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84)
던전 견문록-184화(184/319)
# 184
던전 견문록
제 185 화
포탈 너머로 한 발, 김진우는 조심스레 나머지 한 발 마저 내딛었다. 우려했던 대미궁의 잠식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여전히 대미궁은 끊임없이 악의를 내뿜으며 그를 집어삼키려 했지만 전처럼 질식할 것 같은 악의 속에서 느껴지던 아득한 느낌은 없었다.
이 또한 외눈박이 군주 보탄의 진명을 알고 난 뒤에 생긴 변화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악의에 기분이 가라앉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으니,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했다.
“역시 인장을 모아야 하는가.”
하이로드의 진명을 깨달은 정도로 대미궁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이야 그저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정도라지만, 조금이라도 허점이 드러난다면 대미궁은 전처럼 이를 내보이고 본색을 드러낼 게 분명했다.
그는 당초에 계획했던 대로 인장의 수집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아리아네는?”
그의 질문에 대기하고 있던 퀀투스가 대답했다.
“헤임달과 호야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미궁의 주인들 정도는 아예 눈 아래로 보는 헤임달과 인간형 괴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 호야라면 아리아네 정도의 감시역으론 차고도 넘쳤다.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워낙에 상처가 심각해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는 않고 하루종일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하기야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으니 지금의 아리아네는 제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이리라.
“그렇군.”
김진우는 따로 더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퀀투스는 어쩐지 물어볼 것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뭐지? 따로 할 말이 있는가?”
“왕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시겠지만, 어찌하여 그녀를 살려두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미 왕께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노라 말씀하신 지금, 그녀를 살려둔다는 것은 불씨를 남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직한 퀀투스답지 않게 논리정연한 말이었다. 눈에 이채를 띈 김진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나가 용사를 살펴보았다.
“호오.”
왜 이제야 알았을까. 퀀투스의 모습이 전과는 미세하게 달랐다.
전투에 최적화된 육체야 전과 같다지만 눈에 서린 총기가 전에 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맹목적인 충성에 가려져 혼탁하기까지 했던 푸른 눈동자가 드물게 번쩍거렸다.
“내버려 두어라. 그녀를 따로 쓸 곳이 있으니.”
퀀투스는 더 묻지 않았다.
“흐음, 이럴 게 아니라. 내가 그녀를 봐야겠군.”
물러나려던 퀀투스가 다시 다가와 안내를 자처했다.
“으으…….”
김진우를 본 아리아네는 경기라도 일으키듯 온몸을 떨어댔다. 눈동자에 서린 공포를 보니, 제대로 기가 눌린 모양이다.
“오늘은 그저 대화나 나누고자 온 것이니, 그리 떨지 않아도 된다.”
애써 온화한 태도로 말해보았지만, 여전히 그녀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쯧, 상처도 치료해주지 않았다니.”
김진우의 말에 지켜보던 헤임달이 황당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저리 만든 것이 본인인 것을, 그 태도가 너무도 뻔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김진우는 그런 것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명령했다.
“그녀를 치료해 주도록. 저래서야 언제 명줄을 놓을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 말에 나가 사제가 달려와 그녀를 치료해 주었다. 당장 완벽하게 치료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피딱지와 멍으로 윤곽조차 제대로 구분되지 않던 그녀의 얼굴이 그나마 봐줄 만하게 변하였다.
“으.”
아리아네는 그의 호의에 오히려 더욱 움츠러들었다.
“내가 조금 흥분해서 손을 과하게 썼다. 그대가 이해하도록.”
그의 말에도 아리아네는 여전히 두려운 얼굴로 시선을 피했을 뿐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김진우가 성큼성큼 다가가 몸을 낮췄다.
바짝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리아네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더욱 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겨우 새살이 돋아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히익.”
손길이 닿자 마치 칼날에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는 그녀를 보며 그가 말했다.
“이런, 아름다운 얼굴에 상처가 났군. 다시 와서 치료하라.”
그의 말에 나가 사제가 다시 달라붙어 치유의 주문을 외웠다.
“이제야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군.”
아리아네는 육신은 회복이 되었지만 미칠 것 같은 공포만큼은 더욱 더 커져버린 얼굴로 감히 그를 마주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깔았다.
“따지고 보면 그대의 주인과 나는 같은 배를 타지 않았는가. 내가 생각이 짧아 그대에게 모진 짓을 했어. 사과하도록 하지.”
설마 이제 와서 디나리온과의 관계가 걱정되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태도는 전에 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기에도 뭐하지만, 나는 그대를 해코지할 마음이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헤카림과 달리 그대는 제법 협조적으로 나를 돕지 않았던가.”
제 딴에는 그녀를 다독여 본다고 한 말인 모양이지만, 처참하게 살해당했던 헤카림을 언급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는 더욱 더 겁에 질려버려 이제는 눈까지 질끈 감고 말았다.
“당장 그대를 풀어줄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대를 디나리온에게 돌려보낼 생각이다. 믿지 못하겠다면 이곳에 지저의 율법에 대고 약속하겠다.”
지저의 존재에게 있어 지저의 율법이란 그저 표면적으로 따라야 하는 법이 아니었다.
