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88)
던전 견문록-188화(188/319)
# 188
던전 견문록
제 189 화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눌어붙은 피부에 온전하지 못한 사지, 미행자의 정체는 모아이였다.
“호오.”
그간 자신과 마주칠 때면 자지러질 듯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바쁘던 모아이들이었던지라, 그는 생각지 못했던 미행자의 정체에 짙은 호기심을 느꼈다.
생김새는 여느 모아이가 다 그렇듯 기괴하기만 했다. 원형을 알아볼래야 알아볼 수 없는 흉측한 피부, 비틀린 부리와 몇 남지 않은 깃털만이 모아이가 원래 새의 모습을 한 크리쳐가 아닐까 짐작될 뿐이었다.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군.”
그의 말마따나 모아이는 도망치기는커녕 제 스스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움. 환희.
워낙에 엉망진창으로 사고가 비틀린 모아이기에 진실의 눈을 통해 들여다 본 것은 그저 감정의 편린일 뿐,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김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아이 특유의 끈적끈적한 악의는 지울 수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그보다 더 깊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꾸우우.”
모아이는 그렇게 기이한 소리로 울어댔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저리 구슬피 우는 것인지 호기심이 절로 일었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블랙 머천트가 먼저 손을 쓴 탓인지, 그도 아니면 타락한 귀족들이 1년간의 전쟁을 견디지 못해 멸망한 것인지 10층 귀족들의 씨가 말랐다.
그 바람에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인장의 수집이 한참은 더뎠다.
별 영양가도 없는 모아이에게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운이 좋았다. 살려주도록 하지.”
마치 엎드려 경배라도 하듯 납작 몸을 낮춘 모아이를 바라보던 그가 옅은 호기심을 거두어들이고 제 갈 길을 서둘렀다.
모아이는 잠시 그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가 이내 비척거리며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두 개의 인장을 더 수집하는 것을 끝으로, 10층에 잔존한 미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미 이주가 끝난 것인지 벌써 멸망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이상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김진우는 아쉬움을 달래며 발걸음을 돌렸다.
“음?”
그런데 이제껏 앞만 보고 달리느라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기척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끄으으으.”
노골적이고 음습한 악의는 굳이 확인해볼 것도 없는 모아이들의 것이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칼을 뽑아 들었다. 이제까지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던 지저의 망령들이 왜 이제 와서 돌변했는지 의아했지만, 생각은 길지 않았다.
그깟 모아이들 그대로 분쇄해 버리면 그만이다.
푸른 안광이 줄기줄기 새어 나오며 그의 기세가 돌변했다.
“끄이이익!”
그의 기세가 사납게 변하자 모아이 하나가 다가와 납작 엎드렸다.
“너는?”
비틀린 부리와 몇 남지 않은 깃털이 낯익어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뒤늦게 일전에 자신의 뒤를 따르던 망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모아이를 알아보고 기세를 누그러트리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모아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렇게 나타난 모아이들은 하나같이 엎드려 극도의 공경을 보이고 있었다.
“이건 대체…….”
-환희, 환희, 환희.
온 통로에 가득한 환희의 물결, 지금만큼 진실의 눈이 그를 뒤흔든 적은 없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그 맹목적인 환희와 그리움에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는 온몸의 기세를 일으켜 자신을 덮쳐오는 사념을 단 번에 털어냈다.
완전히 각성한 하이로드의 기운이 모아이들의 광기를 집어삼켰다.
“끼에에엑!”
“크이이익!”
그런데 겁에 질려 달아났어야 할 모아이들이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미쳐 날뛰어댔다.
“설마…….”
상황이 이쯤 되니 김진우도 이상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언젠가 하이로드에 올라 모리건에게 진짜 주인으로 인정받았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환청처럼 떠올랐다.
“언젠가 저와 같은 자들이 옛 주인의 향기를 따라 주인님께 찾아올 겁니다.”
김진우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며 광신도들처럼 미쳐 날뛰는 모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설마, 너희들 전부가 옛 군주의 후예들인가.”
미친 듯이 날뛰어대던 모아이들이 그 한마디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그들은 만세하듯 뻗어 올린 양손을 미처 내리지도 못한 채 기대에 찬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맞군.”
확신에 찬 한마디, 믿을 수 없게도 모아이들의 탁한 눈동자에서 고름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회, 고통, 환희
여전히 일관되지 않은 엉망진창의 사념, 하지만 김진우는 이미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후였던지라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미궁의 주인마저 오염되어 지저를 헤매게 된 마당에 고대 영웅이라고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기다린 그들은 마침내 옛 주인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들은 지저의 악의에 집어삼켜져 토굴을 떠도는 망령이 되고 말았으리라.
그 간단한 사실을 이제야 겨우 알아차린 그가 안타까움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엾고 또 가엾구나.”
한때는 위대한 군주 아래서 지저가 좁다 날뛰어댔을 영웅들이 흉악한 망령이 되어 서럽게 우는 모습은 실로 비참했다.
어쩌면 그들 중 대다수는 사고마저 마비되어 그저 제 몸에 각인된 주인의 향수에 반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들의 혼탁한 눈동자에는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의를 지우고 본능을 억눌러 온순하게 그에게 경배하고 있었다.
그 비참하고도 장대한 광경에 김진우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모아이들이 조금씩 다시 고개를 쳐드는 악의에 괴로워할 때 즈음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따라 수백의 모아이들이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어떠한 말도 나누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마치 약속된 땅을 쫓는 신의 백성들처럼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
대미궁의 주인은 거의 두 달을 채우고서야 겨우 귀환했다.
