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80)
던전 견문록-180화(180/319)
# 180
던전 견문록
제 181 화
68. 백작들의 악몽
협회는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다. 송종철을 비롯한 핵심 간부들이 전부 김진우에게 제거되었고, 주요 사업소들 중 상당수가 박살 났던 탓이다.
박성진은 그렇게 텅텅 비어버린 협회를 내부에서 완전히 장악했다. 외부에 나가 있느라 참변을 피한 간부들이 있었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그들을 제거했다.
원래대로라면 쉽지 않았을 작업이었지만 김진우의 도움을 받으니 협회를 장악하는 것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웠다.
덕분에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고도 파주에서 있었던 전투와 협회 사무실에서 일어난 참변이 널리 퍼지는 일은 없었다.
「간부들의 실종에 의문을 표하는 이들은 있지만, 어차피 그런 이들 중 대다수는 협회와 관계가 깊지 않았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경고를 무시하고 포탈을 열었던 대가로 생명과도 같은 핵을 인질로 잡혀버린 박성진은 차라리 이렇게 된 바에야 완전히 김진우의 편으로 돌아서기로 작정한 듯했다.
하기야 한 번 호되게 당하기는 했지만 위에서 거만 떨던 송종철이 사라지고 덜컥 1인자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로서는 득을 봤으면 봤지 손해 보지는 않은 셈이었다.
「그럼 또 일이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김진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성진을 통해 알아본 협회의 상태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나름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 중에 협회의 사업에 한다리 걸치지 않은 사람은 없었고, 지저에 욕심내지 않는 이는 없었다.
협회는 송종철 개인의 의사보다는 그렇게 얽히고설킨 수많은 인물의 의중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탐색자 협회가 거듭된 악재 속에서도 어떻게 그리 빨리 자리를 잡고, 수많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간판을 내걸고 있었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지상 쪽이야 박성진이 알아서 처리한다지만…….”
문제는 지저였다. 송종철이 사라진 이후에도 브륜테스는 여전히 협회와의 거래를 원했다.
당장은 자신을 의식한 탓인지 이렇다 할 거래 제안을 해오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타이레논을 보내 거래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대체 송종철이 놈은 무슨 거래를 하고 있었던 걸까.”
이제 와서 새삼 송종철을 그리 보낸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협회를 장악한 박성진이 자신의 명령을 듣는 이상,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싫든 좋든 간에 자신의 귀에 들어올 테니까.
“준영, 이제 슬슬 복귀해야지.”
협회라는 걸림돌이 사라진 이상, 이준영이 꺼릴 것은 없었다.
정찬식이 약삭빠르게 이상을 눈치채고 잠적하기는 했지만, 그 혼자 무언가를 도모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다.
“박성진이 있는데 저까지 협회에 들어갈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하지만 이준영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퍽, 마음에 드는지 그의 제안을 그다지 달가워 하지 않았다.
김진우 또한 그녀를 굳이 등 떠밀어 협회에 앉혀놓을 이유는 없었던지라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이제 슬슬 아버님께 가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아버님이란 단어가 너무도 자연스러워 흠칫 놀란 김진우였지만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해보였다.
박성진의 미궁에서 구조된 아버지는 비록 몹시 쇠약해진 상태긴 했지만,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오히려 가족이 걱정할 것을 염려해 협회와 아들의 알력을 숨기자고 먼저 제안할 정도로 의식이 명료했다.
아버지의 결단으로 가족들은 협회의 음모 따위는 여전히 모른 채 그저 가장의 귀환을 반겼을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평화를 찾은 가족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실종되었던 아버지도 찾았고, 음흉하게 일을 꾸미던 송종철도 제거했다. 협회를 장악한 박성진의 굴종을 얻어낸 것은 덤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준영이라는 걸출한 던전 베이비마저 제 몫을 하기 시작했으니, 지상에서의 활동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탄력을 받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김진우는 당분간은 박성진과 이준영에게 지상을 맡기고 미뤄두었던 과제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미궁에 의해 잠식되었던 의지, 다시는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옛 권능의 파편을 모아 하이로드의 힘을 키워야 했다.
그리고 옛 권능의 파편들은 지저에 있었다.
“다녀올게.”
김진우는 다시 지저로 향했다. 언제나와 같은 걸음이지만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거점이 9층의 대미궁이 아닌 지상의 미궁이었다는 점이었다.
“음.”
포탈을 넘기가 무섭게 침범해오는 대미궁의 악의. 김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바삐 대미궁의 복도를 걸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새롭게 대미궁에 자리를 잡은 발리셔스의 공방이었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 모아이들의 시체를 모아놓고 무언가를 연구하던 나가 마법사 하나가 그를 보고는 깜짝 놀라 엎드렸다.
“왕이시여.”
나가 마법사의 정체는, 마침내 충성을 인정받아 나가 일꾼의 몸을 벗어난 발리셔스였다.
그는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납작 엎드려 극도의 공경을 표했다.
“발리셔스.”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발리셔스를 바라보던 김진우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그대의 미궁에도 지저인이 있었던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발리셔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몇이 있었지만, 허약해서 금방 죽어버렸습니다. 개중 몇은 망자로 만들기도 했었지만, 그다지 쓸모는 없었습죠.”
“개중에 살아남은 지저인은 없었나.”
