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90)
던전 견문록-190화(190/319)
# 190
던전 견문록
제 191 화
71. 거래.
짐작대로였다. 갑작스러운 나가 용사들의 귀환은 대미궁이 제시한 거래 조건이었다.
“네놈이 원하는 것은 필시 남작의 인장일 테지.”
갈무리했던 인장을 꺼내들자, 대미궁의 핵이 현란하게 번쩍거렸다.
“킥.”
푸르고 누런 그 섬광 속에 담긴 맹목적이고도 노골적인 갈망에 그는 기어이 웃고 말았다.
“걸작이군, 주인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미궁이라니.”
느긋한 표정으로 인장을 떨굴 듯 말 듯 까딱거리는 그의 모습에 대미궁이 안달이 나는지 기이한 소리를 내뱉었다.
“원래 대미궁이라는 족속들이 전부 그러한 것이냐.”
인장을 콱, 하고 움켜쥔 그가 껌벅거리는 핵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게 아니면, 네놈이 특이한 것이냐.”
대미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인장을 끝없이 갈망하고 갈망했을 뿐이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한참이나 대미궁을 애태우던 그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제단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거래를 받아들이겠다, 대미궁이여.”
툭, 하고 던진 인장 하나가 순식간에 빛무리에 휩싸여 사라졌다.
[옛 권능의 파편, 남작의 인장이 제단에 바쳐졌습니다.] [대미궁은 수천의 폭도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모아이를 집어삼키고도 만족을 모르는 탐욕스러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런 대미궁도 남작의 인장에 담긴 순수한 에너지에는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만도가 단숨에 최대치까지 차오르고, 당분간 하락하지 않습니다.] [권능의 파편은 하이로드와 대미궁이 사역하는 막대한 에너지의 원천이자 근간입니다. 대미궁이 남작의 인장을 흡수하여 스스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대미궁은 더욱 더 많은 권능의 파편을 원하고 있습니다.]탐욕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닌지, 대미궁은 하나의 인장을 먹어치우고도 남은 하나의 인장을 더 원하고 있었다.
더, 조금 더.
들릴 리 없는 대미궁의 음성이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그 간절하고도 맹목적인 탐욕에 그는 도리어 서늘한 얼굴로 제단에서 물러섰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대가를 지불하라.”
그의 손에 들린 인장이 번쩍거렸다.
***
나가 용사들의 귀환에 이어 속속 나가들이 귀환하기 시작했다. 일백의 나가 투사들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그에 이어 몇 되지 않는 사제와 마법사가 돌아왔다.
돌아온 나가들은 하나같이 전보다 한층 더 용맹한 모습이었다.
그저 기분 탓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이 내보이는 기세가 너무나 그럴싸해 김진우는 친히 그들을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나가들이 전보다 한층 더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용사들은 어지간한 도검으로는 상처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고, 투사들은 전보다 강인하고 사나워졌다. 사제와 마법사들이 부리는 주문 역시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보다 더욱 업그레이드된 나가들도 아직 돌아오지 않은 용기사들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었다.
“인장 두 개로는 부족하다는 뜻인가.”
대미궁은 인장에 대한 대가로 더욱 강력해진 나가들을 돌려주었지만, 미궁의 최대 전력인 용기사는 돌려주지 않았다. 그들을 되찾고 싶다면 인장을 바치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제법 귀엽게 노는군.”
김진우는 그 유치하고도 노골적인 수작에 차라리 웃고 말았다. 이제는 대미궁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미궁이 과거의 성세를 되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마도 인장 하나 정도면 대미궁은 꽁꽁 숨겨두었던 용기사들을 도로 내뱉을 것이다.
“문제는 10층에 더 이상 남아 있는 귀족이 없다는 것.”
모아이들의 공세를 버텨낼 수 있었던 귀족들은 많지 않았고, 그렇게 살아남은 귀족들마저도 블랙 머천트의 회유를 받아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그의 손에 끝을 맞았다.
사실상 10층은 멸망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된 것이 지저는 늘 원하는 것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그는 늘 생존을 위협받고 있었으며, 강자들의 음모에 맞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그가 바로 지저의 유일무이한 정복자이자 전승의 사령관, 그리고 탐욕의 군주였다.
10층에서 구할 수 없다면, 11층에서 찾으면 된다.
그렇게 되뇌는 그의 시선에 뒤꿈치를 들고 미궁을 쏘다니는 아리아네가 보였다.
***
처음 풀려났을 때, 아리아네는 정복자가 두려워 함부로 미궁을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이내 미궁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용기를 내 대미궁을 살펴보았다.
한 달이 되어도 정복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자신의 거처 인근을 도는 게 고작이었던 그녀는 조금씩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돌아가라. 이곳은 네게 허락되지 않았다.”
길을 막아선 고대 영웅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그냥 답답해서 둘러보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래도 한때 수백 몽마를 다스렸던 자신이 일개 소환수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속내였을 뿐이다.
어떻게 된 것이 이곳은 미궁의 주인부터 시작해서 소환수들까지 평범한 이가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지저의 최하층 계급이자 비천한 노예인 수인족 여인까지 11층에서도 찾기 힘든 은밀함과 집요함이 있었다.
