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86)
던전 견문록-186화(186/319)
# 186
던전 견문록
제 187 화
지저 10층은 완전 생지옥이었다. 지천에 널린 것이 파괴된 미궁이요, 갈기갈기 찢겨진 소환수들의 사체뿐이었으니, 이미 10층은 모아이들에게 점령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토굴마다 모아이들이 없는 곳이 없었고, 전투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런 난리통이었지만 김진우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모아이들은 마치 그가 보이지 않는 듯 행동했고, 간혹 가다가 그와 눈이 마주 칠 때면 겁에 질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멀어지려 용을 써댔다.
“쯧.”
가뜩이나 흉악하게 생긴 모아이들이 겁에 질려 난리를 피워대는 모습은 절대로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모아이들의 무리를 헤쳐 나갔다.
“설마, 너무 늦은 건가.”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파괴된 미궁의 잔해들뿐, 멀쩡한 미궁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니 10층이 이미 멸망한 것은 아닌가 하고 슬슬 우려가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으니, 10층을 헤매기 시작한 지 거의 일주일 만에 미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억지로 잡아 뜯은 듯, 떨어져 나간 게이트와 부서져 버린 통로의 모습은 여느 10층의 미궁과 똑같이 엉망진창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이미 모아이들이 쓸고 지나간 폐허의 잔해라고 해도 믿어질 광경이었으나 그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미궁은 분명 살아 있었다.
“음.”
어렴풋이 느껴지는 미궁의 생명력에 김진우는 기뻐하기는커녕 도리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의 생명력이라면 자신뿐이 아니라 모아이들에게도 진즉에 발견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미궁의 근방에는 그 어떤 생명체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침묵이 내려앉은 미궁의 모습이 부자연스러웠다. 그 껄끄러운 위화감에 그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수도 없이 사선을 넘나들었던 전사의 본능이 그를 멈춰 세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미궁의 잔해는 보이는데 정작 미궁을 그렇게 만든 당사자들의 시체가 보이지를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확신했다.
이곳엔 그 맹목적인 모아이들조차 꺼려 할 정도로 위험한 함정이 깔려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먹음직스러운 미궁을 두고 모아이들이 얼씬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기생마가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위험도 없어 보이는 광경이지만, 저 평온한 어둠 너머에는 무시무시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한 발 늦게 기생마가 위험을 알려왔다. 고작 열 걸음이나 될까. 적막한 통로가 온통 새빨갛게 번쩍거렸다.
보기만 해도 아찔해지는 그 현란한 붉은 빛에 김진우는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났다.
[존재마저도 집어삼키는 끔찍한 괴수, 개미귀신의 사냥터를 발견했습니다. 이 크고 탐욕스러운 괴수는 심층의 고위 귀족들조차 상대하기 꺼릴 정도로 까다로운 상대입니다.] [12층에서나 간간히 발견되는 이 거대한 괴수가 왜 이곳에 있는지 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개미귀신은 절대로 일개 남작이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변변찮은 괴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아무래도 먹이를 찾아 떠돌던 괴물이 운 나쁘게도 미궁의 근처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미궁이 모아이들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 괴수는 그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반쯤 실신한 모아이 하나가 잡혀 있었다.
키에에엑.
인근에서 잡아온 모아이는 저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갑작스레 온몸을 버둥거리며 난리를 피워댔다.
김진우는 모아이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냅다 어둠을 향해 내던졌다.
“껙!”
볼썽사납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모아이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헤매다가 이내 사태를 파악하고는 난리를 피워댔다.
모아이는 이미 부러져 버린 다리를 보기 흉하게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개미귀신의 사냥터를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쏴아아악!
가만히 모아이를 지켜보고 있던 김진우는 갑작스레 들려온 모래 쓸리는 소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좁지도 넓지도 않는 통로를 따라 바닥에 가느다란 틈이 생겨났다. 균열을 따라 단단해 보이던 바닥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틈이 점점 넓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길게 이어진 통로 전체가 거대한 균열이 되었고 비명을 질러대던 모아이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모아이가 비명과 함께 추락하던 그 순간, 갈라진 틈을 비집고 나온 날카로운 돌기를 보았다.
불규칙하게 돋아난 돌기는 마치 무언가의 이빨이라도 되는 양 모아이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이내 꿀떡 삼켜버렸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김진우는 깨달았다.
개미귀신은 지저 그 자체였다. 기다란 통로 전체가 거대한 괴수의 아가리였고, 사냥터였다.
누구든 저 무른 대지를 밟는 순간 개미귀신의 목구멍 속으로 처박히고 말 것이다.
어지간한 이들이었다면 괴수의 실체를 본 것만으로도 기가 질려 발길을 돌리고 말았으리라. 실제로도 수많은 모아이들이 이 먹음직스러운 미궁을 두고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궁의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그는 어지간한 이가 아니었다. 상대는 9층의 정복자이자 전승의 사령관, 그리고 하이로드였다.
그리고 그는 개미귀신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야수를 알고 있었다.
수천의 폭도들을 먹어치운 끔찍한 괴물이자 제 주인마저 집어삼키려던 악의 덩어리, 대미궁의 식탐을 몇 번이나 보아온 그는 개미귀신의 식사 장면 따위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성가시긴 하군.”
