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85)
던전 견문록-185화(185/319)
# 185
던전 견문록
제 186 화
70. 함정
김진우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눈치였지만, 마냥 웅크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오랜만에 미궁을 나서 심층으로 향했다.
끄으으으.
잠깐 사이에 9층을 제 세상인 양 활보하고 다니던 모아이들이 그를 발견했지만, 이 비틀린 괴수들은 감히 그에게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억눌린 소리를 내뱉으면 눈치만 보았을 뿐이다.
“예전이었다면 보이는 족족 쓸어버렸겠지만, 지금의 그대들은 마치 나의 대미궁을 지키는 견공들과도 같구나.”
김진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어 보이고는 모아이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넓지 않은 토굴, 모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든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난동을 부려댔다.
“키에에엑!”
급기야 제 동족을 할퀴고 물어뜯어 그의 앞으로 던지는 꼬락서니가 추하기만 했다.
“흐익!”
그렇게 내던져진 모아이가 그를 보고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는 몸을 덜덜 떨어댔다.
그들은 마치 포식자 앞에 내던져진 토끼와도 같았다.
심층의 백작들에게까지 이를 들이대던 흉포한 괴수들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진우가 심층의 백작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존재의 격이 달랐다.
하이로드에 올라, 외눈박이 군주의 진명을 깨달으며 각성한 그의 존재감은 이미 지저의 왕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모아이들도 감히 그에게 함부로 대적할 수 없었다.
그렇게 김진우는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이 9층을 벗어날 수 있었다.
10층에 도착한 그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엉망이 된 보레아스의 미궁이었다.
9층의 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모아이들의 공세를 버텨내던 그는 김진우가 대미궁에 올라 연락이 두절되며 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인 것이다.
차라리 예전이었다면 버틸 만했을 것을, 그나마 모아이들과 전투를 이어가던 입구 근방의 남작들의 미궁을 9층의 병력이 쓸어버려 더욱 더 상황이 악화된 탓이었다.
하지만 삭풍의 보레아스, 10층의 제일가는 용사라는 말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지 보레아스의 미궁은 비록 엉망진창의 꼴이었을지언정 모아이들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
“막아!”
보레아스는 오지 않는 지원 병력을 기다리며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었다.
“더는 못 막습니다!”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수하들도 이제는 투지가 많이 사그라들었으니, 그간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만했다.
“제길,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보레아스님만이라도!”
삭풍의 전사 몇이 보레아스에게 피를 토하듯 외쳤다.
“아니. 나 역시 그대들과 함께하겠다.”
“보레아스님만 살아계신다면 저희 삭풍의 전사대는…….”
“핵을 갖고 몸을 피하십시오!”
물러설 줄 모르던 삭풍의 전사들도 마지막을 떠올릴 정도로 전황은 절망적이었다.
자랑스러운 겨울성은 이미 빗장이 풀려 모아이들이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고, 수백에 달하던 삭풍의 전사들은 모두 죽고 불과 수십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연이은 전투에 지쳐 상처가 없는 자들이 없었으니, 겨울성이 함락되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였다.
보레아스는 부하들의 말에 몸을 돌리는 대신 곡도를 꽉 움켜잡았다. 다시 자신을 밀어내려는 부하들에게 손짓을 해보인 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더 이상 다운 잼이 남아 있지 않다.”
보레아스의 말에 모아이들과 필사적으로 전투를 이어가면서도 후퇴를 종용하던 삭풍의 전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분명 최상급 다운 잼 하나가…….”
“이미 병력을 소환하는 데 사용했다.”
그의 말에 전사들이 절망에 찬 얼굴로 양손을 늘어뜨렸다.
“어째서…….”
“내 눈앞에서 충성스러운 전사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만 살 궁리를 하란 말이냐!”
보레아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전사다!”
곡도를 움켜쥔 그가 전사들을 제치고 최선두로 나서 외쳤다.
“나는 10층의 남작이며, 겨울성의 성주다! 그런 내가 도망쳐서 갈 곳이 어디 있으며, 애당초 나에게 굴욕적인 도주가 어울리기나 한단 말인가!”
분노로 가득 찬 고함과 함께 내지른 곡도에 모아이들이 그대로 쓸려 나갔다.
“나는 삭풍의 보레아스다!”
수십의 모아이가 곡도의 검기에 휩쓸려 반 동강이 났지만, 대열이 메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보레아스가 다시 손을 떨쳐냈다.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역시 두 달간 지속된 전투에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이어진 공격은 처음과 달리 서넛의 모아이들을 베어냈을 뿐이다.
“왕과 함께하겠나이다!”
삭풍의 전사들이 발맞추어 튀어나오며 순식간에 그를 둘러쌌다. 왕이 보인 불굴의 의지 덕에 사기가 올라간 전사들의 칼날은 무자비할 정도로 모아이들을 쓸어냈다.
좁은 통로가 금세 모아이들의 시체로 가득 차고, 그 사이를 뚫고 또 다시 썩어 문드러진 괴수들이 달려들었다.
계속되는 혈전,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삭풍의 전사들이었다.
그간 누적된 피로는 투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모아이들의 악의는 그들의 투지 이상이었다.
결국 보레아스를 둘러싸고 있던 삭풍의 전사들이 하나둘 모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으아아아아!”
보레아스는 그렇게 이지 없는 괴수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수하들을 보며 피를 토하는 절규를 내뱉었다.
“이 무책임한 새끼이이이!”
그는 오지 않는 지원군을 떠올리며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10층의 귀족들과 연합하여 전쟁을 해왔다면 이렇게까지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타락했니 뭐니 해도 10층의 귀족들은 저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9층의 정복자에게 홀려 10층의 귀족들을 나 몰라라 한 순간, 이미 이러한 미래는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일이 비일비재한 지저에서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그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대가는 충성스러운 전사들의 죽음과 겨울성의 멸망이었으니, 그는 마지막 힘을 담아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놈!”
