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93)
던전 견문록-193화(193/319)
# 193
던전 견문록
제 194 화
“설마.”
이번에도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발리셔스가 보이지 않아 혹시나 하고 그의 행방을 물었더니, 정말로 모아이가 되어버린 실험체가 발리셔스라는 대답을 듣고 말았다.
“미치겠군.”
발상의 전환만큼은 칭찬해줄 만했으나, 연구의 주체인 본인이 모아이가 되었으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령술을 통해 새로운 육체를 얻으려고 해도, 모아이의 몸을 제대로 손쓸 수 있을지 부터가 의문이었다.
“캭! 캭!”
그런 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가 마법사들은 자신의 성과를 자랑한답시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일이 이쯤 되자 이성적인 김진우조차도 이들이 심층 백작이 보낸 간세가 아닌가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후우, 돌려놓을 방법은?”
나가 마법사들은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발리셔스로 실험하면 된다며 장담해댔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육신의 복원에 실패하여 완전히 붕괴해 버렸던 바로 전의 실험을 떠올린 그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차라리 새로운 모아이를 만들어 내면 만들었지, 발리셔스는 안 돼.”
망자의 군대와 사령술의 쓸모를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될 일이라 그가 기겁을 하며 말을 하니 나가 마법사들의 눈이 번뜩였다.
“뭐? 실험체가 필요하다고?”
설마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던 것인지, 나가 마법사들은 이때다 싶어 그에게 실험체가 필요하다 졸라댔다.
하지만 멀쩡한 몸을 망가트려 복구될지 어떨지 모르는 모아이로 만든다는 데 선뜻 나설 소환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몽마들은 어떠세요? 어차피 내버려 두어도 미몽의 여왕이 재물로 쓰일 존재들입니다. 나가들을 쓰느니 그들을 쓴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뒤늦게 달려온 도미니크가 일의 전모를 파악하고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어차피 제 식구가 아니면 터럭만큼도 인정을 두지 않는 김진우였던지라, 그녀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애초에 주인님의 은혜로 태어난 몽마들, 유용하게 쓰인다면 그들도 나름 보람이 있겠죠.”
그렇게 몽마들의 의지는 배제된 채, 새로운 실험체가 나가 마법사들에게 공급되었다.
“캬아아아앗!”
광분해서 날뛰어대는 나가 마법사들을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김진우는 공방에 널려 있던 다운 잼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거, 어디서 난 거지?”
방금 전까지의 느슨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바짝 날이 선 그의 손에는 빛을 잃은 다운 잼 하나가 쥐여져 있었다.
그 모양새는 언젠가 지상에서 보았던 내용물이 텅 빈, 껍데기뿐인 다운 잼과 완전히 같았다.
***
껍데기만 남은 다운 잼은 나가 마법사들이 임의적으로 모아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탐색자 협회가 보유하고 있던 속이 비어버린 다운 잼을 떠올리고 말았다.
“음…….”
머릿속이 복잡했다. 협회가 보유하고 있던 다운 잼은 어쩌면 이미 자생의 가능성을 잃은 타 지저에서 얻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 편이 훨씬 더 가능성이 높았다. 지상에 나가 마법사와 같은 자들이 있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실험을 했을 리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협회와 지저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랜만에 지상으로 향했다. 하지만 새롭게 협회장이 된 박성진은 속이 빈 다운 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백 선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송종철이 죽기 전에 언급했던 배후의 존재만이 일의 전모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연결 고리라고 할 수 있는 송종철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뒤를 캐낼 길이 요원하기만 했다.
“그간의 상황을 보고하라.”
혹시 몰라 이런저런 당부를 남긴 그는 지상의 미궁에 들려 윤희의 동정과 릭샤샤의 안부를 살폈다.
“아무래도 지저와는 환경이 다르다 보니, 미궁의 성장이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성과가 보이고 있어요.”
