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199)
던전 견문록-199화(199/319)
# 199
던전 견문록
제 200 화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소희의 소식을 들은 탓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감정적으로 변했던 김진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항상 지저의 상황은 그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겨우 모아이들에 대한 방비를 마쳤고, 배신자를 솎아 내 한숨 돌렸다고 생각했더니, 어느새 위험은 목을 물어뜯을 듯 소리 없이 다가와 있었다.
이제 막 하이로드의 힘을 각성한 자신만 해도 백작들을 눈 아래로 볼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그보다 한참 전에 각성한 하이로드들은 얼마나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을까. 또 그들의 시험은 얼마나 집요하고 위협적일까.
만약 시간이 흐를수록 하이로드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라면, 자신은 그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당장 눈앞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는 통곡의 군주만 해도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우려와 두려움으로 움츠리는 대신 차라리 웃고 말았다.
겨우 풀어냈다 생각하면 어느새 새로운 올가미가 목을 조이고 있다. 언제나처럼 지저라는 괴물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기를 원하는 모양이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벌써 시험을 받아들일 각오가 선 거야?”
그의 혼잣말을 멋대로 오해한 통곡의 군주가 금세 히죽거리며 끼어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가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돌변한 그의 표정과 기세에 이번에는 통곡의 군주가 의아한 얼굴을 해보였다.
“약하면 먹힌다. 그리고 패자의 뼛조각 하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든 것은 승자의 것.”
먼저 각성하고 후에 각성하고, 그딴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지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내가 아는 지저는 그런 곳이다. 네놈들이 허울 좋게 군주 놀이를 할 만한 곳이 아니란 소리다.”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만약 그들이 나를 시험하려면 그들 자신도 시험받게 되리라.”
오면 부숴버린다. 이제까지 그가 적을 상대해왔던 방식이자,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비록 상대의 격이 전에 없이 높고 강대했지만, 이제껏 그의 적중에 자신보다 약한 존재는 없었다.
그 흔들림 없는 태도에 통곡의 군주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다소 감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희에게 듣던 것과는 다르지만, 이건 이거대로 마음에 드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거만하고 오만했다.
“조금 장난을 쳤지만, 나를 원망하지는 않기를 바랄게.”
애초에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하이로드들의 시험을 받을 뻔했으니, 이렇게라도 그들의 존재를 안 것은 그에게 손해가 아니었다.
“사실은 굳이 내가 너를 찾지 않았어도 그들은 너를 찾았을 거야.”
그런 그를 보며 그녀가 또 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댔다.
“너는 조금 특별하거든.”
눈살을 찌푸린 그에게 그녀가 히죽 웃어보였다.
“새로운 이름을 받은 하이로드는 우리 중 네가 유일하니까.”
***
중단되었던 경매는 바로 다음날 재개되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하루 사이에 새로운 무대를 준비한 블랙 머천트는 전날의 불미스러운 사태를 사과하며, 개별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통곡의 군주에게 이를 갈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참가자들이 경매장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를 보고도 애써 모른 척하는 것을 보면, 블랙 머천트가 약속한 보상이라는 것이 만만치 않긴 했던 모양이다.
통곡의 군주는 전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무대에 올라선 상태였다. 그녀는 말솜씨 좋은 임프 진행자를 곁에 두고 지극히 하이로드다운 오만한 표정으로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랙 머천트가 어떻게 구워삶은 것인지 이번에는 그녀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VIP들에게 굳이 시비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으니, 곁에 선 임프 진행자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느라 창백한 얼굴로 진땀을 흘려댔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대들과 적대하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다.”
전날 그런 소란을 일으킨 것 치고는 지나치게 뻔뻔한 태도였지만, 참가자들 중 그녀의 말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들은 소 닭 보듯 경원시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그런 참가자들을 보면서도 통곡의 군주는 태연했다.
“나는 그대들의 터전을 침범한 저 망령들을 온전히 돌려보내는 법을 알지 못한다. 솔직히 말하면 망령들에게 붙들려 갈기갈기 찢어지든 말든 그것은 그대들의 싸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금세 참가자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하고, 임프 진행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하나 지저의 세력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지상인들이 날뛰어대는 것만큼은 나 또한 보고 싶지 않으니, 내 그대들에게 아량을 베풀겠다.”
정작 스스로가 지상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대 지저의 주인들이여, 전쟁 뒤에 찾아올 재앙을 경계하라.”
하지만 그녀의 말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으니, 재앙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섬뜩함에 험악했던 이들의 표정이 금세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지저의 생명이 다하여 발붙일 곳 없고, 그대들의 터전을 덮친 추악한 망령들과 그대들의 모습이 다르지 않게 되리라.”
VIP룸에서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김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재앙이니 뭐니 잘난 듯이 떠들어 대지만 결국 모아이들은 각성한 하이로드와 대미궁들에 의하여 생명의 근원을 빼앗긴 이들이 지저의 악의에 오염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녀와 자신을 비롯한 하이로드들이야말로 이 모든 일의 원흉이나 다름없었다.
전날 모아이들의 탄생에 관련된 비사를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그의 입장에서는 저렇듯 뻔뻔하게 지껄여대는 그녀가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대다수 지저의 주인들은 그녀의 경고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인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그 추악한 모습을 동경하는 이가 아니라면, 생명의 근원을 담을 그릇을 준비하라. 그것만이 그대들이 지저의 악의에 오염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다.”
말을 마친 그녀의 손짓에 후드를 꾹 눌러쓰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후드를 벗어젖혔다.