지저 율법의 근간에는 지저의 모든 것을 살피는 지저의 신비가 있었으니 지저의 율법에 대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들 중에 멀쩡하게 끝이 좋았던 자는 없었다.
과연 이번만큼은 아리아네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으니, 이제는 그가 해코지할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믿게 된 듯했다.
-서, 설마 나를 살려줄 생각인가?
실제로 진실의 눈을 통해 들여다 본 그녀는 약삭 빠르게 자신의 목숨을 두고 저울질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의 주인과 제법 괜찮은 거래를 했거든. 괜한 감정 때문에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평소라면 코웃음쳤던 그가 꽤나 공을 들여 디나리온과의 거래를 설명해 주었다.
-아, 파르테논의 인장이라면 그에게도 큰 대가야. 과연 주인께서 큰 결단을 하셨어.
이제는 슬슬 그녀의 생각을 짚어내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진실의 눈이 통하는 건 혼란에 빠져 있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들에 한정된 듯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한 번 각인된 공포는 어지간해서는 떨쳐낼 수 없으니, 그녀가 다시 자신을 적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느긋한 얼굴을 한 김진우가 쐐기를 박듯 헤임달에게 명령했다.
“대미궁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녀가 하는 일에 관여치 말라. 그녀는 포로가 아닌 손님이다.”
“저, 정말로 저를 살려주실 건가요?”
처음으로 그녀가 입을 열어 자신의 처우를 물었다. 그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안전을 보장했다.
“지저의 율법에 걸고 약속하겠다. 나는 그대를 해코지할 생각이 없다.”
두 번이나 거듭된 율법에 대고 한 약속, 아리아네는 겨우 안심하는 얼굴을 해보였다.
“원한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대에게 대미궁 내에서의 자유를 보장하겠다. 물론 그대에게 전 미궁을 허락할 수는 없으니. 그대 역시 한때 미궁의 주인이었던 바,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 믿겠다.”
그렇게 말한 그의 손짓에 헤임달과 호야가 사라졌다.
“그럼 내 뜻을 전달했으니 나도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필요한 게 있다면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하도록. 어지간한 것이라면 편의를 봐줄 것이다.”
그렇게 말한 그가 몸을 돌리고 밀실을 나서다 다시 멈춰 섰다.
“부디 이번 일로 그대의 주인과 틀어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염려 섞인 그의 음성에 아리아네가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주인께서는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조차 쓰지 않으실 거예요.”
“그런가, 그럼 안심이군.”
이제야 겨우 볼일이 끝났다는 얼굴로 웃어 보인 김진우가 밀실을 빠져나갔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홀로 남은 아리아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나는 내 목숨만이라도 보장받으면 그만. 판단은 그분께서 하시겠지.”
결국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 그녀는 지저의 율법을 걸고 한 약속을 믿는 것인지 정말로 편한 자세로 잠에 빠져들었다.
육신의 상처야 회복되었지만 그간 두려움에 떨며 보낸 시간이 적지 않으니 정신적인 피로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인지, 그녀는 눈을 감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그녀는 아마도 모를 것이다.
김진우에게 지저의 율법 따위는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지저에 묶이지 않은 지상의 존재. 지저의 율법에 기댄 맹세가 가진 강제력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김진우가 이번만큼은 약속을 어길 생각이 없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천만다행이었 뿐이다.
그는 정말로 약속대로 그녀에게 해코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아리아네에게 원하는 것은 그저 잠깐 뿐인 감정적 복수가 아니라 더욱 큰 무언가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정복자가 나를 살려준다고 해도…….”
뒤늦게 깨어난 그녀는 제 주인이 얼마나 모질고 차가운 성정을 지니고 있는지를 떠올리고는 굳은 얼굴을 해보였다.
임무가 실패한 마당에 투자금도 다 날렸으니, 다시 심층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절대로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살 길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김진우가 의도한 상황인지도 모르고.
***
아리아네와 헤어진 김진우는 오너 룸을 찾았다.
“왕이시여.”
그런데 그를 반겨주는 여인의 얼굴은 이곳에 있어서 안 되는 이의 것이었다. 곧게 뻗은 귀에 까만 피부를 한 그녀는 바로 릭샤샤였다.
요정 군주의 계승권을 노리는 디나리온의 마수를 피해 지상에 숨겨둔 그녀가 왜 다시 대미궁으로 돌아온 것인지,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 여상스러운 얼굴 어디에도 심층의 백작에 대한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대가 움직일 차례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는 그녀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제 몸을 자꾸만 돌아보며 몸을 삐그덕대는 것이 평소 군더더기 없는 언더 엘프의 행동거지와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행운을 빌도록 하지.”
그의 인사에 릭샤샤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어색했던 그녀의 몸놀림도 오너 룸을 나서 저 멀리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쯤에는 다시 평소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에스페, 아니 릭샤샤가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질문이 잘못되었다.”
이제껏 왕좌의 어둠에 숨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여인, 도미니크가 모습을 드러내며 물었다.
“우리가 기대할 건, 그녀의 활약이 아니야.”
“그럼?”
그녀의 질문에 김진우가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디나리온. 그자의 탐욕이 기대만큼 크기를 바라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