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89)
던전 견문록-189화(189/319)
# 189
던전 견문록
제 190 화
[한때 지저를 다스리던 하이로드들의 힘은 잘게 쪼개지고 흩어져 귀족의 인장이 되었습니다.] [흩어진 파편 중에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남작의 인장이지만, 이렇게 한데 모이니 제법 커다란 힘이 느껴집니다.] [남작의 인장을 하나로 합치시겠습니까?]“합치겠다.”
김진우는 왕좌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남작의 인장들이 빛무리에 휩싸였다.
[새로운 인장들이 기존의 인장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귀족의 인장이 품고 있던 옛 권능의 파편이 온전하게 흡수되었습니다.] [육체의 강도가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오감이 더욱 예민해졌습니다. 전보다 더 멀리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신력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대미궁의 잠식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게 되었습니다.]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단박에 변화를 알아차릴 정도로 큰 발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어느 무엇보다도 대미궁의 잠식으로부터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열 개 이상의 인장이 합쳐져, 새로운 인장의 생성에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졌습니다.] [당신만의 고유 인장을 생성하시겠습니까?]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지만, 어차피 그 스스로가 옛 권능과 하이로드에 대해 아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인장을 생성하겠노라 대답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나로 합쳐진 인장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탐욕의 인장이 생성되었습니다.] [탐욕의 인장은 이전에도 지저에 없었고 앞으로도 지저에 다시없을 새로운 힘의 근원입니다.] [탐욕의 인장은 대미궁을 열고 닫는 열쇠이자, 새로운 하이로드의 권능의 근간입니다.]동그랗게 몸을 말아 웅크린 뱀, 쩍 벌린 주둥이에는 제 꼬리가 물려 있다. 그 기괴하면서도 섬뜩한 문양이 인장에 새겨졌다.
[대미궁과 고유 인장, 새로운 군주의 탄생에 필요한 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 [새로운 군주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부여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외눈박이 군주의 이름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지저의 신비는 한 명의 하이로드가 하나 이상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당신은 두 개의 이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겠지만, 공교롭게도 당신에게 부여될 이름은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는 자, 끊임없이 원하고 갈망하고 탐하는 자의 것, 지저의 신비조차도 당신의 갈망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훔치고 강탈하고, 끝내는 세상마저도 집어삼킬 폭군, 당신의 진명은 탐욕입니다.] [끊임없이 원하고 탐하는 당신, 적의 모든 것을 빼앗고도 만족을 모르는 당신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습니다.]탐욕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대기 시작했다. 마치 외눈박이 군주, 보탄의 진명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그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새롭게 탄생한 군주의 원천은 텅 비어 있습니다.] [강대한 군주의 원천을 채우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파편을 모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남작의 인장은 더 이상 당신에게 큰 힘이 될 수 없습니다. 탐욕의 이름에 걸맞는 힘을 갖추기 위해 백작 인장 이상의 파편이 필요합니다.]당장에라도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은 아찔함, 혈관을 타고 흐르는 무지막지한 활력에 온몸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크윽.”
잇새를 비집고 나온 신음, 왕좌에 앉은 육체가 서서히 기울었다.
[탐욕의 권능, 탐식을 얻었습니다.] [당신에게 패배한 적은 모든 생명의 원천을 강탈당하고, 존재의 근원마저 잃게 됩니다.]흐릿해진 시선 너머로 마지막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탐욕의 군주가 탄생했다는 소식이 온 지저에 널리 퍼져 나갑니다. 이 놀라운 소식은 어쩌면 지저 가장 깊은 곳까지 닿을지도 모릅니다.]“이런 망할…….”
달갑지 않은 메시지에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은 그는 기어코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
김진우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반겨준 것은 음습한 대미궁의 악의였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키는 그 섬뜩한 파장에 저항하며 그는 잘 뜨이지 않는 눈을 껌벅여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오래 흐른 것은 아닌지 별다른 소란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왕좌에 홀로 앉아 있었고, 대미궁은 조용했다.
“음…….”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정신이 들자 대미궁의 악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마도 의식을 잃은 그를 노리고 침식해오다 그가 깨어나자 슬그머니 물러난 모양이었다.
남작의 인장을 흡수하며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는 게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휴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길게 한숨을 토해낸 김진우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탐욕의 군주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얻었지만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탐욕의 군주라…….”
수천의 폭도들을 집어삼킨 대미궁의 진명과 같다.
하필이면 왜 자신에게 탐욕이란 이름이 자꾸만 들러붙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쁘지 않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해하지는 못할지언정 자신의 새로운 이름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자신이 걸어야 할 길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거란 생각에 저도 모르게 키득대며 웃고 말았다.
하지만 탐욕이란 이름이 잘 어울리는 것은 그 하나뿐이 아니었으니, 그가 다스리는 대미궁 역시 탐욕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고오오오오.