거인, 짐승, 반인반마. 제각각의 모습을 한 그들에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이마에 영롱한 빛을 발하는 보석을 박아 넣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통곡의 군주가 말하는 생명의 그릇이라는 것이 저들의 이마에 박힌 보석인 모양이다.
웅성거리는 경매 참가자들을 보며 그때까지만 해도 지켜보기만 했던 임프 진행자가 한 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희 블랙 머천트에서는 통곡의 군주께서 알려주신 비법을 통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께 돌아가고도 남을 정도의 생명석을 확보하였습니다. 약속컨대,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원하시는 분께 무상으로 생명석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저에 불어 닥칠 재앙에 창백하게 질려 있던 미궁의 주인들이 임프가 내민 작고 커다란 색색의 보석을 보고는 반색을 해보였다.
“오오!”
“과연 이런 것을 준비하고 있었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만스러운 얼굴로 블랙 머천트와 통곡의 군주에 대해 불평하던 이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자 결국 지켜보던 김진우도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지저의 재앙을 언급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통곡의 군주나, 타이밍 좋게 끼어들어 생명석을 내미는 블랙 머천트나 마치 시장통에서 싸구려 약을 파는 약장수와 같지 않은가.
저 같지도 않은 연극에 음흉하고 의심 많은 미궁의 주인들이 금세 휘둘리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같은 층의 미궁들끼리도 아귀다툼을 하는 게 지저의 일상이다.
그런데 같은 층도 아닌 아예 다른 지저의 존재라 할 수 있는 통곡의 군주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리도 아니었다.
통곡의 군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한마디 한마디마다 하이로드 특유의 위세가 담겨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이로드의 위엄에 압도당한 그들은 최면과도 같은 그 격 높은 존재감에 홀려 감히 터럭만 한 의심조차 품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하이로드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지저의 정점에 섰어. 그런 그들과 나란히 서려면 너 역시 하찮은 지저의 귀족들 따위는 전부 발아래 두어야 해. 내가 그렇게 되도록 돕겠어.’
통곡의 군주가 히죽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기분 탓인지 블랙 머천트가 내민 생명석과 통곡의 군주를 따라 나선 이들의 이마에 박힌 생명석의 빛깔이 달라 보였다.
***
워낙에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일까. 블랙 머천트가 야심차게 준비한 것 치고는 스페셜 경매의 열기는 낮았다.
경매 첫날이라 특별히 주목을 끌 만한 상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해도 경매장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6,300잼! 6,300잼 나왔습니다! 추가 입찰이 없으면 이쯤에서 이번 상품의 경매를 마감하겠습니다!”
입찰가 역시 전에 치러졌던 정기 경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주최 당사자인 블랙 머천트는 입찰가니 가라앉은 분위기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것이 다시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자, 이제 앞으로 오늘의 경매 마감까지 두 번의 경매만 남았습니다!”
다소 미지근하던 경매장의 분위기도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조금이지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쇠사슬에 묶여 무대 위로 오른 상품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던 탓이다.
“한때는 불패라는 이름으로 지저에 명성을 떨쳤으나, 단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것을 잃은 비운의 거인! 비록 불패의 명성은 옛말이 되었지만 그 타고난 신력과 용맹함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오! 저자는?”
“저자가 왜 여기에!”
경매가 진행되는 내내 미온적이었던 경매 참가자들이 금세 소란을 떨었다. 오랜만에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신이 난 진행자가 요란하게 소리쳤다.
“소개합니다! 심층의 불패 용병단을 이끌던 용병단장! 두 머리 거인족의 전설! 크라스토!”
진행자의 말과 함께 각기 젊고 늙은 두 개의 머리를 한 거인, 크라스토가 무기력하게 무대에 올랐다.
그 시끌벅적함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도 고개를 들어 창 아래 거인을 바라보았다.
“난리통에 휩쓸려 죽었나 했더니, 이런 곳에서 보는군.”
1년간의 전쟁에서 자신 대신 패배의 낙인을 받고 인장마저 강탈당한 거인의 말로는 비참했다. 패배감에 찌들어 탁한 눈동자를 한 저 거인을 보고 누가 전승과 이름을 나란히 하던 불패의 거인을 떠올리겠는가.
“아무래도 물건이 물건이니만큼 다소 높은 5천 잼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지저 전체에 불어 닥친 전란 탓에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가치가 된 다운 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매 참가자들은 크라스토를 사기 위해 혈안이 되어 마구잡이로 경매가를 올려댔다. 덕분에 오랜만에 진행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김진우는 무대 위의 거인을 잠시 바라보는 것으로 흥미를 거두었다.
어차피 그가 생각하는 크라스토의 가치는 이미 끝이 난 상태였다. 불패의 이름도 잃고 인장마저 잃은 거인 따위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전, 불패의 용병 크라스토! 19,300잼에 낙찰되었습니다!”
크라스토는 VIP룸의 누군가에게 19,300잼이라는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 희희낙락한 얼굴로 떠들어대던 진행자가 정색하고는 마지막 경매를 시작했다.
“자, 오늘의 하이라이틉니다!”
경매를 시작하기도 전에 잔뜩 힘이 들어간 진행자의 음성을 보니, 이번 상품이야말로 블랙 머천트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물건인 모양이다.
한껏 뜸을 들인 진행자의 과장된 몸짓에 맞춰 악단이 북을 두들기고 조명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장담하건대 이번 상품은 단 한 번도 경매에 오른 적 없던 것이라 보증합니다!”
호기롭게 외친 진행자가 쾅, 하는 북소리와 함께 상품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