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00)
던전 견문록-200화(200/319)
# 200
던전 견문록
제 201 화
“설마?”
다소 시큰둥한 얼굴로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던 김진우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진행자의 손에 들린 상자를 보았다.
지저에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문양이 치장된 상자는 그가 몇 번이나 보아왔던 물건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한 그 물건은 블랙 머천트 따위가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딸칵.
진행자는 그런 그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꼼꼼하게 봉해져 있던 상자의 봉인을 풀고 물건을 꺼내 들었다.
“저건!”
“이런, 미친!”
몇몇 참가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질했다.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그들은 전에 없이 놀란 얼굴로 입만 뻐끔거릴 뿐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뭐야?”
“저게 뭔데 저리 난리야?”
일단의 소란에서 소외된 대다수의 참가자들은 상품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부릅뜬 참가자들과 진행자의 손에 들린 물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벌써 상품을 알아보신 분들도 계시군요.”
진행자는 물건을 알아본 참가자들의 놀란 얼굴을 보며 꽤나 뿌듯한지 한껏 거들먹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참가자들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소란을 피울 기색을 보이자 진행자는 모처럼만에 달아오른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는지 재빠르게 입을 놀려댔다.
“저희 블랙 머천트가 이 물건을 구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그 내력을 설명 드리자면 몇 날 몇 밤을 지새워도 모자랄 테니,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진행자가 짧은 팔을 쭉 치켜올려 마치 전설의 성검이라도 뽑은 어딘가의 영웅왕처럼 상품을 들어 올렸다.
“저희 블랙 머천트가 주관하는 스페셜 경매! 1일차 마지막 상품은 바로 귀족의 인장입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이었다. 블랙 머천트의 1일차 경매 마지막 상품은 다름 아닌 귀족의 인장이었다.
블랙 머천트가 10층의 남작들을 빼돌려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인장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라 어지간한 그도 이번에는 정말로 놀라고 말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무대에서 눈을 떼고 VIP룸들을 살펴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힘을 줘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밤하늘을 발라놓은 듯 시커먼 특수 창문들뿐, VIP룸에 있을 귀족의 얼굴은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별다른 소란이 없는 VIP룸의 동태나 저 자신만만한 진행자의 태도를 보아하니, 블랙 머천트와 귀족들 간에 무언가 협상이 있지 않았나 하는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자, 3만 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 진행자가 경매를 시작했다.
인장의 등장에 솔깃했던 일반석 참가자들이 시작부터 무지막지한 가격을 부르는 진행자 탓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진행자가 한마디 말을 보탰다.
“참고로 심층에는 여러분들을 괴롭혔던 망령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 백작분들께서 힘써주신 덕분이죠. 그리고 심층에 거할 자격은 오직 귀족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라는 사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기를.”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서 지긋지긋한 모아이들에게 시달리지 않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1년이 넘는 끔찍한 투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귀족의 인장은 벼랑 끝에서 떡 하니 나타난 동아줄이나 다름이 없었다.
“31,000잼!”
“31,500잼!”
아마도 일반석의 참가자들 중에 3만 잼이라는 막대한 비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두었던 자금을 쏟아부을 각오로 경매에 참가했다.
저것만이 살 길이다.
참가자들의 벌겋게 충혈된 눈이 맹목적으로 귀족의 인장을 쫓았다.
***
결국 마지막 상품으로 올라왔던 귀족의 인장은 52,000잼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되었다.
필시 전 재산일 게 분명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귀족의 인장을 얻은 참가자는 8층 미궁의 주인이었는데,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감격한 얼굴로 몇 번이나 제 손에 끼워진 인장을 바라보았다.
“쯧.”
김진우는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우쭐거리는 신생 귀족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도 저자는 모르리라.
전 재산과 맞바꾼 귀족의 인장은 심층 귀족들의 탐욕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모아이들보다 더 끔찍하고 집요한 괴물들이 앞으로 자신의 이웃이 될 거라는 것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혀를 차던 김진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남작의 인장 정도로는 자신도, 대미궁도 만족할 수 없다. 애초에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그에게 중요한 것은 블랙 머천트가 대체 무슨 꿍꿍이로 귀족의 인장을 매물로 내놓은 것이냐였다.
인장의 원주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저 성질 고약한 귀족들이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또한 블랙 머천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수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것으로 블랙 머천트 주관 스페셜 경매 1일차의 모든 경매가 종료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진행자가 요란스럽게 외치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참고로 내일 경매에 올라올 상품들 역시 오늘 상품 못지않을 것이니, 부디 벌써 실망하지 않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꼭 내일 역시 귀족의 인장이 매물로 올라올 거란 말처럼 들려 아쉬움이 가득하던 참가자들의 눈빛이 생기를 띄었다.
***
“대체 무슨 생각이지?”
경매 종료 선언이 나오기 무섭게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암상인을 본 김진우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암상인은 예의 그 얄미운 얼굴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지껄여댔다.
“귀족의 인장, 그게 그렇게 함부로 거래될 만큼 하찮은 물건이었나?”
김진우가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추궁하자 그제야 아, 하는 탄성으로 대답하는 암상인이었다.
“저희는 상인입니다. 제값만 준다면 팔지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제껏 지저를 위하던 태도와는 완전히 상반된 말이었지만, 상인이 이윤을 탐한다는데 뭐라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의도한 것인지 암상인의 표정과 말은 어딘지 모르게 묘한 기색을 풍겨 그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묻고 말았다.
