신 하이로드에 관심이 지대하십니다. 허락하신다면 다리를 놓아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타이레논은 마치 승낙이라도 받은 것처럼 희희낙락한 얼굴로 사라졌다.
”너무 쉽게 놓아주신 것 아닙니까? 하이로드에 대한 사실을 제 주인께 고하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지실지도 모릅니다.“
타이레논이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며 모리건이 염려의 말을 건네 왔다.
“타락의 군주는 이미 내가 하이로드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저자를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이미 아는 사실이 모르는 것이 되지는 않겠지.”
“저자는 그저 평범한 사자가 아닙니다. 다음에 다시 잡으려고 하면 아마 절대로 잡히지 않겠지요. 차라리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억지로라도 정보를 토해내게 만들었으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모리건은 타이레논을 쉽게 풀어준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타이레논은 능력이 부족해 은신을 들킨 것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낼 작정으로 적당히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진 타이레논의 은신 능력을 보며 그는 확신했다.
모리건도 자신도 사라진 타이레논을 찾지 못했다. 그런 그가 발견되었다면 스스로가 나타나고자 마음을 먹었던 탓이리라.
아무래도 타이레논, 또는 그의 주인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그리고 김진우는 그 꿍꿍이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하이로드의 힘에 얽힌 비밀, 또는 힘, 그 자체이리라. 아나톨리우스가 그러했고, 파르테논과 디나리온이 그러했듯이 브륜테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뭐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하라는 거야. 개나 소나 다 알고 있는 하이로드.”
이래서야 찬탈자의 눈을 피해 꽁꽁 숨으라던 메시지 창이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11층의 백작들이 하이로드의 힘을 원하는 한, 찬탈자의 시선으로부터 9층을 감추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거짓과 진실을 교묘하게 섞어 대답하는 타이레논에게 때로는 하이로드의 존재감으로 압박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당히 속아 넘어가주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당장 타락의 군주와 척을 질 이유는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그들의 적당히 탐욕을 이용하는 게 차라리 나으리라.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승자지.”
타이레논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던 김진우가 서늘한 얼굴을 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