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91)
던전 견문록-191화(191/319)
# 191
던전 견문록
제 192 화
“고작 이 정도로 그녀가 움직일까?”
아리아네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김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른한 가운데 광폭함이 서려 있던 눈빛이 금세 풀어져 평소의 얼굴이 되었다.
“충분해요. 주인님에 대한 그녀의 공포는 거짓이 아니었어요.”
도미니크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 대답했지만, 그는 이 의미 없는 연극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회의적인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끝까지 제 임무를 포기하지 않은 아리아네가 이런 빤히 보이는 수에 넘어갈까 확신이 들지 않았던 탓이다.
“주인님.”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를 불렀다.
“주인님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내가 뭐를 모르지?”
뜬금없는 말에 김진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적을 대할 때, 얼마나 무자비한지. 또 그게 얼마나 상대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지, 주인님은 모르실 거예요.”
정복자 그리고 전승의 사령관, 이 두 가지만 해도 상대를 위압하기에 충분한 타이틀이다.
그런데 이제는 거기에 더해 외눈박이 군주 보탄의 계승자이자 탐욕의 군주라는 타이틀까지 생겨버렸다. 그런 그가 작정하고 내뿜는 살기에 버텨낼 존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그는 이미 심층의 백작 이상 가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그런가.”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대충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은 그는 자신이 10층에서 잡아온 귀족들의 상태를 물었다.
“상처가 위중한 자는 적당히 숨을 붙여 놓았고, 부상이 가벼운 자는 따로 손을 써 함부로 허튼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두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그녀가 그들을 어디에 쓸 것인지 물었다.
보레아스라면 모를까, 1년간의 전쟁으로 다시 날이 서긴 했지만, 이미 타락해버린 10층의 귀족들은 지닌 힘에 비해 너무나 쓸모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적당히 협박해서 굴릴 예정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도미니크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의 설명을 기다렸다.
“시험해 볼 것이 생겼다.”
그렇게 대꾸한 그의 얼굴에 특유의 무자비함이 떠올라 있어, 그녀는 그저 말없이 그들의 불운을 동정했을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김진우는 바로 움직였다. 그는 곧장 감금당한 귀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상태가 좋군.”
그나마 모진 꼴 당하지 않고 끌려온 카르카로스를 제외한 다른 남작들은 하나같이 중상을 입은 상태였건만 그는 뻔뻔하게 지껄여댔다.
“으으…….”
화가 날 법도 하련만 남작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그저 진절머리 한 번 냈을 뿐이다.
“흐음.”
김진우는 가만히 그런 그들을 살펴보다가 손짓했다. 대미궁과의 거래로 미궁에 복귀한 나가 사제 몇이 그의 손짓에 냉큼 달려왔다.
“그대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나가 사제들의 손에서 일어난 치유의 섬광이 쇠약해진 그들의 육신을 어루만졌다. 전보다 한층 더 강력해진 사제들의 주술은 금세 그들의 육체를 완벽하게 회복시켰다.
고통이 사라지고 육신에 기력이 돌아오자 남작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들은 이내 사제를 제외한 그 어떤 병력도 보이지 않자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선택해라.”
그가 다시 손짓하자 나가 사제들이 사라졌다.
콰지직.
천장이 내려앉고 바닥이 솟아올라 통로가 막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이 공간에 들어설 수 없도록 완벽한 밀실을 만든 것이다.
남작들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굴려대다가 이내 본색을 드러냈다.
“선택을 듣기 전에 치료를 해준 것은 네놈의 실수다.”
빳빳한 털이 온몸을 감싼 거인의 모습을 한 남작 하나가 살기를 뿜어대기 시작하자 다른 이들도 금세 동조해서 그를 둘러쌌다.
“이게 그대들의 선택인가?”
무려 다섯이나 되는 남작들이 살기등등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음에도 그는 태연했다. 그 여전한 여유에 다소 떨어진 곳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카르카로스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나는 그들과 다르오.”
카르카로스가 그리 말하자, 다른 남작들이 맹렬하게 그를 비난했다.
“완전히 겁을 집어먹으셨군.”
“하기야, 눈도 보이지 않는 퇴물이 뭘 하겠어.”
“네놈의 처지를 생각해 후에라도 지금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
순식간에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적의에도 카르카로스는 똑바로 김진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이 좋은 편이군.”
그런 그를 보며 김진우가 감탄을 했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감까지 죽은 것은 아니오.”
그들이 대화를 나누던 사이에 슬금슬금 접근한 털복숭이 거인이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크와아아앙!”
그 뒤를 이어 남작들의 공격이 쏟아져 나왔다.
덩치 큰 거인의 이점을 살려 힘으로 우악스럽게 달려드는 자, 맹수의 형태를 하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들이대는 자, 양손에 요사스러운 기운을 머금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는 자, 남작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그를 공격했다.
비록 수적인 우세를 믿고 이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어떻게 이곳에 끌려왔는지를 잊지 않았던 탓이다.
