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98)
던전 견문록-198화(198/319)
# 198
던전 견문록
제 199 화
거미 공작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선에 담긴 증오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거미 공작의 시선에 담긴 것은 근래에 명성이 자자한 정복자이자 전승의 사령관에 대한 호기심뿐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이내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통곡의 군주가 다시 한 번 난동을 피워댔던 탓이다.
아직은 힘이 모자라다.
하이로드에 올라 백작들마저 눈 아래로 볼 정도로 대단한 힘을 얻었지만, 여전히 지저 공작의 강대함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놀라울 정도로 가슴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어떤 감정의 편린조차 내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 평안한 시간이 되시기를.”
안내를 마친 임프 소녀는 짧은 다리를 바삐 놀려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건조한 시선으로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던 김진우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나와라.”
그 싸늘한 음성에 허공이 일렁거리다 툭, 하고 검은 그림자 하나를 내뱉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무례한 걸 안다면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깊게 뒤집어쓴 후드가 그 한마디에 벗겨졌다.
뾰족한 귀에 창백한 피부, 지저에서 흔히 보아왔던 언더 엘프와 비슷한 생김새, 하지만 미간 사이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이 이질적이기만 했다.
“통곡의 군주가 보낸 건가?”
단번에 괴한의 정체를 알아차린 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군주께서는 갑작스러운 만남을 청하는 것이 혹여 무례가 될까, 먼저 의중을 여쭈라 했나이다.”
“보기와는 다르게 제법 예의를 차릴 줄 아는군.”
단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어 경매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위인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오늘 일정도 전부 취소된 터, 안 될 이유도 없지.”
통곡의 군주는 이제 고작 9층을 통합하고, 11층의 백작들을 도모하려는 자신과는 다르게 심층의 공작들마저 발아래 두고 있었다.
흔쾌하기까지 한 그의 허락에 사내가 고개 숙여 인사해 보이고는 다시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통곡의 군주가 찾아왔다.
다시 만난 통곡의 군주는 멀리서 보았던 것보다, 더 여리고 가녀려 마치 어린 소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손짓만으로 경매장을 초토화시킨 진짜 하이로드, 아직 이렇다 할 권능도 개방시키지 못한 자신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반갑…….”
와락.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는 갑작스레 품안에 안겨오는 그녀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늘을 기다려 왔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과 행동, 김진우가 황급히 그녀를 밀쳐냈다.
“보고 싶었어.”
그 우악스러운 손길에 떠밀리듯 물러난 그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뭘 하는 거냐!”
단숨에 치솟은 탐욕의 군주, 특유의 사나운 기세가 그녀를 압박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야…….”
“반가워, 진우야.”
지저의 그 누구에게도 알려준 적 없는 이름이 통곡의 군주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살기를 드러내고 말았다.
“너 누구냐.”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들 것 같은 태도, 하지만 통곡의 군주는 오히려 환하게 웃어 보였다.
두 남녀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대체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친근한 태도를 보이는 통곡의 군주 탓에 그의 얼굴이 경계심과 혼란스러움을 번갈아 내비쳤다.
얼결에 뽑아 든 칼이 시퍼런 예기를 흘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말해라,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친근감, 그는 자꾸만 무뎌지려는 마음에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네 정체가 무엇인지, 전부 말해라.”
뒤늦게 그의 얼굴에 가득한 적의와 경계를 알아차린 것인지, 통곡의 군주가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미안, 내가 너무 성급했지? 너는 아직 나를 모를 텐데 말이야.”
하지만 그다지 반성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다시 정식으로 소개할게.”
여전히 호의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통곡의 이름을 계승한 하이로드이자, 14층 지저의 지배자, 그리고.”
왠지 모르게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매달렸다.
“네 친구, 소희의 보호자이기도 하지.”
‘소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김진우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고 말았다. 최소한 이곳 지저에서는 다시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리운 이의 이름에 그는 창백한 낯빛을 해보였다.
“누, 누나가 살아 있어?”
“역시, 소희의 말이 맞았네. 분명 네가 깜짝 놀랄 거라 말했거든.”
“누나가 살아 있냐고!”
평정심을 잃은 김진우가 버럭 소리를 치니, 통곡의 군주가 연민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비록 사정이 있어서 함께 오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건강해. 그리고 너를 굉장히 보고 싶어 해. 참, 그녀가 너에게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어.”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렴. 나의 작은 진우야.”
***
“너희들은 자유다.”
오직 어둡고 좁은 토굴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김진우는 그 짧은 한마디에 세상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누가 시키지 않으면 제 스스로 밥조차 먹을 수 없었던 그는 그 순간 방향을 잃고 말았다.
만약 곁에서 손을 감싸오는 온기가 없었다면 그는 그대로 아무 것도 모른 채 세상 밖으로 내몰려 지저 어딘가에서 굶주린 크리쳐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진우야, 가자.”
굳은살이 잔뜩 배긴 손을 잡아오는, 지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에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새하얀 미소가 보였다.
“절대 이 손 놓지 마.”