파티 홀의 성장이 순조롭다며 밝은 얼굴을 해보인 윤희는 우려와는 다르게 그 어떤 배신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고, 릭샤샤 역시 모리건과 겨우살이 나무들의 보호 아래서 무탈했다.
“미치겠군. 분명 내가 모르는 곳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걸 알 수가 없으니.”
아무리 의문이 깊어도 당장 알 수 있는 길이 없었으니, 그는 이준영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알려주고 협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라는 당부를 남기는 것으로 짧은 외유를 마쳤다.
다시 돌아온 대미궁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아리아네가 자신의 거처를 걸어 잠그고 칩거에 들어갔다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봉인 따위는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풀어낼 수 있는 김진우였지만,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었던 터라 무리하게 그녀의 동정을 살피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돌아올 때라면, 더 이상 미몽이라는 이름 앞에 악몽을 두지 않게 되었을 때뿐이리라.
그렇게 밥상을 차려놓고 쌀이 익기만을 기다리던 김진우는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느꼈다.
비틀린 고대의 영웅들은 미궁 밖에 웅크린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대미궁은 여전히 게걸스럽게 침입자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나가 마법사들이 매일 같이 일으키는 소란을 제외하면 대미궁은 너무도 잠잠했다.
“지루하군.”
하루하루가 생존을 건 투쟁이었던 그에게는 너무나도 무료한 시간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누군가가 모아이 무리를 뚫고 대미궁에 찾아왔을 때, 그가 그토록이나 반갑게 나선 것은.
“오랜만입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작달막한 몸통, 짧은 팔다리를 휘저어대는 과장스러운 인사, 임프를 본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헌앙하신 모습을 보니, 그간의 염려가 다 쓸데없었습니다요.”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
“오랜만이군.”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김진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10층 미궁에서 블랙 머천트의 흔적이 발견되었던 탓에 그들의 귀환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나마 암상인의 인사를 받아줄 수 있었다.
“이런이런… 자작님께서는 제가 반갑지 않으신 모양입니다요. 저는 이렇게 반가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오랜만에 만난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은 여전히 호들갑스러웠고 뻔뻔했다.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이제 온 거지?”
사실상 블랙 머천트에 대한 의존도가 적지 않았기에 그들이 잠적했을 때, 김진우는 꽤나 많은 곤란을 겪었어야 했다. 그런 상황이니 암상인을 대하는 그의 말투가 고울 리가 없었다.
“아이고, 다 아시면서 그러십니까요. 온 지저가 저 돼먹지 않은 괴물로 난리통이고, 용맹한 귀족분들도 맥을 못 추는 마당에 저희 같은 상인 나부랭이가 무슨 용 빼는 재주가 있어 지저를 쏘다니겠습니까.”
김진우는 그 엄살 같지도 않은 엄살에 코웃음을 쳤다.
당장 9층에 모인 모아이의 수만 해도 적지 않다. 그런 그들을 뚫고 이곳까지 당도한 것만으로도 블랙 머천트가 가진 저력이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용병들 창끝에 덜렁거리는 모아이의 머리통이나 치우고 지껄이시지.”
전원이 영웅급 소환수들로 구성된 블랙 머천트의 호위대는 비록 피투성이였을지언정 피로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이놈들아, 보기 흉하다! 귀하신 분 눈 어지럽히지 말고, 그 흉측한 것일랑 당장 치워버려라!”
암상인의 엄포에도 용병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수많은 나가들과 영웅급 소환수들을 보며 바짝 경계의 날을 세우고 있었다.
“지들 딴에는 저게 전리품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도통 제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요. 아시다시피 워낙에 드세고 야만적인 놈들이라 저도 애를 먹고 있습죠.”
사과 아닌 사과를 건네 오는 블랙 머천트의 태도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대미궁의 이모저모를 살피는 눈빛만큼은 날카롭기 그지없었으니, 김진우는 서서히 기세를 피워 올리며 암상인을 압박했다.
“후우, 후우.”