“음, 똘망똘망한 놈이 하나 있어서 제법 요긴하게 쓴 기억이 있긴 합니다만, 나중에는 풀어줬습니다.”
“이름을 기억하나?”
“하찮은 지저인의 이름까지는…….”
천연덕스러운 발리셔스의 대답에 김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상에서 새롭게 굴종의 관계를 맺은 박성진은 9층에서 태어난 던전 베이비다. 그리고 그는 발리셔스의 노예였다.
“그대의 노예였던 지저인이, 지금은 미궁의 주인이 된 모양이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나는 그를 수하로 받아들였다.”
발리셔스는 대체 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하지를 못하는 듯한 눈치였다.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는 나가의 푸른 눈동자에는 의문 외에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 노골적인 무관심에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어쩌면 그 역시, 그대와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군.”
흉악한 외피와 날카로운 다리를 가진 12층의 강대한 괴수를 떠올린 그가 복잡한 심사만큼이나 복잡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보다 뭘하고 있었던 거지.”
괜한 감정 소모에 시간을 들이기 싫었던 김진우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의 질문에 발리셔스가 신이 나서 모아이의 시체를 보며 설명해 주었다.
“이놈들로 망자를 만들면 아주 재미있는 놈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다지 질 좋은 재료는 아닌 것 같다만.”
“그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나가 마법사의 몸을 빌린 터라, 성격까지 닮아가는 모양인지 발리셔스의 눈동자에 탐구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광기가 보였다.
“이놈들 말입니다. 잘만 하면 원래 몸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만큼은 심드렁한 얼굴로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진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가능한가?”
“아직은 더 만져봐야겠지만, 며칠 말미만 주시면 반드시 원래의 모습을 복원해 보이겠습니다.”
호언장담하는 발리셔스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발리셔스와의 만남을 끝낸 김진우는 아리아네를 찾았다.
“디나리온과의 만남을 주선하라.”
지금쯤이면 완전히 끝이 났을 11층의 전쟁, 그는 지저 복귀의 목적지를 11층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에 앞서 디나리온을 만나 받을 것이 있었다.
***
김진우가 눈을 떴을 때, 지옥이 있었다.
사방에 가득한 시체, 그중에서도 가장 높게 쌓아 올려진 시체의 산, 그곳에 거대한 거인이 있었다.
마왕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찬란했을 갑주의 광택도 피에 무뎌지고, 손끝에 움켜쥔 창끝이 잔뜩 상해 있었지만 거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시체의 산을 둘러싼 헤아릴 수 없는 대군도, 그 선두에 선 괴수들도 감히 거인의 위엄을 해치지는 못했다.
거인은 그렇게 홀로 우뚝 서서 수만의 대군을 하나뿐인 눈으로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수만에 달하는 대군이 거인 하나를 포위하고 있는 듯했지만, 여유가 없는 쪽은 오히려 수만의 군사들이었다. 산을 둘러싼 군대는 함성만 지를 뿐 감히 오르지 못했고, 지금 이 순간 전장을 지배하는 것은 분명 거인이었다.
거인은 기세만으로 수만의 군대를 흩어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수만 군대의 군기 역시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 일백에 달하는 크고 작은 괴수들이 시체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곧 전투가 벌어졌고, 결과는 끔찍했다.
거인의 위용은 압도적이었고, 거인의 날 무뎌진 창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산을 오른 군사들의 몸이 발기발기 찢겨져 허공에 흩어졌다. 순식간에 수십의 군사가 살해당해 산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을 오르는 이들이 줄지 않았다. 아래서 대기하고 있던 대군이 마침내 진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나톨리우스!”
멀리서 그 끔찍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김진우는 무심코 한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시체의 산을 올라 외눈박이 거인의 등에 창을 후려치고 나가떨어지는 청동 거인의 모습이 낯이 익었던 탓이다.
비록 그 상징과도 같던 철가면도 깨어져 나가고, 화려한 갑주마저도 넝마가 되어 있었지만, 청동 거인의 모습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진우는 외눈 거인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잡혀 비명을 지르는 사내를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검은 피막의 날개가 낯설었지만 사내는 분명 디나리온이었다.
“끄아아악!”
그가 잠시 넋을 잃고 낯익은 얼굴들을 바라보는 사이, 외눈 거인이 디나리온의 날개를 그대로 찢어버렸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디나리온이 시체의 산을 굴러 떨어졌다.
“디나리온!”
무심코 내지른 비명, 갑작스레 세상이 요동을 치다 이내 사라져 버렸다.
“전승의 사령관이여. 오랜만이다.”
그리고 무너져 버린 세상에서 디나리온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게 대체…….”
그 처절했던 비명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디나리온의 음성은 너무나 태연했다. 그래서 김진우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의 능력은 악몽, 이번에는 그대가 나의 악몽을 꾼 듯하군.”
디나리온의 말을 듣고나서야 그는 겨우 현실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잔뜩 엉클어져 있던 머릿속이 정리되며, 방금 전에 보았던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설마 방금 전에 내가 본 거인이…….”
“맞아, 그가 바로 한때 지저를 지배했던 열 군주 중 가장 강하고 현명했던 자이자, 내 날개를 앗아간 괴물.”
악몽의 여파인지 어쩐지 등이 시큰거리는 듯한 얼굴로 돌아본 디나리온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외눈박이 군주, 보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