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97)
던전 견문록-197화(197/319)
# 197
던전 견문록
제 198 화
74. 재회
후드를 머리끝까지 둘러쓴 불청객들은 주변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되어 있던 것처럼 비어 있던 좌석에 몸을 앉혔다.
진행자는 그들이 전부 자리에 착석하자,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미리 안내드리지 못한 점,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그렇게 잠시 고개를 숙여 보인 진행자가 광대 복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갑작스레 개방된 통로, 끝도 없이 밀려든 악의에 잠식된 망령들, 귀인 분들 모두가 지난 1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저희 블랙 머천트 역시 흡사 가장 끔찍했던 과거로 돌아간 듯, 야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 지저의 상황에 1년간 침묵해야 했습니다.”
경매장의 소란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갑작스레 나타난 불청객은 여전히 경계와 적의가 가득한 시선으로 노려보면서도, 일반석의 참가자들은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인지 진행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해보였다.
“하지만 저희 블랙 머천트가 1년간 겁에 질려 웅크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최대한의 노력을 통해 현 지저에 벌어진 이 재앙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존귀하신 귀족분들께서도 해결하지 못한 일을 미천한 상인들이 해결할 수 있을 리는 없었지요.”
꽤나 장황한 설명에 벌써부터 성질 급한 몇몇 참가자들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소란을 일으키기 전에 진행자가 타이밍 좋게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래서 저희 블랙 머천트는 이번 사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는 타 지저의 귀한 분들을 손님으로 모셨습니다!”
마침내 불청객들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미친!”
“여기가 어디라고!”
진행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반석의 참가자들이 의자를 내던지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자, 자. 진정하십시오. 저분들께선 여러분과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키 작은 진행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참가자들을 진정시키려고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지저가 존재한 이래 늘 서로를 적대 했던 두 지저의 존재들이 만났으니 쉽게 진정될 리가 없었다.
일반석의 참가자들은 이를 드러내고 손톱을 꺼내든 채 당장에라도 스물 남짓한 불청객을 향해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 흥분한 일반 참가자들 사이로 유달리 깡마른 모습을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 머천트여. 그대들이 타 지저와 결탁하여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인가.”
기이할 정도로 깊고 울림이 있는 음성이 경매에 참가한 모두의 귀를 사로잡았다.
“미천한 상인 놈이 존귀한 11층의 자작, 현명한 브륜테스님의 전령, 타이레논님을 뵙습니다.”
유달리 힘을 준 진행자의 음성에 경매장의 소란이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인사를 받고자 나선 것이 아니다. 그대는 아직 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해십니다, 오해. 저희 블랙 머천트는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방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희의 유일한 관심사는 고객의 무사 안전과 지저의 안정뿐입니다.”
어쩐지 살기등등한 참가자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물러난다 했더니, 사내의 신분이 범상치 않았다. 하기야 자작쯤은 되어야 저 난리통 속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긴 할 것이다.
소란이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진행자가 반색하며 타이레논의 말에 대답했다.
“보통 놈이 아닐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자작씩이나 되는 놈이었군.”
VIP룸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김진우는 눈을 빛냈다.
협회의 일을 처리할 때 만났던 타락 군주의 사자는 전과는 달리 위엄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귀족들 따위는 눈 아래로 두는 그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존재감, 김진우는 새삼 그를 살려서 돌려보낸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도 자작씩이나 되는 존재라면 인장에 담긴 힘이 꽤나 쓸 만했을 텐데 말이다 하는 생각에 괜스레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오, 군주님과 연이 있는 분입니까?”
“안면 정도일 뿐이지. 그보다 잘도 저들 앞에 타 지저의 무리를 소개한다 생각했더니, 이런 수를 준비했던가.”
“뭐가 말입니까?”
“시치미 뗄 것 없다. 어차피 타이레논 역시 미리 입을 맞추어 두었겠지.”
남작도 아닌 자작씩이나 되는 작자가 일반석의 참가자들과 섞여 있다는 건, 그다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었다.
VIP룸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11층에 거하는 존재를 저리 홀대할 블랙 머천트가 아니었다.
하물며 분위기를 보아하니, 타이레논은 모략의 왕이니 뭐니 나름대로 지저에서 유명한 듯하지 않은가.
아마도 타이레논은 블랙 머천트가 VIP들과 미리 입을 맞추어 두었던 것처럼,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일반석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 상인 놈들의 능력이 모자라 존귀한 분의 위엄을 해친 것이지요. 아마 심기가 불편하셨던 자작께서 저희의 행사가 못마땅해 저리 나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귀족의 미움을 샀다면서도 암상인은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뻔뻔스러운 태도에 혀를 찬 김진우가 창밖을 내다보니 타이레논은 흥분한 기색 하나 없이 진행자와의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전면으로 나서는 바람에 당장에라도 일을 벌이려던 일반석의 참가자들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눈치만 살펴대고 있었다.
“그럼 그대 블랙 머천트는 지금 지저에 벌어진 난리를 해결할 열쇠를 저들이 쥐고 있다 말하고 있는 것인가.”
