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87)
던전 견문록-187화(187/319)
# 187
던전 견문록
제 188 화
미궁은 죽은 듯이 잠잠했다. 영역에 침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흔한 소환수 하나 나타나지 않았고, 그 어디에서도 살아 있는 미궁 핵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김진우는 텅 빈 미궁을 돌고 돌아 오너 룸에 도달했다.
“누군가.”
쾨쾨하게 먼지 내려앉은 왕좌, 빛바랜 핵의 음울한 조명에 짙게 그려진 어둠 속에서 노곤한 음성이 말을 걸어왔다.
“불쾌한 악취가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오염된 지저의 사생아들은 아니구만.”
비늘 푸른 도마뱀과 인간을 반반 합쳐 놓는 듯한 모습의 이름 모를 미궁의 주인은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비늘에 뭉툭해진 발톱, 그리고 몇 남지 않은 이빨마저 둔탁해 보이기만 했다.
게다가 시력마저 잃었는지 혼탁한 눈동자는 좀처럼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음.”
한때는 타락하여 향락에 빠져 살았던 10층 남작의 영락한 모습은 김진우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군. 그래도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다행이오. 나도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었거든.”
멋대로 그의 정체를 오해한 이름 모를 미궁의 주인은 주절주절 넋두리를 해댔다.
“보다시피 내 미궁은 소멸되기 직전이요. 다운 잼은 진즉에 소진했고, 남은 것이라고는 핵 정도라오.”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던 김진우는 성큼성큼 쇠약해진 미궁의 주인에게 다가섰다.
스르릉, 하고 빠져나온 칼날이 지독한 예기를 뿌려댔지만 시력을 잃은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그런데 이런 내가 당신들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소.”
자괴감이 가득한 음성에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인장을 찾아 칼을 겨누었다.
“하기야, 예전부터 블랙 머천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김진우가 막 내지르려던 손을 멈춰 세웠다.
“그래도 그대들이 있어서 다행이오. 주인께서도 나를 버린 지금, 기댈 곳이라곤 그대들뿐이니까.”
“블랙 머천트와 거래하기로 했었나.”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느긋하게 앉아 주절거리던 미궁의 주인은 순간적으로 멍한 얼굴을 해보였다가 이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11층에서 오신 분이요?”
이번에도 그의 정체를 단단히 오해한 모양인지, 상대는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묻는 말에나 대답하시지.”
김진우는 아예 작정하고 상대의 오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한껏 목소리를 깔았다.
마치 배신자라도 대하듯 경멸과 분노가 담긴 음성에 상대는 제대로 속아 넘어갔는지 겁에 질려 변명하듯 말했다.
“나, 나는 단지 이 끔찍한 전쟁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요. 추호도 주인을 배신하고 블랙 머천트에 붙을 생각은 없었소. 정말이요, 내 말을 믿어주시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질문에 대답하라.”
몇 번이나 심층 백작들의 사자를 만나보았던 김진우다. 그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권위적인지, 그래서 10층의 귀족들이 그들을 얼마나 꺼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음 놓고 상대를 몰아붙였다.
역시나 겁에 질린 상대는 감히 반박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변명을 꺼내 주워섬겼다.
“블랙 머천트가 먼저 제안을 해왔소. 자신들에게 협조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고.”
진실의 눈이 발동되었지만, 상대가 격 높은 귀족이라 그런 것인지 그도 아니면 죽음에 임박해 혼탁해진 사고가 장막을 친 것인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겁에 질린 상대의 상태뿐이었다.
“그들이 찾아온 게 언제였지?”
블랙 머천트가 지저에서 모습을 감춘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런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김진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두, 두 달 전쯤일 거요. 끔찍한 놈들과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블랙 머천트의 사자를 자처하는 자가 찾아왔소.”
두 달 전이라면 그가 하이로드의 힘을 각성하고 대미궁이 태어났을 때였다.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간 보여왔던 블랙 머천트의 행사가 워낙에 감춰진 것이 많아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그들이 무엇을 협조하라고 한 건지, 또 어떤 식으로 그대를 돕겠다 말했는지. 소상하게 이야기해 봐. 답변 여부에 따라 그분께 이 일을 보고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자신이 진짜 11층의 사자라도 되는 양 적당히 협박과 회유를 섞어 말한 그는 상대방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절대로 주인께 폐가 되는 짓은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소. 그들이 원했던 것은 단지.”
그의 회유에 활로라도 발견한 것인지 미궁의 주인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이 남작의 인장이었을 뿐이요.”
***
‘블랙 머천트 놈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조금이라도 힘을 키우기 위해 인장 수집에 나섰다가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린 꼴이라 김진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요. 그대의 말대로 내가 아는 사실은 전부 말했소.”
그 편치 않은 심기를 용케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감지해낸 상대, 카르카로스 남작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김진우는 그의 필사적인 애원에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포탈을 열었다.
“왕이시여!”
포탈이 열리기가 무섭게 저 너머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던 영웅급 소환수들이 뛰쳐나왔다.
“적당한 곳에 가둬두고 감시하라. 가급적이면 미몽의 여왕과는 마주치지 않는 게 좋으리라.”
황폐한 오너 룸을 둘러보던 소환수들이 이내 카르카로스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자는…….”