마지막 힘을 모아 내지른 일격에 모아이들이 쓸려나갔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모아이들은 금세 다시 몰려들었고, 그는 힘 빠진 손을 휘저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큭.”
거대한 모아이 하나의 살덩이를 반쯤 파고드는 것을 마지막으로 곡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크아아아!”
강적의 힘이 전부 소진됐음을 깨달은 것인지 모아이들이 사납게 몰려들었다. 어떻게든 이 싱싱한 육체를 한점이라도 더 뜯어먹기 위해 달려드는 괴수들의 모습이 추악했다.
그 모습을 보며 보레아스는 두려움보다 아쉬움이 큰 얼굴을 해보였다.
“그래도 제법 재미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충성의 맹세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9층의 정복자와 함께 지저를 누빌 때가 즐거웠다.
썩어 빠진 10층의 남작들처럼 지루하지도 않았고, 교활한 11층의 백작들처럼 머리싸움을 한다고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정복자와 함께할 때만큼은 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죽음이 가까워진 지금, 몰려드는 모아이들을 보면서도 한 번만 그때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엿이나 먹어라.”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던 그의 양손이 늘어지는 순간 모아이들이 해일처럼 그를 덮쳐왔다.
“크아아아악!”
하지만 그가 예상했던 죽음의 사자는 오지 않았다. 대신 그를 찾아온 것은 그가 그토록이나 기다렸던 정복자였다.
“내가 너무 늦었다, 보레아스.”
다시 만나게 되면 한때 맺었던 군신의 예 따위는 집어치우고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주겠다던 보레아스는 정복자를 보고 아무런 욕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미안하다 말하는 그 뻔뻔함이, 그 당당함이 너무도 반가웠던 탓이다.
“제길, 다 늦게 와서는.”
겨우 한마디 내뱉은 것은 칭얼거림과도 같은 불평일 뿐이었다.
“덕분에 수하들도 다 죽고 나 혼자요.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건지.”
하지만 말과는 달리 늘 서리가 내려 있던 겨울성의 성주는 어쩐 일인지 입가를 실룩이고 있었다.
***
군신의 관계는 김진우가 하이로드에 올라 귀족의 위를 버리며 이미 무효가 되었다지만, 보레아스는 여전히 그를 왕이라 칭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수하도 다 잃고 죽을 뻔했는데, 왕께서는 아주 신수가 훤하십니다.”
비록 예전처럼 예를 차리지도, 또 공손하지도 않았지만, 김진우는 그를 전과 똑같이 대했다. 긍지 높은 삭풍의 전사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미안하게 됐군. 이쪽도 사정이 있었다.”
보레아스는 그가 늦은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 없어보였다. 그는 그간의 사정이야 어찌 됐건 간에 당장 김진우가 보이는 존재감에 상당히 흥미 있어 했다.
“잠깐 안 보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때 귀족간의 결투까지 치렀던 보레아스니만큼 김진우의 변모에 대해서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하기야 나름대로 대등한 전투를 치른 것이 불과 1년 전이다. 비록 군신의 관계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전승의 사령관이자 정복자인 군주와 대등하게 싸웠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버린 적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의 자부심은 맹렬한 투지가 되어 그의 안에서 무럭무럭 몸을 키웠다.
“그렇군, 그대는 이제 더 이상 나의 수하가 아니지.”
노골적인 투지에 김진우가 새삼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뻔뻔스러워 보레아스는 잔뜩 독이 오른 얼굴을 해보였다.
“이미 알고 있으니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터. 다시 해봅시다.”
모아이들의 살점과 피로 무뎌졌던 곡도에 다시 한 번 예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피로에 지쳐 풀어져 있던 눈동자에는 끓는 듯한 투지가 가득 떠올랐고, 늘어져 있던 몸에 다시금 활기가 돌았다.
“이번에도 전과 마찬가지인 조건을 거는 건가.”
“패자의 모든 것은.”
“승자의 것.”
“지저의 율법대로!”
보레아스가 사납게 포효하며 기세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기세 좋게 움켜쥔 곡도를 단 한 차례도 휘두르지 못했다.
“크윽.”
상대의 기세가 갑작스레 짓눌러오기 시작했던 탓이다.
특별히 살기를 내보인다거나 투지를 보인 적도 없건만 상대는 존재 그 자체로 거대한 산이었다.
그 압도적인 존재의 격에 보레아스는 서서히 짓눌리기 시작했다. 안간힘을 다해 저항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어느 순간이 되자 마치 굴종을 약속했던 그 언젠가처럼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반갑다, 보레아스. 이렇게 다시 보니 좋구나.”
위대한 전승의 사령관, 유일무이한 정복자, 이제는 하이로드에 오른 그의 군주가 웃어 보였다.
***
보레아스는 김진우에게 건네받은 최상급 다운 잼 속에 겨울성의 핵을 담아 9층으로 향했다.
사실 그는 보레아스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하이로드에 오른 지금의 그는 인장 하나가 절실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대로 인장을 취하고 버리기에 보레아스는 너무도 아까운 전사였다.
비록 난폭하기는 하지만 삭풍의 전사는 긍지 높고 용맹스러운 이들이었고, 나가들이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대체할 수 없는 전력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레아스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무사히 9층으로 향할 수 있었지만, 다른 귀족들에게까지 그와 같은 행운이 찾아오리란 법은 없었다.
그리고 김진우는 10층에 살아남은 귀족들을 찾기 위해 지저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