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92)
던전 견문록-192화(192/319)
# 192
던전 견문록
제 193 화
협박의 효과는 지대했다. 뼛속 깊이 각인된 공포를 일깨우는 데는 유치한 협박, 으름장 하나면 충분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로군.”
하지만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래도 주인님의 위엄이 제 생각 이상이었던 모양이에요.”
김진우의 말을 받는 도미니크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후우.”
결국 그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그 무거운 한숨에 꿇어앉아 있던 아리아네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녀는 여전히 두려움에 쌓여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어요.”
비록 떨리는 목소리일지언정 그 안에 담긴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에게 충성을 다 하는 수밖에 없어…….
진실의 눈 역시 그녀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 수가 없군.”
끔찍한 폭력과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도 제 밑천을 전부 털어놓지 않았던 아리아네였다.
그만큼 디나리온에 대한 그녀의 충성은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인지 그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에서 불신을 느낀 것인지, 그녀는 처음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내심을 털어놓았다.
“그저 누가 더 위대한 군주인지 깨닫게 되었을 뿐이에요.”
협박 아닌 협박을 당했던 그날, 아리아네는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포식자의 포효를 들었다.
그것이 포로로 잡힌 남작들을 집어삼킬 때 발현된 탐욕의 권능이라는 사실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기운이 누구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지독스러운 기운에 완전히 압도된 그 순간, 팽팽했던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악독하고 사악한 자신의 주인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알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미몽의 권능을 빌어 다시 찾은 주인의 모습은 전처럼 두렵지도 압도적이지도 않았다.
자신의 주인은 정복자를 이길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아리아네의 사념은 진실의 눈을 통해 고스란히 김진우에게 전해졌다. 그 중에는 그녀가 채 전하지 않은, 주인에게 버림받아버린 절망과 체념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이쯤 되니 그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대는 나와의 봉신의 맹세도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지.”
“그건…….”
“그대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대와 디나리온 간에 맺어졌을 모종의 계약, 그로 인한 제약을 물으려는 것이다.”
질책이라 생각한 것인지 급하게 변명을 주워섬기려는 그녀의 입을 막은 그가 혹시 모를 제약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애초에 저는 악몽의 군주와 그 어떤 계약도 맺지 않았어요. 그저 그가 지닌 악몽의 권능이 제 미몽의 권능보다 위였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녀는 꿈을 생명의 근간으로 삼는 몽마들은 어쩔 수 없이 악몽의 주인을 따를 수밖에 없노라 말했다.
“그래서 봉신의 맹세가 가능했던 것이군.”
지저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한 것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흠…….”
어떻게 할 것인지, 눈빛으로 물어오는 도미니크를 보며 그는 고민에 빠졌다.
이미 아리아네가 전향을 표명한 이상 기존의 계획을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게 되었다.
애초에 모든 계획은 그녀가 제 주인을 위해 움직인다는 가정 하에 짜여진 것이니 수정은 불가피했다.
고민에 빠진 그를 보며 아리아네가 대담하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저는 위대한 군주의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답니다.”
그녀는 김진우가 자신의 말에 흥미를 보이자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의 쓸모를 어필하려 했다.
“제 권능은 미몽.”
슬며시 그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일으킨 그녀, 손끝에 안개처럼 뿌연 무언가를 일으켰다.
“안개 속에 가려진 무엇, 신기루에 닿은 듯 의미 없는 손짓, 이루지 못할 소망을 갈망하는 자들의 꿈을 관장하는 것.”
그녀의 고운 손짓에 손끝에 매달려 있던 안개가 흩어졌다.
“위대한 군주께서 각성한 지금, 그의 꿈은 해소될 수 없는 갈증이나 다름이 없답니다.”
요사스럽게 빛나는 눈동자가 미소 뒤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가 절망적인 갈망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몽마들의 지배자는 악몽이 아닌 미몽이 될 것입니다.”
무언가 몽마들만의 복잡한 관계가 있는 지, 그녀는 제법 야무지게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지겠군.”
“지저의 밤은 길답니다.”
아리아네가 고혹적으로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도 길지 않았으니,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 전에 그 건방진 태도부터 고쳐야겠군.”
번뜩이는 안광에 그녀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
“미몽의 여왕도 보통은 아니군요.”
아리아네와의 대화가 모두 끝이 났을 때, 도미니크는 그녀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그렇게 감탄 아닌 감탄을 토해냈다.
김진우 역시 도미니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과연 그럴 능력이 있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그간 특출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아리아네가 자신의 야망을 어디까지 관철시킬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디나리온이 그녀의 진짜 모습을 모르고 있다면, 아마 당하는 건 그일 테지.”
아마도 악몽의 군주는 미몽의 여왕이 어떤 여인인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만약 알았다면, 그는 그녀를 자신에게 보내지 않았으리라.
그 정도로 그녀의 연기는 감쪽같았다. 그녀가 흉중에 품고 있던 야망은, 진실의 눈으로조차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손해보는 게 없어.”
