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95)
던전 견문록-195화(195/319)
# 195
던전 견문록
제 196 화
73. 블랙 머천트의 초대장
대미궁에 겨울이 찾아왔다.
사방에 고드름이 흘러내렸고, 새하얀 얼음 가루가 흩날렸다. 그 바람에 멀쩡하게 돌아가던 미궁의 시설물 역시 꽁꽁 얼어붙어 완전히 멈춰버리고 말았다.
말락수스와 난쟁이들이 애지중지하던 화로에 불이 꺼지고, 이주한 난민들의 허술한 거처는 한기로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었다.
불평을 모르는 언더 엘프마저도 얼어붙은 손을 겨우 녹이며 웅크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갑작스레 찾아온 겨울이 하루라도 빨리 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파는 좀처럼 수그러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휴우.”
김진우는 왕좌에 들러붙은 얼음 알갱이들을 쓸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미궁에 불어 닥친 이변은 스스로가 흡수한 백작의 인장에 담긴 속성 탓이었다.
공작도 후작도 아닌 일개 백작의 인장이 지닌 힘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지라,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타고나기를 냉기에 강하게 태어난 나가들이야 제철 만난 물고기마냥 신나서 날뛰어대고 있다지만, 대미궁의 반절에 해당하는 인원이 추위로 얼어붙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나가들을 위해 병장기를 생산해야 할 난쟁이들이 얼어붙은 화로 탓에 손을 놓고 있었고, 언더 엘프들은 추위로 굳어버린 몸으로 경계 임무에 나설 수가 없었다.
대미궁이란 거대한 생명체가 겨울잠에라도 빠져든 것처럼 활동을 중지한 것이다.
“미치겠군.”
고민해 보아도 대미궁에 찾아온 겨울은 떠날 줄 몰랐고, 그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이거, 이거 상황이 영 안 좋으신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찾아온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은 마치 이 모든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두터운 옷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결 좋은 모피를 두른 암상인의 느긋한 얼굴이 지극히 밉상이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제가 전해드린 인장은 아무런 하자 없는 물건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곱지 않은 시선을 눈치챈 암상인이 뒤늦게 변명하듯 지껄여댔지만, 한 번 심기가 상한 그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그런 그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암상인이 드물게 바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안 되겠지만, 일단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져와 봤습니다요.”
그러고 보니 암상인의 행렬이 오늘따라 유독 길고도 부산스러웠다. 평소 보아왔던 호위 용병들보다 몇 배는 거대한 거인과 괴수들이 저마다 한 짐씩 짊어지고 다가와 그 앞에 던져 놓았다.
“그건…….”
“지저 어딘가의 1년 내내 추위가 이어지는 곳에서만 살아가는 크리쳐의 외피로 만든 외투입니다. 급한 대로 추위를 모면할 수는 있을 겁니다.”
제법 요긴하게 쓰일 법한 외투가 반가웠지만, 김진우는 고마움보다는 차라리 화가 났다.
암상인이 하는 양을 보아하니, 애초부터 이러한 재앙을 예상한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놀림받은 기분에 화가 나는 것과는 별개로 추위에 떨고 있는 소환수들을 돌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의 손짓에 달려 나온 나가들이 용병들이 던져 놓은 짐을 들고 미궁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일단 고맙다고 하지.”
하나도 고맙지 않은 얼굴로 그리 말하니, 암상인이 서운함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비죽였다.
“그렇지 않아도 용건을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암상인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막 암상인을 닦달하려던 김진우가 괜스레 민망해져 입맛을 다셨다.
암상인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품속을 뒤져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봉투라는 것이 언젠가 보았던 블랙 머천트 정기 경매 초대장과 똑같았다.
“지저에 난리가 나는 바람에 정기 경매라는 이름이 무색해지기는 했지만, 언제까지고 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기분 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암상인은 평소의 비굴한 태도로 돌아가 양손을 비벼대며 정기 경매에 꼭 참석해 달라 부탁했다.
“저희 블랙 머천트에서는 정기 경매가 1년을 건너뛰는 바람에 실망했을 수많은 분들을 위해 이번에 각별히 공을 들였습니다! 전에 본 적 없는 진귀한 물건과 희귀한 크리쳐까지, 아마 이번 경매에는 없는 것만 빼고 다 있을 거라 장담하겠습니다!”
싸구려 물건을 파는 방문 판매 사원이라도 된 것처럼, 한참을 떠들어대던 암상인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마 이번 경매는 군주님께 더욱 각별한 이벤트가 될 것입니다.”
굳이 암상인의 싸구려 멘트가 아니었어도 김진우는 이미 마음을 결정한 상태였다.
멋도 모르고 참석했던 경매에서 안젤라와 윤희를 얻어 제법 큰 이득을 보았으니, 이번에는 또 무엇을 얻을지 벌써부터 기대될 지경이었다.
하물며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당시와는 다르게 협회를 털어 얻은 무지막지한 다운 잼이 창고에 쌓여 있었다.
제대로 된 물건만 있다면 구태여 블랙 머천트의 초대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암상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확답을 받기 위해서인지 은근하게 정보를 풀었다.
