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01)
던전 견문록-201화(201/319)
# 201
던전 견문록
제 202 화
밤이니, 황혼이니, 전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투성이었다. 하지만 통곡의 군주가 남긴 속삭임은 기묘할 정도로 그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말간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가 되면, 거짓 위엄으로 올려진 성벽은 무너지고, 도둑질한 권위 위에 세워진 왕좌는 한줌 먼지 만한 가치도 없게 될 거야.”
예언과도 같은 확신은 낮고 깊은 울림이 되어 두 남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우리는 밤을 대비해야 해.”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도 이번에는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밤이라는 게 일정한 시기를 말하는 건가?”
밤낮의 구분이 없는 지저에 찾아올 밤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더니, 그녀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아니, 말 그대로 ‘밤’은 ‘밤’이야.”
어쩐지 스산한 음성. 그녀가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지저 가장 깊은 곳에 거주하는 어둠의 이름이자, 강대했던 옛 군주들을 살해한 끔찍한 짐승의 이름이기도 하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옛 군주들을 몰아내고 지금의 지저를 만든 찬탈자였다.
하지만 통곡의 군주는 밤과 찬탈자는 엄연히 다른 존재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명백한 부정에 김진우는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너한테 말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무엇이든 이야기해 줄 것 같았던 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는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은 여전히 그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휘젓고 있었지만,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은 그녀와 만날 기회는 몇 번이고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방을 나설 때 잡지 않았다.
“후우.”
홀로 방에 남은 그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이미 잘게 쪼개진 지저가 하나로 합쳐질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과거로의 회귀 이전에 찾아올 위험에 대해서는 무지했었다. 어쩌면 통곡의 군주가 이번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보았을지도 몰랐다.
‘밤은 우리의 천적이야. 왜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너를 두고 제거가 아닌 시험을 논했는지 이제 이유를 알겠어?’
그녀는 밤이라는 끔찍한 괴물에 대항하기 위해서 하이로드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체 얼마나 지독스러운 놈이기에 강대한 하이로드들이 연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지 가슴이 갑갑해질 지경이었다.
똑똑.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노크 소리에 흠칫 고개를 들었다. 통곡의 군주가 남긴 불길한 예언의 여운 탓인지 아무 것도 아닌 소리에도 괜스레 날카롭게 소리치고 말았다.
“누구냐.”
“모시러 왔습니다.”
며칠 사이에 제법 익숙해진 임프 소녀 특유의 높고 가는 음성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아, 곧 나가도록 하겠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블랙 머천트와의 약속을 떠올린 그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음…….”
숙소를 나서는 그가 방 안에 도사린 어둠을 훑어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탓인지 방 안의 어둠이 유달리 짙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방을 나선 김진우는 한참이나 구불진 통로를 걸은 끝에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길을 걷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목적지를 물었던 탓에 다소 곤란한 얼굴을 해보였던 임프 소녀가 경쾌한 음성으로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여긴가.”
김진우는 눈앞에 나타난 석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어지간한 거인들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문은 단단한 암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그 견고함이 대단해 보였다.
끼릭, 끼릭.
그가 거대한 문을 살펴보는 사이에 벽에 달라붙은 임프 소녀가 손을 꼬물대니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굉음이 한참이나 이어지다 마침내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그런데 그렇게 벌어진 작은 틈 너머에서 무지막지한 비린내가 풍겨왔다.
“윽.”
지저에서 숱한 괴생물을 만나며 나름대로 악취에 내성이 생긴 그조차도 코를 부여잡고 물러설 정도로 지독스러운 냄새였다.
머리가 아찔해지는 현기증에 그가 주춤주춤 물러나는데 드러난 문틈으로 거대한 황금빛 물체가 보였다.
그런데 그 무언가라는 게 얼마나 거대한지 이제는 반쯤 올라간 석재 문 사이로도 그 전체를 볼 수 없었다.
서서히 윤곽이 드러난다.
황금빛 찬란한 비늘로 온몸을 둘러싼 거대한…….
거대한 석재 문이 3분지 2정도가 올라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문 너머에서 괴수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용?”
마치 전설 속에서 갓 튀어나온 것처럼 생생한 괴수의 모습에 그가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듣기 좋은 말이긴 하지만, 나는 용이 아니다.”
온 세상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음성. 그러고 보니 괴수의 생김새가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다.
“그대는…….”
첫 대면에서 받았던 강렬한 임팩트가 사라지고 나자 김진우는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용이라고 착각했던 거체는 수룡보다는 교룡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광채 찬란한 황금빛 비늘의 아름다움과 우아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거체는 교룡들의 지배자였던 교룡왕조차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드라칸이었군.”
비록 자신이 아는 어느 드라칸의 모습과는 그 위엄과 기세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지만, 분명 상대는 드라칸이었다.