“현명하신 자작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김진우의 시선이 자작과 진행자를 훑어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일단의 무리를 향했다. 주변을 포위한 참가자들의 살기와 포위에도 그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음?”
한창 그들 무리를 훑어가던 시선이 절로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살기와 적의에도 미동 않던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무리에서도 가장 작고 왜소한 덩치를 한 존재, 드러난 것이라고는 유달리 하얀 턱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사냥 전에 낮게 엎드린 맹수가 그러하듯,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감추었던 기세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VIP룸을 넘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그에 대항하듯 일어난 상대의 기세가 정면으로 하이로드의 존재감에 맞부딪쳐 왔다.
“하여 저희들은…….”
“그대 블랙 머천트의 생각과 저들의 생각이 과연 일치…….”
주변의 소리가 멀어져 간다. 대본이라도 읽듯 자연스러운 진행자와 자작의 대화도, 살기등등한 참가자들의 거친 숨소리도 이내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소리가 사라졌을 때, 세상에는 김진우와 그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눈앞을 가로막은 VIP룸의 창도, 주변의 참가자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대였군.
그 기묘한 세상 속에서 사념 한 가닥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반갑다, 지저의 새로운 하이로드여.
그것은 마치 절대자의 그것처럼 오만한 시선이었고, 처음으로 마주한 또 다른 하이로드의 인사였다.
하지만 그 강렬함에 비해 서로의 교감은 길지 않았으니, 경매장의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돌아섰던 탓이다.
“만약 블랙 머천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왜 그대들은 여전히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타이레논이 후드를 깊게 눌러쓴 타 지저의 무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대들이 정말 다른 뜻이 없다면 이 자리에서 지저의 신비를 걸고 뜻을 확실히 하라!”
절묘한 마무리와 함께 엑스트라가 퇴장하고, 주연이 등장했다. 그리고 진짜 무대의 막이 올랐다.
“건방지군, 감히 일개 자작 따위가.”
언짢은 기색이 가득한 음성에 담긴 노골적인 살기는 타이레논과 블랙 머천트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당황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나 이곳은 그대들의 땅, 손님으로 온 만큼, 이번에는 그대들의 뜻을 따르도록 하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깊게 눌러썼던 후드를 벗었다.
“지저 14층을 관장하는 왕이자, 열두 공작의 수장, 통곡의 군주. 그것이 나를 칭하는 이름이다.”
꿀을 바른 듯 찬란한 금발, 섬세한 이목구비, 놀랍게도 통곡의 군주는 인간 여인이었다.
“내가 믿는 것은 알량한 지저의 신비가 아닌, 나 자신뿐일지니, 지금 이 자리에서 내 권능과 이름을 걸고 말한다.”
그녀는 광오한 태도와는 달리 그 모습이 가냘프기만 해 가장 하찮은 지저 크리쳐조차도 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어느 누구도 여린 외모의 그녀를 얕잡아 볼 수 없었다. 온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숨 막히는 기세 탓이었다.
“나는 그대들과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를 둘러싼 일반 참가자를 향해 있지 않았다. 내뱉는 말과는 달리 마치 도발하는 듯한 오만한 시선으로 VIP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가늘게 눈을 휘어 올린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노골적인 조소.
“같지도 않은 것들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구나.”
“토, 통곡의 군주시여! 부디 우리와의 약속을…….”
깜짝 놀란 블랙 머천트의 임프 하나가 튀어나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임프가 나섰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뒤였으니, VIP룸의 창이 전부 박살 났다.
“이쪽이 얼굴을 보였으면, 그쪽도 얼굴을 보여야지.”
통곡의 군주가 벌인 만행에 경매장 전체가 초토화가 됐다. VIP룸이 무너져 무대를 덮쳤고, 그 과정에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들이 나서 솜씨 좋게 분노한 귀족들을 진정시켜 최악의 상황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완 좋은 암상인들도 폐허 속에서 경매를 진행할 재주는 없었는지, 행사의 연기를 선언하고 말았다.
그렇게 블랙 머천트가 야심차게 주최했던 스페셜 경매의 하루가 허무하게 끝이 났다.
경매가 끝난 뒤에 있었을 블랙 머천트가 주선하기로 한 만남 역시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진우는 배정받은 숙소로 향했다.
“부디 오늘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 부탁드립니다. 사죄가 되진 않겠지만, 오늘 경매에 올리기로 되어 있던 상품 몇 개를 무상으로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내를 자처한 임프 소녀가 그에게 몇 번이나 사죄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그녀의 말은 전혀 듣고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
방금 전의 일을 곱씹듯 생각에 잠긴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VIP룸이 무너지는 바람에 모습을 드러낸 귀족 중 그가 그토록이나 재회하기를 바랐던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재회의 반가움이 아닌 딱딱하게 바싹 메마른 얼굴뿐이었으니, 재회한 상대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사이였던 탓이다.
한때 자신을 노예처럼 부렸던 끔찍한 괴물, 지옥 거미들의 왕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