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82)
던전 견문록-182화(182/319)
# 182
던전 견문록
제 183 화
69. 두 번째 각성
“주인님!”
도미니크가 피를 토하듯 외치며 자신의 주인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그는 이미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섬광에 둘러싸여 있었고, 작열하는 열기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꺄악!”
그 무지막지한 열기에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제 주인을 꼭 부여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고운 피부가 순식간에 화상으로 보기 흉하게 눌어붙고 말았다.
“이 멍청아! 떨어져!”
만약 모리건이 그녀를 강제로 떼어내는 것이 조금만 더 늦어졌다면, 화기(火氣)에 약한 나가 여인은 그대로 온몸이 녹아내리고 말았을 것이다.
“주, 주인님이!”
평소 어지간한 위기가 있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도미니크는 완전히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아아…….”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있어!”
고통보다는 염려가 큰 것인지 자꾸만 엉금엉금 기어 주인에게 다가가려는 도미니크를 꽉 찍어 누르며 모리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갑작스러운 에너지의 폭발에 놀라 도미니크를 잡아채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사정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강렬한 섬광에 삼켜져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왕을 찾는 그녀의 시선에 혼란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에너지가 낯이 익었던 탓이다.
“지금 진우 씨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말조심해라. 네깟 것이 함부로 부를 이름이 아니다.”
뒤늦게 끼어든 이준영에게 사납게 으르렁거린 모리건이 도미니크를 짐짝처럼 내던졌다.
갑작스럽게 도미니크를 떠안게 된 이준영이 미처 상황을 파악할 틈도 주지 않고 벌떡 몸을 일으킨 모리건은 작열하는 열기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까아아악!
온몸이 타들어갈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인지 포효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른 모리건의 모습이 변한다 싶더니, 이내 하나의 거대한 까마귀가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를 활짝 펼친 그녀가 섬광을 감싸듯 가리고 섰다.
“이대로라면 바깥까지 이 파동이 퍼져 나갈 테지.”
도미니크의 비늘이 그러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까마귀의 깃털, 하지만 그녀는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
강렬한 섬광과 함께 압축과 팽창을 거듭하는 강대한 에너지의 파동. 도미니크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돕겠어요!”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치유의 빛이 까마귀의 날개에 닿았을 때, 검은 깃털이 다 타버려 볼썽사납게 변해버렸던 날개를 다시 재생시켰다.
“젠장, 무슨 힘이 이렇게…….”
비장하게 나섰던 것이 무색하게, 모리건은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도미니크의 치유력이 더해졌음에도 채 가리지 못한 섬광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당장 물러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자신의 주인이 지상도 지저도 아닌 이곳 미궁이 밝혀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쩌면 의미 없을 노력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더, 더는…….”
하지만 주인에 대한 충성만으로 무마하기에는 섬광의 열기가 끔찍할 정도로 뜨거웠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꼭 닫은 날개를 조금씩 열어 보이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이 무지막지한 힘의 파동을 고스란히 지상으로 노출시키고 말 터, 그녀의 얼굴에 조급함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때,
그오오오오오.
포탈 너머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저목!”
뒤편에서 모리건을 보조하고 있던 도미니크가 환성을 질렀다. 포탈을 넘어온 지저목들이 온몸의 가지를 펼쳐 섬광을 끌어안은 것이다.
“망할 놈들, 오려면 일찍 올 것이지.”
지저목들이 왜 갑자기 포탈을 넘어온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리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저목들이 펼친 가지와 잎사귀가 서로 얽히고설키더니 이내 거대한 고치를 만들어냈다. 놀랍게도 지저에 악명이 자자한 검은 흉조마저도 채 가리지 못했던 섬광을 지저목들은 단 한줄기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그 강렬한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일광욕이라도 즐기듯 들뜬 소리를 길게 이어 뱉으며 몸을 떨었다.
그오오오오.
언뜻 봐서는 광합성이라도 즐기는 듯한 모습. 그 기괴한 광경에 놀랄 새도 없이 모리건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몰골을 하고도 어쩐지 묘하게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
“으으…….”
김진우가 꼬박 하루 만에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반겨준 것은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버린 메시지 창이었다.
[하이로드의 진명은 존재 그 이상의 것입니다.] [하이로드 김진우가 이제껏 몰랐던 하이로드의 진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눈박이 군주의 이름은 그 자체로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는 잊혀진 이름이 되었지만, 한때 외눈박이 군주의 진명은 공포의 대상이자 선망의 이름이었습니다. 독보적인 강대함과 지저에 군림했던 위대한 군주의 이름을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그 이름에 담긴 막대한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외눈박이 군주, ‘보탄’의 이름을 계승했습니다.] [육체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강해집니다.] [거인의 거력과 단단함을 얻은 육체가 또 한 번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당신의 육체는 이미 한 번 나가의 왕으로 각성한 상태입니다. 거인의 힘과 나가의 힘이 융화되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정신없이 번쩍이는 메시지 창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정신으로는 따라갈 수조차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스쳐갔다.
