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94)
던전 견문록-194화(194/319)
# 194
던전 견문록
제 195 화
72. 서리의 권능
바싹 메마른 시선이 탐색하듯 김진우를 훑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전혀 변화가 없자 이내 말간 눈빛에 탁, 하고 맥이 풀려버렸다.
“제 딴에는 나름대로 파격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뻔뻔스럽게 지껄여대는 암상인의 태도에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놀랄 게 있나. 그대의 말마따나 그대는 물건을 전해주는 것으로 그대의 역할을 다했고, 나 역시 그대가 전해준 물건을 받는 것으로 끝난 문제가 아닌가. 이후에는 어떻게 하든 내 할 따름이겠지.”
예전이었다면 말 속에 숨겨진 저의를 파악하느라 분주했을 그는 도리어 천연덕스럽게 암상인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이거, 제가 한 방 먹었군요.”
암상인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용건을 꺼내라. 1년이 넘도록 행적을 보이지 않던 블랙 머천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게, 이런 시시껄렁한 이유일 리가 없지.”
“무려 백작의 인장씩이나 건네드렸는데, 시시껄렁한 이유라니. 이거 못 본 사이에 배포가 남달라지셨습니다요.”
그대로 두었다가는 하루가 다 지나도록 본론을 꺼내들지 않을 암상인인지라 그가 다시 한 번 눈짓으로 재촉했다.
“좋습니다. 본론을 말씀드리죠.”
결국 암상인도 더는 의뭉 떨지 못하고 용건을 꺼내 들고 말았다.
“저희 블랙 머천트는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대미궁의 탄생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블랙 머천트는 그가 하이로드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기야 11층의 백작들도 전부 알고 있는 사실을, 지저에서 정보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블랙 머천트가 모르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김진우는 동요하지 않고 오만한 표정으로 암상인이 보내는 공경의 예를 받아주었다.
장난기가 쏙 빠진 음성으로 한참이나 장황한 축하와 경의를 표한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은 슬슬 김진우의 얼굴에 지루한 기색이 보이자 황급히 말을 마무리 지었다.
“이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이로드께 무한한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 새로운 군주의 앞날에 영광만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고맙군.”
김진우의 태도가 어찌나 덤덤한지, 암상인은 다시 한 번 맥이 빠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끄응, 군주님께서 이리 무심하시니 그간 백방으로 군주님을 위해 뛰어댄 제 노력이 왠지 허무해지는군요.”
암상인은 백작의 인장이 진즉부터 그에게 내정되어 있었노라 말했다.
하지만 그가 덜컥 하이로드에 오르는 바람에 이를 전달해야 하는지를 두고 내부적으로 말이 많았던지라 그 과정에서 반대하는 이들을 설득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음을 과장되게 생색냈다.
“그렇군. 답례는 하도록 하지.”
일의 진위 여부야 알 수 없지만, 암상인의 조력이 그간 적지 않았기에 그는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암상인은 그 감사 인사를 듣고 나서야 밝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비굴하게 양손을 비벼대는 암상인의 눈빛이 다시 은근해졌다.
“군주님께서 어떤 이름을 받으신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내키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기다리다 보면 차차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진명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하지만 암상인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블랙 머천트의 용건이라는 것이 그의 진명을 알아내는 데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암상인이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괜스레 뜸을 들였다.
“군주님께서 이름을 알려주시면, 저 또한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김진우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암상인은 마치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금세 입을 나불거렸다.
“이번에 새롭게 탄생한 하이로드는, 군주님 하나가 아닙니다.”
***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은 돌아갔다. 하지만 김진우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암상인과 나누었던 대화가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지저는 넓고 하이로드의 재목은 그만큼이나 많습니다.”
암상인은 아예 그를 놀라게 만들기로 작정한 것인지 계속해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번에 벌어진 전쟁 역시 군주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군주님의 대미궁이 탄생할 때, 지저가 어떠했는지를 떠올리십시오. 자, 힌트는 여기까집니다. 이제는 군주님께서 대답하실 차례입니다.”
“탐욕, 그것이 내 이름이다.”
기분 탓이었을까. 탐욕이라는 말을 들었을 암상인은 어쩐지 놀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화두에 빠져 있던 그는 그리 깊게 암상인의 태도를 주시할 수 없었다.
“으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졌다.
그저 인간의 탐욕이 부른 참사일 거라 여겼던 모아이의 탄생에 또 다른 비밀이 있었던 모양이다.
“설마…….”
뒤늦게 대미궁이 탄생한 순간, 미궁을 잃고 지저로 내몰렸던 수많은 폭도들을 떠올린 김진우가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자신이 폭도들을 전부 처리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일족의 원천인 핵마저 잃은 그들이 지저를 계속해서 떠돌았다면 어떤 모습으로 남았을까.
지저의 악의에 잠식되어, 결국은 짐승이 되었을 수천 폭도들의 모습을 떠올린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만약 정말로 그들을 지저의 망령으로 만든 것이 대미궁의 탄생이라면, 모아이들이 몰려나온 통로 너머에는 끔찍한 괴물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고작 층 하나를 먹어치웠던 탐욕의 대미궁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하고 강대한 대미궁이 존재하리라.