남작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내지른 공격이 바로 코앞까지 왔건만, 김진우는 위기감 하나 없는 얼굴로 카르카로스를 칭찬했다.
“그대의 감이 그대를 살렸다.”
바싹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인 그가 늘어뜨렸던 양손을 들어올렸다. 있는 듯 없는 듯 미미했던 존재감이 해일처럼 몸을 키우고, 그저 오만할 뿐이던 기세가 순식간에 사나운 맹수의 그것이 되어 남작들을 압박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해라.”
“끄아아악!”
가장 먼저 날아든 털복숭이 거인의 주먹을 잡아 그대로 박살 낸 그가 푸른 안광을 줄기줄기 흘려대며 말했다.
“어차피 그대들의 운명은 정해졌으니.”
박살이 난 주먹을 놓아주자 반대편 주먹이 날아왔다.
“발버둥 쳐야 그나마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다.”
김진우는 그 반대편 손마저 잡아 기어이 박살을 내고는 한 박자 늦게 달려든 남작들을 향해 돌아섰다.
***
“끄으으…….”
비명이 신음으로, 신음이 다시 거친 숨소리로, 그리고 그 숨소리마저 이내 완전히 사라지고 완벽한 적막이 찾아왔다.
[남작들은 오랜 타락과 전쟁으로 그 힘이 쇠락하여 과거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고, 인장마저 강탈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오랜 시간 심층에 군림해온 지배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탐욕의 권능은 그들 힘의 원천, 마지막 단말마까지 남기지 않고 섭취했습니다.] [그렇게 흡수한 생명의 원천은 당신이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포만감, 그 이상의 충족감을 주었습니다.] [탐욕의 군주의 능력이 약간이지만 성장하였습니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겁니다.] [탐욕의 권능(1등급), 포만감 17%]눈앞을 가득 메우는 메시지를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김진우는 생전 처음 느끼는 충족감과 고양감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의식이 통째로 날아가는 듯한 그 압도적인 황홀함에 그는 한참이나 몸을 떨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호오.”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온몸에 활기가 넘쳤다. 터럭만 한 찌뿌둥함도 느낄 수 없는 완벽한 컨디션에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이게 탐욕의 권능…….”
이제까지 정복자니 전승의 사령관이니 떠받들어지던 그였지만, 사실상 이렇다 할 권능은 없었다.
전투력을 제외하고 보면 사실상 10층의 남작들만도 못한 처지였던 것이다. 진실의 눈이 있다 한들 그 효력이 주변의 여건에 좌지우지되어 크게 체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탐욕의 권능은 달랐다. 적의 마지막 단말마까지 먹어치우고야 마는 이 게걸스러운 권능은 진짜 군주의 증거였다.
“마음에 들어.”
타락하여 과거의 영광도 힘도 잃고 그저 그런 미궁의 주인이 된 남작 나부랭이에 이 정도라면 11층의 진짜 귀족들을 흡수했을 때는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덜덜덜.
“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소음처럼 앙상한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린 김진우는 그제야 한켠에 웅크리고 있던 카르카로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푸른 비늘의 도마뱀은 마치 끔찍한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겁에 질려 온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카르카로스.”
김진우가 배부른 고양이처럼 나른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그대의 감은 내 생각보다 더 뛰어난 모양이구나.”
카르카로스는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 사지를 버르적거리며 경기를 일으켰다.
“말해라, 진격의 남작이여.”
이미 시력을 상실한 카르카로스가 대체 왜 저리 몸을 떠는 것인지, 그는 메마른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대체 무엇을 봤기에 그리 두려워하는 것이냐.”
카르카로스가 별안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을 떨어댔다. 걸쭉한 침을 흘리며 실성한 듯 고개를 흔들거리는 푸른 도마뱀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
캄캄한 어둠, 시력을 상실한 후로 늘 보아왔던 광경은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카로스는 그 완전한 어둠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을 느낄 수 있었다.
“끄아아악!”
오만한 남작들의 비명 소리, 그리고 이내 그마저도 사라지고 만다.
끔찍한 소음은 끝이 났지만, 그는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포식자의 노린내 나는 숨결이 여전히 코앞에 있었던 탓이다.
“으으…….”
절로 신음이 잇새를 뚫고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이 공포스러운 기세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온몸을 버르적거렸지만, 비루한 육신은 그마저도 해내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고 만다.
“카르카로스.”
그때 포악한 짐승이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대체 무엇을 봤기에 그리 두려워하는 것이냐.”
저벅, 저벅. 조금씩 가까워지는 짐승의 기척, 그리고 마침내 그의 걸음이 눈앞에서 멈췄을 때 카르카로스는 온통 어둠뿐인 세상에서 존재할 리 없는 괴물을 보았다.
마치 지저의 가장 깊은 어둠만큼이나 유달리 까만 몸을 한 거대한 괴물은 푸른 안광을 번들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당신은…….”
겁에 질려 삐져나온 비명 같은 음성에 괴물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쉿.
괴물은 기다란 손톱이 삐죽 솟은 손을 세워 자신의 입가에 세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