이제나 저제나 주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소환수들이 그의 귀환을 느끼고 대미궁의 경계에 서 그를 기다렸다.
“오오! 주인께서 돌아오셨다!”
수많은 모아이의 무리를 헤치고 나타난 그들의 주인은 전보다 한층 더 위풍당당했다.
격 높은 존재감은 감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고,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절대자의 기운은 절로 헌신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위엄 앞에서, 소환수들이 제일 먼저 보인 행동은 경배와 칭송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저, 저, 저!”
그들은 마치 주인을 따르듯 조용히 왕을 좇는 수백의 모아이를 보고는 기함을 토해내고 말았다.
“주인님…….”
언제나 침착한 도미니크마저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꿈벅대며 주인의 설명을 기다렸다.
“오다 주웠다.”
그리고 그녀의 군주는 언제나처럼 설명이랄 것도 없는 짤막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
대미궁에 돌아온 김진우는 곧장 발리셔스를 찾았다.
“왕이시여.”
한참 모아이의 시체를 두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던 발리셔스는 제 주인을 발견하고는 곧장 엎드려 경배를 표했다.
“아아,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계속하도록.”
그 말에 발리셔스는 발딱 일어나 다시 하던 일에 몰두했다.
“끙.”
나가 마법사의 몸에 들어가더니 하는 짓도 딱 똑같았다. 신경 쓰지 말란다고 정말로 없는 사람 취급하는 발리셔스의 모습에 그가 헛기침하며 말을 걸었다.
“모아이의 원형을 복구하는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발리셔스는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입을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모아이의 사체를 이리저리 헤집는 손놀림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아무래도 모아이들의 몸은 그릇 자체에 금이 간 꼴이라 완전히 복구하려면 이런 시체로는 끝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든 마지막 단계에서 육신이 붕괴되어 원래의 꼬락서니로 돌아오니, 지지부진하고 있습죠. 자, 여기 한 번 보시겠습니까?”
발리셔스의 손에 이끌려 일으켜진 시체는 공방에 널린 시체들 중에서도 제법 멀쩡한 외관을 하고 있는 놈이었다.
“이놈이 거의 복원 완료 단계에 있는 놈인데, 보시다시피 아직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이놈을 완전히 복구하려면 이렇게 다운 잼을 심장 대신 박아주고, 활성화시키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의 복원이 끝나가던 사체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며 흉측한 모아이가 되었다.
“이렇게 됩니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으스대는 그를 보며 김진우가 물었다.
“방법은 찾을 수 있겠나?”
“찾을 수야 있겠지만 당장은 어렵습니다. 표본도 부족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놈으로 실험해 봐야 하는데.”
“살아 있는 모아이가 필요하다면 내가 조치하도록 하지.”
“살아 있는 모아이야 미궁 밖에만 나가도 발에 걷어채입니다. 문제는 살아 있는 놈을 어떻게 이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느냐는 것이죠.”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지.
그가 눈짓으로 설명을 재촉하니, 발리셔스가 푸념했다.
“어떻게 된 게 살아 있는 모아이도 미궁 안으로 데려오면 죄다 죽어 나가니, 당최 실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미궁 밖에 나가서 실험을 하자니, 그것도 여의치 않고. 덕분에 지금 달리 방법을 찾고 있긴 한데, 영 성과가 나지를 않으니 저도 죽겠습니다.”
아무래도 대미궁은 모아이를 먹이로 완전히 인식한 모양이었다. 발리셔스는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살아 있는 상태로 실험체를 반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했다.
“흠.”
하기야 김진우 자신도 그 사실을 우려했던 탓에 10층에서 거두어들인 모아이 무리를 대미궁에 들이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해도 그는 대미궁이 군침을 삼키며 모아이 무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방법을 찾아봐야겠군.”
“그런데 웬일로 제 연구에 관심을 가져주십니까?”
나가 마법사들의 연구라면 질색을 하던 자신의 주인이 관심을 두자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발리셔스의 질문에 김진우가 정색하며 물었다.
“근데 매번 실험할 때마다 이렇게 다운 잼을 소모하는 건가?”
“일단은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기까지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뻔뻔하게 지껄여대는 발리셔스의 모습을 보며 그가 쓰게 웃었다.
발리셔스의 모습 뒤로 핵을 합성한답시고 난리를 피워대던 나가 마법사의 모습이 스쳐갔다.
알맹이가 바뀌었어도 결국 하는 행동은 똑같으니, 그게 나가 마법사의 육신에 발리셔스가 지배를 받은 탓인지, 그도 아니면 애초에 발리셔스 역시 마법사들과 같은 종자였던 탓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이 미치광이의 연구가 필요했다.
10층에서 거두어들인 모아이가 수백, 비록 지금은 망가지고 오염되었지만 그들은 한때 지저를 누비던 고대의 영웅들이었다.
그들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할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나가들이 더 이상 아쉽지 않으리라.
“도미니크를 붙여줄 테니 그녀와 궁리해보라. 그녀라면 반드시 방법을 찾아줄 것이다.”
그렇게 발리셔스에게 당부를 남긴 김진우는 오너 룸을 찾았다. 그의 손에는 일정을 서두르다 보니 미처 흡수하지 못한 여덟 개의 인장이 들려 있었다.
“어디 한 번 먹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