길을 잃은 듯한 막막함은 그 천진한 미소를 본 순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가자.”
소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작은 체구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 것인지 한 점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는 걸음걸이에 그가 안간힘을 다해 발을 맞췄다.
그는 그렇게 마치 그녀의 손을 놓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지상 명제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녀를 따랐다.
하지만 미궁 밖의 세상은 그와 소녀에게 너무도 험난했으니,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지금부터는 누구도 믿지 마. 나 말고는 믿지 마. 아니, 나조차도 믿지 마. 너는 오직 너만 믿는 거야. 알겠어?”
눈빛만큼은 알 수 없는 사명감으로 형형하게 빛나는 소녀였지만, 그녀는 처음 미궁을 나섰던 그날보다 몇 배는 앙상했고 지쳐 보였다.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심층에서도 사납기로 유명한 화식조의 알을 훔쳐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누나,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언제 자신들을 둘러싼 것인지, 날개를 퍼드득거리며 위협적으로 울부짖는 거대한 새들을 보며 김진우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런 그를 보며 소희는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감싸주었다.
“괜찮아, 아직 도망칠 수 있어.”
그는 비록 자신이 실수를 했지만, 그녀를 믿었다.
하지만 그게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가파른 구덩이로 내몰리고 난 후였다.
“누나! 누나!”
“진우야! 너만은 꼭 살아야 해!”
좁은 구멍 너머로 바라본 어둠 속에서 화식조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그의 소녀, 소희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
“어, 어떻게!”
냉혹한 정복자의 차가움도, 위대한 군주의 위엄도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김진우는 마치 작고 보잘 것 없었던 토굴꾼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온몸을 떨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녀에게 직접 듣도록 해. 머지않아 그녀가 너를 만나러 찾아갈 테니까.”
통곡의 군주가 연민의 빛을 담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탄성인지 신음일지 모를 애매한 소리를 내뱉은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한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소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또 소녀를 궁지로 내몬 것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또 안도했다.
“더 듣고 싶어?”
통곡의 군주가 달콤한 음성으로 속삭였고 그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는 조금 곤란한데?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너도 나만큼이나 이곳 지저의 귀족들에게 미움받고 있는 것 같으니까.”
***
방에 들어선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김진우는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뒤늦게 자신이 보인 추태에 치를 떨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지고 난 뒤였다.
그는 이제라도 위엄을 찾을 생각으로 냉엄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이미 볼장 다 봤다는 얼굴로 능글능글 웃어대는 통곡의 군주를 보았을 때, 그가 애써 만들어낸 군주의 가면은 깨어지고 말았다.
“왜 누나는 같이 오지 못했지?”
“말해주고 싶지만, 소희는 아직 네게 그 이유를 알려주기를 원하지 않아.”
“어째서?”
“때가 되면 그녀가 직접 너를 찾을 거야.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해 주겠지. 그때까지는 안달나더라도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너도 알겠지만 소희는 말을 번복하는 법이 없거든.”
그렇게 소희의 성정에 대해 떠들어댄 그녀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다.
자신이 한국어를 누구에게 배웠으며, 배울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또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지저의 귀족들 사이에서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사념과 사념을 주고받았을 때는 얼마나 격 높은 존재였던가. 하지만 눈앞에서 조잘조잘거리는 통곡의 군주는 마치 어린 소녀처럼 천진난만하고 수다스러웠다.
“사실은 내가 너를 만나는 것도 소희는 말렸어,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했지만.”
그녀는 턱을 치켜든 채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작은 승리를 자축했다.
“누나는 어째서 너와 내가 만나는 것을 만류했지?”
한껏 콧대를 치켜세우고 있던 그녀가 다시 웃어보였다.
“내가 너를 만나면, 다른 하이로드의 관심을 끌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이제껏 보여주었던 소녀적인 것이 아니었으니, 마치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처럼 절대적인 존재의 미소였다.
“다른 하이로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더는 친근하지도 천진난만하지도 않은 그녀의 미소는 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네가 네 번째, 그리고 내가 세 번째.”
각기 손가락 네 개와 세 개를 뽑아 들었던 그녀가 이번에는 손가락 두 개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와 첫 번째는 그보다 한참 전.”
“그게 무슨…….”
알아들을 수 없는 숫자 놀음에 무심코 입을 열었던 그가 도로 다물어 버렸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공통점은 하이로드라는 사실이었다.
“맞아, 너 이전에 내가 각성했고, 그리고 나 이전에 각성한 이들이 있어. 그리고 그들은 나와 만난 너를 끊임없이 시험하려고 할 거야.”
요요롭게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 뒤로 지독스러운 광기가 엿보였다.
“아직은 그들의 시험이 버거울 거야. 하지만 이겨내야 해.”
마치 친 남동생이라도 챙겨주듯 살뜰했던 통곡의 군주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그가 위험에 처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놀려댔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는 순간.”
그녀는 유달리 빨간 입술을 핥으며 눈웃음쳤다.
“그들은 너를 갈기갈기 찢어, 삼켜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