비약에 가까운 망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자신의 망상을 떨쳐낼 수 없었던 것은, 외눈박이 군주의 파편, 우스투스의 마지막 유언이 떠올랐던 탓이다.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선물을 남겼소. 찬탈자의 시선은 당분간 그대를 쫓지 못할 것이니, 최대한의 힘을 비축하기를 바라오. 부디 그대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때는 달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말이다. 그저 심층의 백작들이나 흔들어 정보에 혼선을 주었으리라, 하고 넘겼던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머릿속을 울려댔다.
아무리 심층의 백작들이 정보를 은폐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지저에 흩어진 파편들마저 두려워하던 찬탈자의 눈을 완벽하게 가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찬탈자의 시선은 여전히 9층에 닿지 않았으니, 무언가 더욱 중요한 것이 있어 그의 눈을 돌렸으리라 생각하는 편이 차라리 설득력이 있었다.
“망할 파편 놈들. 일을 얼마나 크게 벌린 거냐.”
잘게 찢겨진 지저를 하나로 합치겠다며 공공연하게 떠들던 우스투스니만큼, 어쩌면 정말로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옛 군주의 파편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김진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야 답도 나오지 않는 문제를 두고 계속해서 고민만 할 수는 없는 법, 그는 애써 당면한 과제로 눈을 돌렸다.
이제껏 보았던 귀족의 인장들과는 그 존재감부터가 다른 백작의 인장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후우.”
그는 오너 룸으로 향했다.
지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간에 당장은 힘을 키워야 할 때였다.
***
왕좌에 앉은 그는 곧장 백작의 인장을 흡수했다.
[한때 지저를 다스리던 하이로드들의 힘은 잘게 쪼개지고 흩어져 귀족의 인장이 되었습니다.] [백작의 인장은 하위 귀족들이 지닌 여타의 인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진짜 귀족의 인장입니다.] [백작의 인장을 탐욕의 인장에 받아들이시겠습니까?]“받아들이겠다.”
짧은 대답과 함께 꽉, 움켜쥔 백작의 인장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려 탐욕의 인장에 흡수되었다.
[백작의 인장이 탐욕의 인장에 완전히 흡수되었습니다.] [하위 귀족의 인장과는 다르게 백작의 인장부터는 속성이 정해져 있습니다.] [흡수한 인장의 속성은 ‘물결 없는 호수의 표면에 서린 서리(氷寒)’입니다.] [공교롭게도 새롭게 흡수한 인장의 속성은 가장 존귀한 나가, 나가들의 군주, 나가라자(용왕)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인장의 고유 속성에 따라 당신의 숨결에 서리의 한기가 깃듭니다.] [속성 능력, 서리 숨결이 나가라자의 권능과 만나 새로운 능력이 되었습니다.]인장에 속성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까지는 그도 알지 못했던 일이다. 혹시라도 나가들과 맞지 않는 화기라도 들어 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다행히 인장 속에 들어 있던 것은 차갑고 습한 곳을 선호하는 나가의 성질과 꼭 맞는 냉기였다.
마치 처음부터 작정하고 안배한 듯한 공교로운 일이었지만, 실보다 득이 크니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고유 능력, 서리 전장을 얻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당신은 당신과 나가들만을 위한 전장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서리 전장 안의 나가들이 더욱 더 용맹해집니다.] [나가들의 공격에 냉기 속성이 추가됩니다. 나가들에게 일격을 허용한 적은 뼛속 깊이 스며드는 한기에 움츠려들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가 마법사들의 주문은 더욱 더 강력해졌습니다. 그들의 주문은 이제 적의 영혼마저 꽁꽁 얼리고 말 것입니다.] [나가 사제들의 치유 주술이 잘려나간 신체마저 완벽하게 복원해낼 정도가 되었습니다.]새로운 능력을 얻었다는 사실에 기뻐할 틈도 없이, 계속해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백작의 인장을 흡수한 당신의 능력이 더욱 더 강력해졌습니다.] [서리 갑옷을 얻었습니다. 일시적으로 냉기의 갑옷을 둘러 방어력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음 갑옷은 당신의 기력이 남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재생합니다.] [서리 칼날을 얻었습니다. 더없이 차갑고 날카로운 냉기로 이루어진 칼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리 칼날의 날은 부러지더라도 금세 다시 자라납니다.] [축하드립니다. 나가의 왕에 조금 더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서리 능력을 두른 당신은 이제 누가 보아도 나가들의 왕입니다.] [나가들의 충성심이 더욱 깊고 맹목적으로 변합니다. 나가들의 충성심이 한계를 넘어 광신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나가들은 어떤 정신적인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온전히 당신의 명령만을 따를 것입니다.]백작의 인장이 지닌 힘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어 보였다.
[탐욕의 인장에 서리 속성이 추가되었습니다.] [텅 비어 있던 힘의 원천에 상당한 에너지가 축적되었습니다. 축적된 에너지는 인장의 등급을 올리거나, 고유 권능을 사역하는 데 사용됩니다.] [비록 백작의 인장이 지닌 힘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탐욕의 인장을 단 번에 성장시키기에는 다소 모자랐습니다.] [인장의 등급을 온전하게 상승시키기 위해 최소한 하나 이상의 백작급 인장이 필요합니다.] [힘의 원천이 63프로 충전되었습니다.]인장의 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 살을 에는 냉기가 터져 나왔다.
“음.”
온몸에 넘쳐흐르는 활력과 에너지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손끝에 맺혔다 이내 스러지는 냉기의 결정체를 보며 감탄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는 이내 아무리 기다려도 사라지지 않는 냉기에 울상을 지어 보였다.
“당분간 볕 보기는 글러 먹었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대미궁에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