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96)
던전 견문록-196화(196/319)
# 196
던전 견문록
제 197 화
다시 찾은 블랙 머천트의 경매장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곳만 지저의 난리가 피해간 것처럼 분주히 움직여대는 임프와 수인족의 모습이 활기차기만 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것인지, 곧장 그를 반겨준 안내인의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너는…….”
“맞습니다. 한때 백작님께 큰 신세를 졌습죠.”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임프는 여동생 현지의 결혼 자금을 도둑질해 간 임프였다.
블랙 머천트의 행렬을 따라다니던 것을 보았던지라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1년 사이에 부쩍 변해버린 모습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여자였던가.”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임프 특유의 짜리몽땅한 신체는 어쩔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봉긋한 가슴에 굴곡 있는 태가 완연한 여성의 것이었던지라 그가 뜨악한 얼굴을 해보였다.
무심코 내뱉은 중얼거림에 임프 안내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말에 금세 의문을 거둔 임프가 슬쩍 다가와 귀엣말은 건넸다.
“혹시 제가 백작님이라고 부르는 게 불편하신지요? 위에서 전달받은 게 있어서 감히 그 영광스러운 호칭을 쓰지 못하는 제 상황을 헤아려 주세요.”
임프도 성별이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놀라 얼굴을 찌푸린 그를 보고 오해라도 한 모양인지, 안내자가 울상을 지어 보였다.
“괜한 불편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나 또한 그편이 편하니, 그리 부르거라.”
그러고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말을 놓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임프를 힐끗 살펴보니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바로 경매가 시작되는 건가?”
일전에도 그러했듯이 경매장을 찾기 전까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경매 날짜뿐인지라 그가 앞으로 진행될 일정을 물었다.
“백작님께서는 제법 이르게 오신 편입니다. 도착한 분보다 도착하지 않은 분이 많은지라, 경매가 시작하려면 조금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임프가 부족한 것이 있는지 이것저것 묻는데 꽤나 세심하게 신경 쓰는 눈치였다.
“대외비긴 하지만, 백작님의 등급은 경매에 참석하신 분들 중에서도 최상급입니다. 혹시라도 불편함을 드렸다가는 저 같은 말단은 목이 날아가고 만답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있는 공간이 전에 머물렀던 VIP룸보다 한층 더 고급스럽고 전망이 좋았다. 경매장의 무대가 눈에 선히 들어오는 것은 물론 고개만 돌리면 경매장 전체가 내려다 보였다.
“그런가. 덕분에 제법 호사를 누리는군.”
말과는 달리 그의 태도는 꽤나 자연스러웠다. 임프가 보이는 과할 정도의 공경과 예우, 어느 것 하나 부담스러운 기색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기야 지저에 발을 담근 지도 어언 3년이 되어 가는지라 미궁의 왕으로 군림하며 누린 호사가 이에 못지않았으니, 이제 와서 극빈의 대우가 새삼스러울 리가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따로 수발들 이를 보낼 터이니, 필요한 것은 그쪽을 통하시면 될 겁니다.”
이런저런 설명을 하던 임프도 이미 경매 경험이 있는 그에게 해줄 말이 많지는 않았는지, 금세 자리를 떴다.
그렇게 임프가 자리를 비우고 시간이 지나자 수인족 여인이 전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귀빈을 모실, 분에 넘치는 영광을 받은 야묘라고 하옵니다.”
이미 경매장의 VIP들의 수발을 드는 것은 수인족 여성들이 전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라, 큰 동요 없이 수인족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귀빈께서 불편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제법 세련된 태도로 고개를 숙여오는 묘인족 여성을 보니, 들짐승처럼 사납고 투박한 미궁의 수인들이 떠올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말았다.
“아…….”
서리의 인장을 얻으며 냉엄하게 변해버린 인상이, 순식간에 풀어지며 온화한 얼굴이 되었다.
묘인족 여성은 그 극적인 변화에 다소 놀란 얼굴로 눈을 꿈벅거리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미천한 종이 감히 귀빈의 후광에 취해…….”
“쯧.”