“지금은 저리 쇠약해졌어도, ‘철갑’이란 이름을 지닌 귀족이다.”
그의 말에 헤임달이 나서서 카르카로스를 이끌었다.
“약속이 틀리지 않소! 분명 사실대로 말하면 그분께 고하지 않겠다고!”
우악스러운 새벽닭의 손길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카르카로스를 보며 김진우가 말했다.
“약속은 지킨다. 나는 그쪽의 주인에게 블랙 머천트와의 거래를 말할 생각이 없어.”
그의 말투에서 이상을 느낀 것인지, 쇠약해진 육신으로 버티고 섰던 카르카로스가 얼빠진 얼굴을 해보였다.
“서, 설마…….”
“맞아. 나는 그쪽 주인이 보낸 사자가 아니야. 아니, 애초에 그쪽 주인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가엾은 남작이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 하마터면 깜박할 뻔했군.”
김진우는 그렇게 망연자실한 카르카로스에게 다가가 손가락에 끼고 있던 인장을 벗겨냈다.
“내 볼일은 이쪽에 있었거든.”
인장을 강탈당한 철갑의 도마뱀은 이내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헤임달의 손에 이끌려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도미니크.”
포탈 너머에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지켜보고 있던 도미니크가 그의 부름에 곧장 달려왔다.
“블랙 머천트가 돌아왔다.”
그녀 역시 갑작스러운 블랙 머천트의 잠적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 터라, 깜짝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그들이 왜 이 시점에서…….”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왜 갑자기 사라졌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김진우는 손에 끼워진 카르카로스의 인장이 기존의 인장과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카르카로스는 말했다. 블랙 머천트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10층의 귀족들을 회유하고 있고, 이미 수많은 귀족들이 이 끔찍한 전쟁을 피해 블랙 머천트의 편에 섰다고 말했다.
“10층을 휘젓다 보면 그들의 목적이 드러날 거라는 거지.”
***
포탈이 닫히기까지는 24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 사이에 카르카로스의 미궁을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털어먹은 김진우는 슬슬 미궁 밖으로 향했다.
“휘유, 진짜 개미귀신이군요.”
포탈이 닫히기 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던지라 발자크를 비롯한 몇몇 영웅급 소환수들이 핵을 축출당한 미궁에 남았다.
“본 적이 있나?”
“봤다 뿐이겠습니까. 11층에서 놈과 싸워보기까지 했었는데요.”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닌지 진절머리를 치는 발자크를 보며 김진우가 물었다.
“저놈을 사로잡을 방법은 없나?”
“죽이기도 힘든 놈을 사로잡을 방법이라니. 설마…….”
뒤늦게 그의 의도를 파악한 것인지 발자크가 기겁했다.
“불가능합니다! 놈은 길들일 수 있는 그저 그런 괴수가 아닙니다! 아나톨리우스조차도 저 끔찍한 괴물이 나타나면 당장 근방의 미궁을 옮길 생각부터 했을 정돈데, 무슨 수로 저놈을 길들입니까!”
발자크의 만류에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싸워본 경험이 있다면서.”
“그거야 본거지 바로 앞에 자리 잡은 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싸웠던 거지 싸우고 싶어서 싸운 게 아닙니다. 그리고 애초에 이기지도 못했습니다.”
단순무식한 발자크가 저리 난리를 피울 정도면 개미귀신이 끔찍하긴 끔찍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발자크의 말이 이어질수록 더욱 더 개미귀신이 탐이 났다.
“저놈은 내버려두면 미궁까지 집어삼킬 놈입니다. 그런 위험한 놈을 길들이겠다니…….”
“더욱 마음에 드는군.”
“그게 무슨 말씀…….”
발자크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며 그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전투밖에 없는 발자크가 변덕스러운 주인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차피 9층에는 이놈이 먹어치울 미궁 따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미궁이 왜 없…….”
“발자크.”
김진우가 나직하게 발자크의 이름을 불렀다.
“왕이시여.”
혹시라도 자신이 주제넘었던 것은 아닌지 찔끔 놀란 발자크가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말해보라.”
김진우가 개미귀신이 웅크리고 있는 통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개미귀신과 대미궁, 둘 중 어느 쪽이 더 포악할까.”
그제서야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또 자신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들던 대미궁이 얼마나 끔찍한 괴물인지를 떠올린 발자크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당장 탐이 난다고 해서 저 처치곤란의 괴수를 길들일 방법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김진우, 기다란 통로가 어쩐지 몸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
김진우는 계속해서 10층을 수색했다. 여전히 멀쩡한 미궁을 찾는 것은 어려웠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찾은 대부분의 미궁들은 이미 블랙 머천트의 사자가 다녀간 것인지 이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진우는 그들을 상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죄다 챙겼다.
그들은 정보는 정보대로 미궁은 미궁대로 빼앗기고 인장마저 강탈당한 채 대미궁에 유배되거나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쯧, 어지간히도 비밀스러운 놈들이야.”
큰 기대를 했던 진실의 눈은 귀족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진실의 눈이 제 역할을 하는 데는 그가 모르는 제약이 있는 듯했다. 덕분에 이렇다 할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계속해서 수색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10층을 헤매고 다니는 김진우의 뒤를 쫓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는 이내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나와라.”
그의 말에 미행자가 머뭇거리다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