암상인을 따라온 호위 용병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슬그머니 허리춤의 날붙이에 손을 가져다 대는 용병들의 모습을 보며 더욱 더 살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뽑으면 죽는다.”
이번에는 진짜 살의가 담긴 기세가 용병들을 찍어 눌렀다. 수백의 용병이 단 한 명에게 압도되어 물러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은 그 모든 것을 보고도 작게 감탄을 토해냈을 뿐, 그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가늘게 뜬 눈을 보니 새삼 변해버린 그라는 존재를 탐색하는 듯했다.
그 불쾌한 시선에 김진우가 표정을 굳히며 앞으로 나섰다.
음흉한 암상인을 상대하기에 앞서 건방진 용병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로 마음먹고 살기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블랙 머천트의 교활한 암상인은 절묘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선물을 아직 안 전해드렸군요.”
한 발자국 나선 암상인이 주변의 분위기 따위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한 순진무구한 얼굴로 품을 뒤적거렸다.
짧은 팔을 통통한 가슴팍에 넣고 호들갑스럽게 품을 뒤져대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살벌한 분위기가 무색해지고 말았다.
“저희 블랙 머천트는 자작님의 무사를 진심으로 기뻐하며, 이에 조그마한 성의를 담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부디 하찮은 선물일지언정 값없다 내치지 마시고, 받아들여주십시오.”
여전히 칼자루에 손을 얹고, 발톱과 이를 드러낸 용병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적당한 타이밍에서 물러났다.
어차피 용병들을 손봐주는 것은 작은 분풀이, 곁다리에 지나지 않는 것, 지금은 본론을 꺼내 들 때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는 사설이 길군.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 들었으면 좋겠는데.”
암상인이 꺼내든 자그마한 상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는 불편한 심기를 과장되게 내비치며 재촉했다.
“자작님께선 물욕이 없으셔서 선물에 그다지 흥미가 없으신 모양입니다. 그쪽 아가씨께서 받아주시지요. 장담컨대 아가씨의 주인님은 이 물건을 절대적으로 좋아하실 겁니다.”
암상인이 이번에는 상대를 바꿔 조금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도미니크를 향해 상자를 내밀었다.
“자, 어서요. 먼저 이걸 받으셔야 저도 이야기하기가 편해집니다요.”
김진우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눈치를 보던 도미니크가 김진우의 허락에 냉큼 달려와 상자를 받아 들었다.
“열어보시지요.”
이번에는 도미니크도 그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이건…….”
상자 속의 내용물을 본 그녀가 놀란 얼굴로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백작의 인장이에요.”
어쩌면 귀족의 인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블랙 머천트는 늘 그가 필요한 물건을 기가 막히게 가져다 바치곤 했었으니까.
하물며 10층의 귀족들을 싹쓸이해 간 블랙 머천트라면 귀족의 인장 정도는 썩어날 정도로 남아돌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남작이나 자작의 인장일 거라 생각했지 백작의 인장은 그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게 지금 무슨 뜻이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그를 보는 암상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제까지 보였던 가벼움이라고는 터럭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모습, 투명한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한 암상인이 낮게 말했다.
“위대한 전승의 사령관이자, 지저의 유일무이한 정복자에게 자작의 위는 너무나 하찮지요.”
예전이었다면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백작의 인장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남작의 인장을 그렇게 받았고, 자작의 인장 역시 그리 받았으니까.
하지만 이미 하이로드의 자리에 오르며 지저 귀족의 위를 내팽개친 지금의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었다.
“깊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저는 전해드렸고, 자작님께서는 물건을 받았을 뿐입니다. 서로 할 일을 다 했으니, 그 뒤는 어떻게 되든 간에 각자의 자유 아니겠습니까?”
다소 복잡한 심경에 입을 다문 그를 보며 암상인이 은근하게 말했다.
“그러니 자작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인장을 받아들이시든 내버리든. 그도 아니면…….”
암상인이 한쪽 입가를 씰룩이며 건조한 얼굴을 해보였다.
“먹어 치우든 간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