그렇다고 해서 개미귀신의 사냥터를 뚫고 미궁에 도달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단한 듯 보이지만 무르기만 한 통로의 바닥은 그 자체로 괴수의 아가리요 입술이었다.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 이 거대한 함정을 통과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다른 곳으로 가야 할까.
순간적인 망설임,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는 이내 고개를 세차게 털어냈다. 이곳을 발견하기까지 무려 일주일이란 시간을 허비했다.
이제 와서 발걸음을 돌린다면 귀한 시간을 낭비한 꼴이 되고 만다.
그는 고민 끝에 개미귀신이 만들어낸 지옥을 강제로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모아이들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
“꺄아아아아아악!”
듣기 거북한 비명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모아이가 괴수의 아가리 속으로 처박혔다. 김진우는 그렇게 사라진 모아이를 눈으로 쫓으며 거리를 가늠했다.
“어지간히도 크구만.”
대미궁에도 수문장이 있었다. 중심부를 지키는 거대한 수룡이 바로 대미궁의 문지기였다. 하지만 그런 수룡조차도 개미귀신만큼 거대하지는 않았다.
거의 200미터에 달하는 통로 전체가 괴수의 본체였고 또 사냥터였다.
“끄으으으.”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모아이들의 신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눈에 사지가 부러진 채 바닥에서 버르적거리는 모아이 수십이 보였다. 모아이들은 하나 같이 겁에 질려 있었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바라보다 시선을 옮겼다.
“대충 크기는 알겠군.”
그가 딛고 선 바닥, 그 바로 앞부터 미궁에 이르기까지의 영역이 모두 개미귀신의 본체였다.
“켁켁.”
마치 자신들의 쓰임새가 끝이 나지 않았냐고 묻는 것처럼 애처롭게 울어대는 모아이들의 얼굴에 섣부른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그들을 바라보다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크기를 알았으니 이제 깊이를 알아야겠지?”
모아이들이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을 미끼삼아 괴수의 습성을 파악하기를 한참, 김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성이 좋지 않았다. 어지간한 괴수라면 단번에 무릎을 꿇리련만, 개미귀신의 덩치가 워낙에 크니 변변한 타격을 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힘껏 칼을 내질러봐야 거대한 괴수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작은 생채기에 불과할 테니까.
괴수를 무시하고 벽이나 천장을 타고 지나가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기생마를 통해 바라본 통로는 바닥 뿐 아니라 벽과 천장마저도 붉게 빛나고 있었다. 날개가 있다고 해도 이곳을 지나가는 것은 쉽지 않을 듯했다.
“후우.”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가 마침내 고민이 끝났는지 어둠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사냥감을 찾아 10층까지 올라왔을 정도로 굶주렸다면, 내가 그대의 배를 채워주마.”
그리 말한 그는 잠시 사라졌다가 헤아릴 수 없는 모아이 떼를 앞세우고 다시 나타났다.
모아이들은 무언가에 쫓기듯 겁에 질려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괴수의 사냥터로 내몰리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궁지에 몰린 모아이들은 마치 늑대에게 내몰린 양들이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지듯 개미귀신의 아가리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그작, 아그작.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모아이들이 산채로 찢겨져 나가고, 괴수의 한 끼 식사거리가 되었다.
피우우우우.
한참이나 모아이들을 씹어대던 개미귀신은 때 아닌 만찬에 마음껏 배를 채우고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기이한 소리로 울어댔다.
“아직 많이 남았다. 이놈아.”
김진우는 그릇 속으로 시리얼을 쏟아 붓듯 계속해서 모아이들을 개미귀신의 입으로 처넣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지만 하이로드의 존재감을 숨김없이 개방한 그의 기세를 못이기고 연신 뒷걸음질 치다 괴수의 뱃속으로 굴러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괴수는 거대한 위장을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의 포식을 하고도 계속해서 식사를 이어가야 했다.
“더!”
사냥감이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왔다. 이쯤 되자 괴수는 슬슬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포만감 대신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울어댔다.
하지만 김진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모아이들을 내몰았다.
마침내 괴수가 탈이 났는지 집어삼켰던 모아이들을 도로 내뱉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고깃덩이가 된 모아이들이 통로 위로 내뱉어졌다.
푸우우우우우우!
괴수는 음식물을 토해내는 것으론 부족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계속해서 바람 빠지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어쩌면 괴물은 단순 과식으로 탈이 난 것이 아니라 씹지도 않고 집어삼킨 모아이들에 의해 내장이 상했을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무심한 눈길로 자신이 만들어낸 지옥도를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몰이 할 모아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이로드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비명을 질러대던 개미귀신도 그가 지나갈 때만큼은 숨을 죽이고 입을 다물었다.
“기다리고 있거라.”
마침내 통로 끝에 도달한 김진우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난 아직 그대에게 볼 일이 남아 있으니.”
그가 괴수 하나를 제치고 가는데 필요 이상으로 공을 들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인장도 인장이지만, 수백의 모아이를 집어 삼키는 괴수라니, 탐욕스러운 대미궁에 제법 잘 어울리는 놈이 아닌가.
그의 눈가에 언뜻 광적일 정도의 소유욕이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