“이번에 준비된 상품 중 상당수는 고대의 지저와 관련된 물건들입니다. 그간 심층 귀족들이 처치 곤란이라 그대로 두었던 것을 저희가 어렵사리 구해 경매 물품으로 준비했습죠.”
“호오.”
무표정하던 김진우도 이번만큼은 제대로 흥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고대의 지저니만큼 그에 관련된 물건을 하나라도 얻으면 상당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어떻습니까, 구미가 당기십니까?”
암상인이 한껏 거들먹거리는 얼굴로 물었다.
“괜찮군. 근데 벌써 경매를 열 정도로 지저의 상황이 안정된 것인가?”
이때다 싶어 지저의 동향을 물으니, 암상인은 잘도 대답해 주었다.
“뭐, 저층의 분들이야 여력이 없겠지만, 이번 경매는 그분들을 위해 여는 경매가 아니라서 말입죠. 아무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최소한 자작 이상의 분들이나 돼야 경매에 참석할 상황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간 저층의 정보를 얻지 못했던 김진우는 암상인의 말에 제법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경매에 입찰할 분들은 아마도 백작님들이 될 겁니다. 그분들도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테니 이번 경매는 제법 경합하는 맛이 있을 겁니다.”
그 외에도 암상인은 묻지도 않은 지저의 동향을 한참이나 떠들어댔다.
“음.”
이미 쓸 만한 정보는 전부 나온 상황이라 그가 지루한 얼굴을 해보이자, 암상인이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바쁘신 분을 붙잡고 흰소리나 하고 있었군요. 이거야 원, 나이를 먹으면 눈치가 없어진다더니 제가 딱 그짝입니다.”
동그란 얼굴과 짧은 팔다리를 과장되게 흔들어대는 특유의 몸짓 탓에 유독 앳되어 보이는 암상인은 생긴 것만 보면 그의 조카뻘이라고 해도 믿어질 지경이었다.
그런 얼굴로 뻔뻔하게 지껄여대는 꼴이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괜히 해봐야 쓸데없는 잡담만 길어질 뿐이다. 역시나 자신의 나이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있었는지 입을 오물거리고 있던 암상인이 물었다.
“제가 몇 살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별로 궁금하지 않군.”
“그렇습니까. 그래도 조금은 관심을 두실 거라 생각했는데…….”
풀이 죽은 얼굴로 암상인이 민망한지, 곧장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아, 그리고 말입니다. 이번 경매는 시작되면 중도에 경매장을 떠날 수 없습니다.”
“미쳤군.”
예전에야 블랙 머천트의 깃발이 전쟁을 억지했다고 하지만, 모아이들이 판을 치는 지금의 지저는 한낱 깃발 따위로 미궁의 안녕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굳이 이런 조건을 내거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저희도 나름의 고충이 있어 내린 결정이니, 부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작 그 정도의 말로 납득하기에는 사안이 너무나 중요했다.
혹시라도 경매에 참가한 와중에 일이라도 벌어지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끄응, 사실 이건 경매 당일이 되어야 말씀드리려고 했었던 건데 말입니다.”
방금 전과는 달리 경매의 참가를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를 보며 암상인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번 경매에 참가하는 분들 중에 이곳 지저의 분이 아닌 분도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김진우의 자세가 달라졌다.
“그런데 그분께서도 군주님과 같은 처지의 분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
의미심장한 말에 저도 모르게 반문한 김진우는 갑작스레 심장이 벌컥대며 뛰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분 역시 하이로드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미 지저에 또 다른 하이로드가 탄생했음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듣고 나니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실한 정보겠지?”
“제가 한 번이라도 군주님께 거짓을 고한 적이 있습니까?”
이 정도의 정보를 듣고도 경매를 참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나마 다시 한 번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니 이번 경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 블랙 머천트나 군주님이나 꽤나 유익한 시간이 될 거라 약속드리겠습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암상인이 인사대신 여상스러운 멘트를 남기고는 호위 용병들을 다그쳐 지저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추위에 얼어 죽을 것만 같았던 소환수들은 블랙 머천트가 전달해준 외투를 입고 당장의 추위는 모면할 수 있었다.
“저래서 어떻게 이 험난한 지저에서 살아남겠다는 건지.”
추위와는 무관한 도미니크가 두터운 외투로 몸을 돌돌 감싼 언더 엘프들과 난쟁이들을 보며 한탄했다.
“아무래도 상성이라는 게 있으니까.”
반대로 그가 얻은 백작의 인장이 지닌 속성이 화기였다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나가들이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어,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매번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갑작스레 나타나 그가 필요한 것을 전해주던 블랙 머천트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이번 사태 역시 어떠한 안배가 있었으리라는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덕분에 파르테논과 디나리온의 인장을 빼앗기도 전에 백작의 인장을 흡수할 수 있었으니 이득이 컸지만, 블랙 머천트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지저의 문제란 것은 고민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번 경매에 가면 조금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조심하세요, 주인님. 이번 경매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언가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대로 웅크리고 있어봐야 알 수 있는 건 없어.”
당장 코앞에 닥쳐온 정기 경매의 초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봉투를 찢고 그 안의 포탈 주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러니 나는 직접 부딪쳐 보겠다.”
말과 동시에 양피지를 쭈욱 찢어낸 그의 눈앞에 블랙 머천트의 본거지로 향하는 포탈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