능숙한 인간의 언어에 세련된 몸짓을 하고 있지만, 역시나 노예는 노예였던 모양이다.
노예근성이 뼛속 깊이 박혀 단지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몸을 와들와들 떨어대는 묘인족 여성의 모습은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예전의 언더 엘프 무리만큼이나 하찮았다.
괜스레 기분이 나빠진 그가 전면에 위치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음…….”
모아이와의 전쟁으로 다소 한산할 거라 생각했던 경매장의 일반석은 예상과는 다르게 꽤나 북적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참석한 이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이번에 초대장을 받으신 분들은 최소 10층 아래 거하시는 분들뿐이라 들었사옵니다.”
여전히 주눅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떨리는 음성으로나마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하는 묘인족 여성의 설명에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기 계시는 분 중 몇몇 분들께서는 일반석에 계실 위치가 아니지만, VIP룸에 자리가 없어 부득이하게 모신 거랍니다.”
“VIP룸은 그럼 최소 백작 이상의 귀족들에게만 배정된 것인가.”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느 룸에 어떤 분이 계신지 까지는 미천한 종이 알지 못하나이다.”
과연 몇이나 되는 백작들이 이곳 경매장을 찾았을지, 그가 눈에 힘을 주고 건너편의 VIP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특수 고안된 VIP룸의 유리는 진실의 눈마저 이르지 못하였으니, 한참을 쳐다보아도 눈만 아파왔을 뿐이었다.
다시 시선을 돌린 그가 일반석에 가득 찬 경매 참가자들을 살펴보다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타 지저의 귀족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강하긴 하나 특별할 것 없는 하위 귀족들뿐이었다.
똑똑.
“들어오라.”
노크 소리에 들어오라 대답하니, 암상인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아이고, 혹시라도 오지 않으실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요.”
언제나처럼 과장된 인사와 함께 커다란 머리통을 문 안쪽으로 밀어 넣은 암상인이 금세 다가와 친한 척을 해댔다.
“어떻습니까? 룸은 마음에 드십니까?”
“전에 썼던 곳보다 훨씬 좋군.”
“그럴 겁니다. 원래 이곳은 12층에 거하시는 귀한 분들께나 배정되는 곳입니다.”
12층의 존재들이라면 최소한 지저 후작 이상의 귀족들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맞은편에 보이는 VIP 룸을 노려보았다.
“그럼 공작들도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인가.”
금세 사나워져 번뜩이는 눈빛에 묘인족 여성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암상인 역시 다소 해쓱해진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공작들도 이곳에 와 있는지를 물었다.
“아시다시피 저도 블랙 머천트에서는 그저 말단 직원에 불과합니다. 제가 담당한 고객이 아닌 이상에야, 어느 분이 참석하셨고, 또 어느 룸에 계신지 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요.”
창백한 낯빛으로 잘도 거짓말을 지껄여대는 암상인의 태도가 실로 능글맞았다.
이미 타 지저의 손님, 그것도 하이로드로 추정되는 이가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까지 전해준 마당에 무얼 또 숨기려고 저리 천연덕스럽게 거짓을 고하는지 그 저의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두지.”
하지만 대미궁이라면 모를까, 손님으로 온 이상 더는 패악을 끼칠 수 없던 김진우는 이내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여전히 눈은 건너편에 늘어선 수많은 VIP룸을 향해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평소의 그것이었다.
“혹시 몰라 말씀드리는데,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손님이라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손바닥 뒤집듯 금세 태도를 바꾼 암상인이 뻔뻔스럽게 지껄여댔다.
“원하신다면, 따로 기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까요?”
“부탁하겠다.”
호화로운 VIP룸을 배정받은 김진우였지만, 실상을 따지고 보면 좁디좁은 공간에 갇혀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때일수록 바깥의 상황을 대신 살펴줄 이가 필요한지라 그는 암상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더 할 말이 있는가?”
어쩐지 꾸물거리는 모습이 따로 더 할 말이 있는 모양새인지라 그가 물으니, 암상인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늘 경매가 끝난 뒤, 백작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잠깐 귀한 시간을 청하고 싶습니다.”