“반갑다, 전승의 사령관이여.”
금빛 비늘의 용족이 서기 가득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네 왔다.
“드라카누스 일족의 수장, 아그립투스다.”
드라카누스 일족이란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반편이 드라칸이었다.
“오르테아가!”
1년 전, 새벽닭이 울던 날 미궁에서 사라졌던 오르테아가를 떠올린 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아그립투스는 지저에 남은 지룡의 후예를 다스리는 용제이자 폭염의 군주라는 이명을 지닌 심층의 공작이었다. 또한 충성 맹세를 저버리고 도망쳐버린 반편이 드라칸의 아비이기도 했다.
“그럼 저는 이만!”
두 거물을 소개시켜 주는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마친 것인지 임프 소녀가 미처 잡을 새도 없이 도망치듯 공동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거대한 석문이 쿵, 소리와 함께 내려앉았다.
“걱정하지 말라. 그저 그대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노라.”
아그립투스의 말에 김진우가 코웃음을 쳤다.
거짓을 말할 줄 모른다는 드라칸이 충성 맹세를 저버리고 도망을 쳤으니, 그의 태도가 삐딱한 게 당연했다.
“어디 할 말이 있다면 하라. 비록 드라칸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믿지 않으나 들어는 보겠다.”
거미 공작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마주하는 심층의 공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무덤덤했다.
그것이 직접적인 원한 관계가 없었던 탓인지, 그도 아니면 하이로드에 오른 스스로의 힘을 믿었던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서로를 대등한 위치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위엄 넘치는 용제가 그의 비아냥에도 저리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 일족이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는 건 사실이다.”
사라진 오르테아가에게 투자했던 다운 잼이 얼마고, 소환석이 얼만지 지금 생각하면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공작씩이나 되는 작자를 만나 계속해서 소모적 감정싸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장에라도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 아그립투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그대에게 부탁하노라.”
그렇지만 뻔뻔함에도 정도가 있다. 그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지자 아그립투스가 재빠르게 그에게 말했다.
“오르테아가를 살려다오.”
“뭐?”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으니, 용제가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드라칸의 긍지와 신용을 져버린 오르테아가는 지금 끔찍한 저주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 뒤의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충성 맹세를 저버린 대가로 끔찍한 저주를 받은 오르테아가가 저주를 벗어나는 방법은 배덕의 대가를 치르고, 충성과 헌신으로 자신의 맹세를 이어가는 것이리라.
“오르테아가를 다시 거두어 다오.”
역시나 아그립투스는 오르테아가를 맡기려고 했다.
“전장에서 한 번 도망쳤던 놈은 또다시 모든 걸 내팽개치게 마련이지.”
긍지 높기로 유명한 드라칸이 아쉬운 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경험이었지만, 이제 와서 그가 오르테아가를 받아줄 이유는 없었다.
영웅급 소환수의 전력이 빈약했던 과거와 지금의 대미궁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전력을 자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도망자의 자리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오르테아가를 받아준다면 나는 뭘 얻게 되지?”
거래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
지금부터는 저 긍지 높고 자존심 강한 용제가 자신의 혈족을 위해 얼마나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김진우가 용제를 보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
“어떻습니까? 제 말처럼 군주님께 제법 유익한 만남이 아니었습니까?”
아그립투스와의 만남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타나 안내역을 자처한 암상인은 생색이라도 내듯 한껏 거들먹거렸다.
“긍지 높은 용제께서 고개를 숙이는 경우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경험이랍니다. 군주님의 휘하에서 도망쳤던 드라칸이 몇 남지 않은 금린의 용족이 아니었다면 아마 용제가 이 정도로 양보하는 경우는 없었을 겁니다.”
김진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비록 단 한 번뿐인 만남이었지만 용제는 그 경망스러운 오르테아가의 아비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고고했다.
만약 오르테아가의 일이 아니었다면 9층의 정복자니 전승의 사령관이니 거들떠도 보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어차피 수명도 길지 않은 지저인 따위에게 얽매여 봐야 잠깐뿐일 거라 생각했을는지도 모르지.”
암상인은 그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군주님께서는 손해 본 것이 없으시지요.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 충성스러운 수하도 생겼겠다, 거기에 심층에서도 가장 강대한 공작 중 하나인 용제의 비호도 얻었겠다. 장사로 치면 대박도 이런 대박이 없습니다요.”
평소에도 공치사가 심한 암상인이긴 해도 오늘은 유독 심한 편이었다.
다소 찡그린 얼굴로 암상인을 바라본 김진우는 뒤늦게 그 동그란 얼굴이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뭐지?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나?”
아무래도 아쉬운 부탁이 있으니 저리 뜸을 들이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그가 그렇게 물으니, 암상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