바람이 불었다.
“설마.”
특별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그저 바람 소리에 불과한 소음,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 대미궁의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네놈, 인장을 원하는 게로구나.”
다시 바람이 분다. 마치 여인이 교태를 부리듯 높고 간드러지는 바람소리가 그에게 속삭였다.
“흠.”
열 개의 인장이 모여 탐욕의 인장이 되었고, 두 개가 남았다. 그리고 대미궁은 그가 채 흡수하지 못한 두 개의 인장을 원하고 있었다.
히이이이이.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이번에는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처럼 가늘고 불규칙한 소리였다.
“이걸 어떻게 한다.”
김진우는 손에 쥔 두 개의 인장을 까딱거리며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느껴진다, 대미궁이 군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어차피 쓸 곳도 없지만, 네놈을 주기에는 아깝단 말이지.”
애가 닳았는지 다시 울어대는 대미궁. 제단을 힐끗 바라본 그가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주인도 몰라보고 달려드는 개는 3일 밤낮을 굶기는 법이다.”
크아아아아아아.
인내심이 고갈된 것일까. 대미궁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날카로운 악의가 목을 조르듯 달려들었다.
예전이었다면 꼼짝없이 잠식되었을 끔찍한 악의, 하지만 더 이상 예전의 김진우가 아니었다.
그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을지언정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네놈과 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광폭한 기운이 해일처럼 일어나 대미궁이 불어일으킨 악의를 밀어냈다.
“둘 중 누가 주인인지.”
비록 완전히 대미궁의 기운을 밀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기억하라!”
그가 마치 자신을 노려보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두 개의 핵을 마주 응시하며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내가 네놈의 주인이다!”
불끈 쥔 주먹 사이로 인장이 감춰졌다. 대미궁이 비명을 질렀다. 마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울음을 터뜨린 어린아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 사실을 기억해낼 때까지, 네놈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리라.”
끼에에에에에엑!
그는 웃었고, 대미궁은 울었다.
***
결국 대미궁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 끔찍한 괴물을 무릎 꿇리기에는 남작의 인장이 지닌 가치가 모자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김진우는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시시때때로 스며드는 대미궁의 악의가 불쾌하기만 했지만, 머지않아 그 악의조차도 길을 들일 자신이 있었다.
“주인님!”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는 갑작스러운 도미니크의 호출에 벌떡 일어났다. 평소 차분한 그녀의 음성에 전에 없이 다급했던 탓이다.
“무슨 일인가!”
도미니크가 그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나가, 나가들이 돌아왔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도미니크가 재차 외쳤다.
“나가 용사들과 친위대가 돌아왔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의 시선에 어쩐지 평소보다 유독 빛을 발하는 두 개의 핵이 보였다.
“주인님! 이러실 게 아니라 직접 확인하세요!”
팔을 잡아끄는 도미니크의 재촉에 그가 오너 룸을 나섰다. 그는 오너 룸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이군.”
대미궁의 광장에 모인 수많은 나가 용사들을 보며, 김진우는 신음도 감탄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하!”
나가들은 마치 방금 헤어졌다 다시 만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반겨주었다.
“모두 해서 백스물둘. 하나도 빠짐없이 돌아왔어요.”
도미니크가 그새 나가들의 수를 헤아렸는지 또렷한 음성으로 보고해 왔다.
“투사와 사제, 마법사와 용기사들은?”
“그들은 아직… 혹시 몰라서 발자크와 퀀투스가 미궁을 둘러보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기다리기를 한참, 수탐을 마치고 돌아온 두 영웅급 소환수들은 다른 곳에서는 나가들을 찾을 수 없었노라 보고했다.
“이들이 왜 갑자기 돌아온 것일까요.”
분명 나가 용사들과 친위대의 귀환은 기뻐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찾아 헤맬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들이 갑작스레 나타난 것이 못내 의문이었던 모양인지 도미니크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얼굴을 해보였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 돌아온 건지…….”
“어쩌면…….”
의문에 찬 그녀의 질문에 김진우는 대답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다른 나가들도 곧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미니크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를 부탁한다.”
그가 짧게 당부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오너 룸이었다. 그가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평소보다 유독 밝게 빛나는 두 개의 핵이 그를 반겨주었다.
“네놈이냐?”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공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듯 물었다.
“네놈이 나가 용사들을 돌려보낸 것인지 묻고 있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대답하라. 그렇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니.”
사나운 음성에 뒤늦게 대미궁이 고오오오, 하고 울었다.
“역시 네놈 짓이었군.”
넓고 높은 오너 룸을 한 바퀴 돌 듯 느긋한 바람 소리, 그는 마치 대답이라도 들은 것처럼 확신에 찬 얼굴을 해보였다.
“지금 네놈이 나랑 거래를 하자는 것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미궁이 다시 한 번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