“왜지?”
당연히 일정이 끝나고 나면 숙소로 안내될 거라 생각했던 그는 이례적인 질문에 의아한 얼굴을 해보였다.
“백작님. 아니, 군주님을 뵙고 싶어 하는 분이 있습니다.”
백작이 아닌 군주, 즉 하이로드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는 의미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암상인을 살펴보았다.
“블랙 머천트의 공식적인 요청인가? 그도 아니면 아나톨리우스와 그대의 관계처럼 단순한 오지랖인가.”
“글쎄요. 어떤 쪽이든 군주님께는 손해가 없을 거란 사실을 약속드립니다.”
다소 두리뭉실한 대답이었지만 김진우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좋아, 만나도록 하지.”
“그럼 자세한 건 경매가 끝난 뒤 찾아와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저희 블랙 머천트에서 준비한 이벤트를 즐겨주시기를.”
그렇게 인사를 남긴 암상인이 룸을 떠나자, 그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광대 복장을 한 임프 하나가 경매 무대에 오르며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희 블랙 머천트의 ‘스페셜’ 경매에 참석해주신 여러 귀인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좌석이 상당했지만, 그대로 경매를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능숙하게 장내의 소란을 잠재운 임프가 경쾌하게 떠들어댔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 어려운 걸음이 헛되지 않은 알찬 경매로 귀인분들을 모시겠습니다. 또한 블랙 머천트를 잊지 않고 찾아주신 귀인분들께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익살스럽게 납작 엎드려 보인 진행자는 어느 정도 참가자들이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본격적인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블랙 머천트가 주관하는 스페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화려한 북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첫 번째 상품을 무대에 올릴 것 같았던 진행자는 어쩐 일인지, 상품 소개 대신 안내 멘트를 지껄여댔다.
“먼저 첫 번째 상품을 시작하기에 앞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무대를 압박하는 일반석 참가자들의 살벌한 기세에도 진행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매는 일주일간 계속되며, 중도에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만약 포기하실 분이 있으시다면, 지금 당장 품안의 포탈 주문서를 사용하실 것을 권장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건방진!”
“감히 상인 따위가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말인가!”
참가자들 사이에 소란이 퍼져 나가며 금세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당장에라도 무대 위의 진행자를 찢어발길 것만 같은 무지막지한 살의와 적의, 하지만 정작 온갖 악의를 온몸으로 받고 있는 진행자는 창백한 얼굴이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건 백작 이상의 귀족분들께서 전부 동의한 사안입니다.”
진행자의 말에 일반석의 소란이 뚝, 하고 끊겼다.
개중에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이들도 있었지만, 감히 고위 귀족들이 동의한 사안에 딴지를 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 지금부터 백을 세겠습니다. 이후에도 남아계신 분들은 전부 저희의 지침에 동의하신 걸로 간주하도록 하겠습니다.”
호가호위라고 했던가. 진행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참가자들을 바라보며 신이 나서 숫자를 셌다.
어쩐지 경쾌하기까지 한 그 음성에 참가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구십칠, 구십구, 백!”
마침내 진행자가 백을 외쳤을 때, 포탈을 열고 사라진 참가자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에 중도에 포탈을 사용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아마도 심기 불편한 높으신 분들의 미움을 받으시겠지요. 물론 여기 계신 귀인 분들께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만한 분들이니 그런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방금 전의 소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음성으로 진행자가 협박 아닌 협박을 남겼다.
그런데 당장에라도 경매를 시작할 것 같았던 진행자가 어쩐지 다시 뜸을 들이고 있었다.
“음?”
한 편의 연극이라도 보듯 창밖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김진우는 다시 나타난 암상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씀드린 손님이 방금 막 경매장에 도착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밖이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경매장 뒤의 문이 열리며 수십의 그림자가 들어섰다.
“손님께서 하나일 거란 말씀은 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개중에 군주님의 흥미를 끌 만한 분은 단 한 분이지만.”
암상인이 밉살맞은 얼굴로 지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