[가장 존귀하고 강대한 나가, 나가라자(용왕-龍王)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용들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당신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일 겁니다.] [당신은 저 자부심 강한 드라칸들조차 선망할 정도로 용과 흡사한 존재가 되었습니다.]이번에는 반쯤 넋이 나가 있던 김진우도 벌떡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육체가 또다시 변이를 일으켰다는 메시지에 저도 모르게 제 몸을 훑어보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갑작스레 괴물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생채기 하나 없이 뽀얀 피부는 아직 인간의 그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강대한 나가라자라고 해도 늘 용의 힘을 사역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꽤나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겉모습따위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본심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우습게도 용의 힘이 일정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만 발동한다는 사실에 차라리 안도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진실의 눈 능력이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전과는 달리 상대의 상태뿐 아니라, 제한적이지만 간단한 생각까지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보다 격이 낮은 존재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복잡한 사고까지 파악할 수도 없고 적의가 강한 존재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상대의 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마어마한 이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나가들의 왕 나가라자이자, 용왕이요 하이로드인 당신보다 격이 높은 존재는 많지 않습니다. 당신은 마음만 먹는다면 당신이 아는 거의 모든 존재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꼭 당신에게 좋은 일은 아닙니다.]메시지는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육체의 각성으로 기생수 역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기생수가 기생마(寄生魔)가 되었습니다.] [기생마는 여전히 홀로 생존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독자적인 진화의 길에 들어선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기생마는 짧은 시간 동안 숙주의 육신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운 좋게 새로운 육체를 찾는다면 한정된 시간 동안 육체를 조종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기생마가 조종할 수 있는 존재는 그다지 격이 높지 않은 존재들뿐입니다. 하지만 운이 좋다면 기생마에 저항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육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근래 들어 다소 존재감이 희미해졌던 기생수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변화한 기생수의 효용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김진우는 자신을 둘러싼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지저목?”
마지막 순간, 잠식해오는 대미궁의 악의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상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만약 대미궁을 벗어나는 데 실패했다면 자신은 이미 대미궁에게 잠식되어 있을 터,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소 혼란스러울 뿐, 이유 모를 분노와 조급함 따위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저목들이 눈앞에 있는 이유를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주인님!”
그런데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지저목들이 가지를 걷어내고 열어준 공간 너머로 도미니크가 뛰어 들어왔다.
***
“그러니까, 내가 갑자기 빛에 둘러싸였고, 엄청난 에너지가 퍼져 나왔단 말이지? 그리고 도미니크와 모리건이 힘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지저목들이 포탈을 넘어왔고.”
김진우의 말에 도미니크가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런저런 부연설명을 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외눈박이 군주의 진명과 관계 있는 것은 분명했다. 메시지 창 역시 ‘보탄’이라는 이름의 계승했다고 알려왔으니까.
하지만 고작 이름을 계승한 것 치고는 너무나도 큰 변화였다.
물론 외눈박이 군주의 진명이 그저 평범한 이름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육체는 나가라자에 이르렀고 기생수는 기생마가 되었다.
“한때 그분은 신이라고까지 불렸던 분이니까요. 그분의 이름에는 신성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김진우는 잔뜩 들뜬 얼굴을 한 모리건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억지로나마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왜 지저목들은 저 꼴이지?”
대미궁의 핵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지저목들은 마치 눈이라도 맞은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앙상하던 전날의 외양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라 그는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지저목들은 오랜 인고 끝에 마침내 겨우살이 나무의 참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오랜 세월, 춥고 어두운 지저에서 겨울과도 같은 세월을 보내온 지저목들은 더 이상 추위와 어둠에 쇠약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빛을 받았으며 과거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지저목의 진짜 이름은 삭풍에도 잎 떨구지 않는 겨우살이 나무입니다.] [그들은 지저의 수도사이며, 해박한 현자이며, 신비를 쫓는 구도자입니다.]의문 가득한 그에게 겨우살이 나무가 스스로 입을 열어 사정을 설명했다.
“갈망하던 빛을 찾아 걸음을 옮겼더니 그곳이 바로 왕의 곁이었나이다.”
놀랍게도 겨우살이 나무들은 비롯 느릿느릿할지언정 더 이상 전처럼 말끝을 기괴하게 늘이지 않았다. 다소 놀란 얼굴을 해보인 그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공을 치하했다.
“그런가. 어쨌건 덕분에 분란을 피할 수 있었다. 고맙군.”
모리건과 도미니크는 입을 모아 말했다, 지저목들이 아니었다면 무지막지한 에너지의 파동이 퍼져나가 주변의 이목을 끄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거라고. 이제 새삼 상황이 끝나고 나자 지저목들의 도움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당시의 저희는 채 깨어나지 못해 우둔한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뜻하고 행한 것은 아니니 왕의 치하는 과분할 뿐이옵나이다.”
그 뒤로도 김진우와 수하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파악하고 이런저런 일을 확인하다보니 꽤나 시간이 지체되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지금은 먼저 처리할 일이 있으니.”
그렇게 말한 그가 포탈을 열었다.
“왕이시여!”
별도의 명령이 없이는 지상의 미궁에 드나들 수 없는 대미궁의 소환수들이 그를 보고는 반색하며 무릎을 꿇었다.
“아리아네는 어디 있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퀀투스가 완전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맞은 아리아네를 끌고 왔다.
“왕께 일어난 변고가 그녀의 수작이라 생각해서…….”
눈살을 찌푸린 그의 심중을 오해했는지 소환수들이 변명이라도 하듯 황급히 말을 주워섬겼다.
“책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진우는 딱히 그들을 질책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앞으로 할 일이 그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탓이다.
“아리아네.”
“와, 왕이시여.”
완전히 터져버린 입술로 웅얼거리듯 대답한 아리아네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대체 어디까지 까발린 것이냐.”
아리아네는 부어오른 눈두덩이 밑에서 열심히 눈을 굴려댔을 뿐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우는 이미 그녀의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직 모르고 있어. 끝까지 잡아떼면…….
원래대로라면 간단한 심리 상태만이 표시됐을 진실의 눈을 통해, 그는 아리아네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