김진우는 아리아네를 믿지 않았다. 애초에 첩자 역할로 미궁에 숨어든 그녀가 이제 와서 제 주인을 버리고 충성을 맹세한다고 한들 그 맹세의 무게가 무거울 리가 없었다.
“단지 누구와 거래하느냐가 달라질 뿐이겠지.”
만족을 모르는 그가 말하는 거래라는 게 그들이 생각하는 거래와는 다소 다를 테지만, 그도 도미니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다루기 편한 아리아네 쪽이 이겼으면 좋겠군.”
아리아네는 이미 대미궁에 귀속되어 미궁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대미궁에 속한 존재들의 흥망성쇠를 손에 쥔 하이로드. 그녀는 절대로 그와 대미궁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김진우는 그날 바로 그녀에게 가해져 있던 금제를 풀었다. 제한되었던 개체수가 풀리고 몽마들이 소환되었다.
[미몽의 기사가 소환되었습니다.] [미몽의 사제가 소환되었습니다.] [미몽의 주술사가 소환되었습니다.]순식간에 삼백에 달하는 몽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반드시 주인님의 기대에 보답하겠어요.”
뻔뻔하게 주인님이라는 말을 지껄여대는 그녀를 보며 도미니크가 가증스럽다는 얼굴을 해보였지만, 김진우는 개의치 않고 물었다.
“고작 이 정도의 병력으로는 디나리온을 도모할 수 없을 터, 따로 생각이 있는 건가.”
새롭게 소환된 몽마라고 해봐야 삼백이 채 되지 않는 숫자였다. 고작 그 정도로 심층 백작과의 격차를 줄일 수 없다. 그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이들의 역할은 전투가 아니랍니다.”
그녀는 몽마들간의 싸움은 병력과 병력으로 부딪치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보다 은밀하고 관념적인 것이라 말했다.
“이들은 그저 꿈과 꿈을 연결하는 제물에 불과해요.”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대는 그녀의 모습 뒤로 보이는 몽마들의 낯빛이 음울했다.
“일종의 판돈이랄까요.”
아리아네를 통해 디나리온을 만났을 때 몽마 하나가 제물로 바쳐졌던 사실을 떠올린 김진우가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판돈이 많은 쪽이 늘 도박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
그의 말에 그녀가 요사스럽게 웃어 보이다, 도로 정색했다. 아무래도 그 앞에서 건방을 떨기에는 모진 폭력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했던 모양이다.
“쩝.”
김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괜스레 입맛을 다셨다.
***
아리아네와 디나리온의 전쟁이 은밀하고 드러나지 않은 싸움이었다면, 발리셔스의 연구는 이미 드러난 전쟁이었다.
쾅!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모아이의 신체가 폭발하는 것인지, 그의 공방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폭발이 일어났다.
“나가 마법사들이 실험에 합류하면서 다운 잼의 소모가 극심해지고 있어요.”
늘 침착한 도미니크였지만, 나가 마법사들을 말할 때는 치를 떨었다.
“끙.”
김진우 역시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 나가 마법사들의 귀환에 대한 반가움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나가 마법사들은 이전에도 멋대로 연구한답시고 미궁의 핵을 날려 먹은 전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때 탄생한 거울 망령의 왕이 요긴하게 제 역할을 다 해주고는 있지만, 나가 마법사들은 애초에 결과 따위야 아무래도 좋은 종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공한 것은 금세 잊고 새로운 연구에 몰두하기 일쑤였으며, 그 과정에서 무수한 실패를 겪으며 미궁의 재정에 심대한 타격을 주곤 했다.
그리고 귀환한 지금은 발리셔스의 연구를 돕는다는 핑계로 거리낄 것 없는 광기의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중요한 연구니, 당분간은 지켜보는 수밖에.”
냉정하고 무자비한 정복자로 이름이 드높은 그였지만, 나가 마법사만큼은 여전히 통제할 수 없는 골칫거리인지라 결국 체념 서린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가 마법사들의 광기는 그의 예상 이상이었으니,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들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뭉개진 이목구비와 눌어붙은 피부, 벌떡 일어나 공방을 서성이는 모아이를 발견한 김진우가 반색했다.
“오오, 모아이를 미궁으로 들여오는 데 성공한 것인가.”
발리셔스가 살아 있는 모아이가 필요하다 말한 것이 떠올라 그가 기쁜 낯으로 말하니, 나가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괴성을 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캭! 카아아악!”
언제나 그렇듯이 두서없는 설명이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모아이를 들여온 게 아니라, 너희들이 모아이를 만들어냈다고?”
그들은 모아이를 안으로 들여올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자, 직접 만들어낸 것이다. 그 천재적이라면 천재적인 발상에 그가 황당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정색하고 물었다.
“그런데 발리셔스는?”
그의 질문에 나가 마법사들이 비척거리며 공방을 서성이는 모아이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