‘조심해야 돼.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여 보인 그녀가 새벽닭을 피해 발걸음을 돌렸다. 뒤를 따라붙는 싸늘한 시선을 느끼며 그녀는 다시 대미궁을 헤매기 시작했다.
제 주인을 닮은 것인지 이 끔찍한 미궁은 철저하게 피아를 구분했다. 덕분에 방향감각도 거리 감각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쩌면 의미 없을 이 수탐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야 11층으로 돌아갔을 때 냉혹무비한 주인에게 호된 꼴을 당하지 않을 수가 있다.
아마도 이곳이 오너 룸.
그녀가 머릿속으로 그려낸 엉성한 지도에 오너 룸으로 짐작되는 곳을 새겨 넣었다.
“음?”
한참을 그렇게 대미궁을 헤매고 다니던 그녀는 저 멀리 보이는 여인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크앙.”
그런 그녀 앞으로 호인족 여인이 나타나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다.
“아아, 나는 단지. 아니, 이쪽이 아닌 모양이야.”
가장 비천한 수인족에게마저 고개를 숙여보였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다! 나의 주인께서 찾고 있던 요정 군주의 후예!’
당연히 꽁꽁 숨겨두었을 거라 생각했던 목표물, 요정 군주의 후예가 버젓이 미궁을 활보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사납게 목을 울려대는 호인족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은밀하게 눈으로 언더 엘프를 쫓았다.
“크아아악!”
그녀가 꾸물거리는 모습을 본 호인족 여인은 작정하고 길게 손톱을 뽑아 들었다.
“아, 알았어. 갈게. 간다고.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야.”
호인족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 짐승 같은 여인은 제 주인이 아니면 누구에게든지 이를 드러낸다. 함부로 비위를 상하게 했다가는 날카롭게 삐져나온 손톱에 호된 꼴을 당하고도 남는다.
아리아네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흥분과 기대감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날부터 아리아네의 수탐이 조금 더 구체적인 목표를 갖기 시작했다.
그녀는 처음 언더 엘프와 조우했던 그 통로를 가까스로 찾아내 몇 번이나 기웃거렸다.
그리고 그 결과, 마침내 기다리던 요정 군주의 후예를 다시 보게 되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야. 요정 군주의 후예가 분명하다.’
가녀린 몸에 가벼운 무장을 한 언더 엘프는 임무라도 있는 것인지, 어디론가 급히 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뒤를 쫓고 싶었지만, 아리아네는 노골적으로 변하는 감시자의 살기에 이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미적거리는 걸음을 하고도 그녀의 눈가는 전에 없이 생기로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리아네를 지켜보는 두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생각보다 소극적이군, 금방 움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주인님께 당한 것이 있으니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겠지요.”
불쑥 모습을 드러낸 남녀, 김진우와 도미니크가 혀를 찼다.
“더 기다리기 지루하다.”
“그녀를 흔들어 볼까요?”
도미니크는 뭔가 방법이 있는 모양인지, 그다지 걱정할 것도 없다는 투로 물었다.
“두 달을 주었는데도 아리아네의 조심성은 전혀 줄지 않았어. 내버려둔다면 겁 많은 그녀는 모든 게 확실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테지.”
허락이나 다름이 없는 대답, 도미니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맡겨달라 호언장담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김진우가 느긋한 얼굴로나마 몇 가지 당부를 해주었다.
“조심해라,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제 밑천을 다 보이지 않은 독한 여인이다. 방심했다가는 공들여 준비한 미끼만 빼앗기고 고기는 놓치고 만다.”
소멸의 공포 속에서 반쯤 실성했던 아리아네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끝내 속내를 완전히 털어놓지 않았다.
“그래서 주인님께서 해주셔야 하는 일이 있어요.”
그의 우려에도 도미니크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
“그대의 주인은 좀처럼 성의를 보이지 않는군. 이래서야 괜히 시간만 허비한 꼴이 아닌가.”
다시 만난 정복자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달리 표정이 험악했다. 주인과 동맹 관계라며 부드럽게 자신을 대했던 것이 마치 거짓이었던 것처럼 그는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라고 또 바라거라, 지루한 기다림이 마침내 내 인내심을 바닥내기 전에 그대의 주인이 움직이기를.”
명백한 협박,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살의는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희미해졌던 폭력의 낙인이 다시 한 번 생생하게 떠올랐고, 아리아네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납작 엎드려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대를 손님으로 대우하는 것은 그대의 주인이 제시한 거래가 제법 괜찮은 거래였던 탓이다. 거래가 무산되는 순간, 그대는 더 이상 손님이 아니다. 그때가 되면 그대의 처지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게 되리라.”
“며, 명심하겠어요.”
마치 사냥감을 내려보는 포식자처럼 말간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는 정복자를 피해, 그녀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방법을 찾아야 해. 이번에는 정말로 날 죽일 작정이야.’
요정 군주의 후예를 찾은 후로 제법 느긋해졌던 마음이 단숨에 달아오른 솥에 들어간 것처럼 펄펄 끓어올랐다.
아마도 자신의 주인도, 정복자도 쉽사리 자신의 패를 꺼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둘이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죽어나가는 것은 자신이었다. 저 냉혹한 정복자는 주인을 압박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한 점 자비도 없던 정복자의 손속을 떠올린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주인님을 만나야 해.”
한참 만에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