“값만 제대로 쳐준다면 못 팔 게 없다는 말인가?”
“보물 창고에 보물이 많다 한들, 쌓아만 두고 있어서야 먼지 냄새밖에 더 나겠습니까? 저희 상인들의 보람이라면 그렇게 먼지 쌓인 물건에 제 임자를 찾아주는 것입죠.”
암상인의 대답은 명료했지만 그는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눈치 빠른 암상인은 금세 그 기색을 눈치채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뭐가 필요하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경매가 끝나는 그때까지는 얻을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군주님께서 필요한 물건에 지불할 값을 갖고 있다면 말입니다.”
마치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의뭉을 떠는 암상인을 보며 김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수습하고는 암상인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통곡의 군주에 대해 알고 싶다.”
상대는 자신을 아는데 자신은 상대를 모르니 그것만큼 곤란한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회가 났을 때 조금이라도 통곡의 군주에 대해 알아볼 요량으로 암상인을 다그쳤다.
“저희가 아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 이름이나 알고 있을 정도입죠. 다만 한 가지 군주님께 조언을 드리자면…….”
암상인이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통곡의 군주는 군주님의 적이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조언에 그가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군.”
“제가 뭘 알겠습니까. 다만 통곡의 군주께서 군주님을 여러모로 신경 써주는 눈치시니 과연 격 높은 분들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구나, 하고 지레짐작할 뿐입죠.”
“그렇다고 하니 넘어가도록 하지.”
그 뒤로 통곡의 군주가 속한 지저의 상황과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암상인은 두루뭉술한 태도로 이리저리 대답을 회피했다.
그도 더는 캐묻지 않고 암상인의 대답을 믿는 시늉을 해보였다.
“전날 취소됐던 만남 말입니다. 혹시 군주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오늘 자리를 만들어볼까 하는데, 혹시 어떠신지요?”
따로 득이 되는 만남을 주선해 준다 하여 그게 통곡의 군주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암상인의 말에 상대의 정체를 물으니 그저 만나보면 알 거란 이야기만 반복했다.
“갑갑하군. 속 시원히 대답해주는 게 하나도 없으니 마치 놀림이라도 받는 기분이야.”
언짢은 속을 내비치니 금세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암상인이었지만 끝끝내 상대의 정체를 알려주지는 않았다. 어차피 전날 한 번 허락했던 만남이기도 한지라, 김진우는 궁금함을 참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숙소에 돌아가 계시면 제가 따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암상인과 헤어진 그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도대체가 쉬게 내버려두지를 않는군.”
마치 제 방인 양 침대에 드러누워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통곡의 군주를 발견한 김진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어제 한 번 만나는 걸로 끝일 줄 알았어?”
뻔뻔스럽게 지껄여대는 그녀를 보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왜 이렇게 친한 척을 하는 거지? 사실 너와 난 어제 처음 만났는데.”
태도가 시시각각 변하는 통곡의 군주였지만 그 저변에 깔린 것은 영문 모를 친근감과 살가움이었으니 그의 질문은 제법 적절한 것이었다.
“동경했거든.”
뜬금없는 대답에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니 그녀가 구구절절 자신의 과거를 꺼내들었다.
닭장 같은 세상, 그리고 땅굴. 감독관의 감시와 학대. 그리고 생환. 당장 지상에 올라가 던전 베이비 중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그다지 다르지 않을 그녀의 과거사는 그의 질문에 답이 될 수 없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에 대한 동경이라… 지금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그딴 감정놀음을 할 거면 지저가 아닌 지상에 가서 적당한 놈 붙잡고 해. 지저를 모르는 지상인이라면 적당히 장단 맞춰줄 테니까.”
그의 비아냥에 통곡의 군주가 바싹 메마른 얼굴을 해보였다.
“지상인을 믿어? 차라리 음흉한 지저놈들을 믿겠다.”
어딘지 모르게 음습한 증오가 담긴 음성에 김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회한과 증오는 나타난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으니, 다시 평소의 유난스러울 정도로 쾌활함만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난 소희에게 부탁받은 대로 하는 거야. 그녀는 내가 너의 후견인이 되어주기를 원했어.”
“언제는 나를 만나는 걸 말렸다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그녀의 언사를 콕 짚어 지적하니 그녀가 뻔뻔스럽게 지껄여댔다.
“시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고.”
하나하나 파고들어 봐야 절대로 제대로 된 대답은 해주지 않는 그녀인지라 그는 금세 체념하고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김진우의 태도가 시큰둥해지자 괜스레 약 오른 얼굴을 해보인 그녀가 입을 비죽거리다 말했다.
“소희나 너나 느긋한 건 마찬가지구나.”
이제껏 살아남기 위해 어느 누구보다 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쳐왔던 그의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화를 내려던 그는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이 진지하기만 하자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시간이 많지 않아.”
그녀의 말에 담긴 것은 기대와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이었다.
“머지않아 지저에 밤이 찾아 와.”
태양은커녕 달도 별도 없는 지저에 밤이 온다는 말에 그는 일순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눈만 멀뚱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밤이 다 지나고 나면 그때 지저는 ‘황혼’ 이전의 때로 ‘복원’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