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02)
던전 견문록-202화(202/319)
# 202
던전 견문록
제 203 화
75. 동상이몽
“이번 경매 말입니다.”
그렇게 입을 뗀 암상인이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물건 하나가 경매에 올라올 겁니다. 그 물건을 꼭 낙찰받으십시오.”
“뭔가 중요한 거라도 나오는 건가?”
뜬금없는 말에 그렇게 되물으니 암상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흐음.”
어떤 물건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당장 입찰을 약속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암상인의 말에 고민하는 얼굴을 해보였다.
“그 상품이라는 게 언제 나오는 거지?”
“그것도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제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말할 수 없다는 암상인의 태도가 정말로 낙찰을 받으라는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중요한 무언가가 경매에 나올 예정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노력해 보도록 하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꼭 낙찰받으셔야 합니다.”
전에 없이 강경한 암상인의 태도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암상인은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눈빛을 보내왔다.
“꼭입니다.”
마치 그의 확답이라도 받은 것처럼 암상인이 몇 번이고 그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
경매는 계속되었다.
첫날 블랙 머천트가 약속했던 것처럼 경매 둘째 날에도 귀족의 인장이 경매에 올라왔다.
단 하나의 인장만이 매물로 나왔던 첫째 날과는 다르게 둘째 날에는 무려 세 개나 되는 남작의 인장이 풀렸다.
전의 경매에서 인장을 낙찰받는 데 실패한 참가자들이 기를 쓰며 경매가를 올려둔 탓에 세 개의 인장은 각기 6만 잼이라는 무지막지한 가격에 낙찰되었다.
임프 진행자는 뿌듯한 얼굴로 둘째 날의 경매 종료를 선언했고, 다시 하루가 지났다.
셋째 날도 다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전날보다 더욱 수가 늘어난 다섯 개의 인장이 경매에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높은 가격에 인장이 낙찰되었고, 참가자들 사이에 희비가 갈렸다.
그렇게 경매장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과열되었다.
하지만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특별할 것 없는 경매가 지루하기만 했다.
“제 발에 불똥이 떨어진지도 모르고 별 시시껄렁한 데 심력을 소모하는군. 이쪽이나 저쪽이나 저층 놈들은 멍청해.”
불쑥 끼어든 음성에도 김진우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무대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어 잠시 뒤편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헤, 이제 놀라지도 않네?”
통곡의 군주가 그런 그를 보며 왠지 모르게 실망했다는 투로 입을 비죽였다.
“뭐, 멋대로 해.”
“재미없네.”
첫째 날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VIP룸에서 살다시피 하는 그녀였던지라 새삼 이제 와 날 선 태도를 보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게다가 찾아올 때마다 지저의 이런저런 정세를 이야기 해주는 그녀의 방문은 꽤나 유익한 편이었으니 굳이 내쫓을 이유도 없었다.
오늘도 무언가 이야기할 거리가 있는지 그녀가 슬쩍 분위기를 잡았다.
뭔가 심각한 이야기가 오고 갈 것 같자, 묘인족 여성이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나가 있도록 할 테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따로 호출하소서.”
“그냥 있어도 되는데? 번거롭게 뭘 나가고 그래.”
그런 그녀를 장난기 가득한 음성이 붙잡았다.
“귀하신 분들께서 이야기 나누시는 데 방해가 될까봐.”
“난 상관없어,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통곡의 군주가 능글맞은 얼굴로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는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혹시라도 들어선 안 될 이야기를 들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는 것이 비천한 노예의 신세였으니 그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창백한 얼굴로 몸만 떨어댔다.
“쯧.”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푸른 눈동자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것은 지독스러울 정도로 가학적인 잔인함,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김진우가 짧게 혀를 차고는 손짓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도록 하지. 나가 있도록.”
“네!”
묘인족 여성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망치듯 VIP룸을 나섰다. 혹시라도 통곡의 군주가 다시 자신을 붙잡을까 그 걸음은 나는 듯했다.
“쓸데없는 심술은 그만두도록 하지.”
적이라면 그보다 몇 배는 더한 행동도 할 수 있는 그였지만, 최소한 통곡의 군주처럼 아무나 괴롭히지는 않았다.
솔직히 묘인족 여성이 어떻게 되든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살가운 태도 뒤로 가끔씩 드러나는 광기와 잔인함이 괜스레 더 불편해 그는 기어코 한소리를 하고 말았다.
“못된 것만 배웠군.”
막상 내뱉고 나니 어린아이라도 꾸짖듯 유치한 말이 나오고 말았지만,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하는 행동은 마치 과거 토굴꾼들을 괴롭히던 감독관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우리 진우는 상냥하네?”
무안할 만도 하련만 통곡의 군주는 오히려 그에게 더욱 더 친한 척했다.
“더는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하지만 그럴수록 김진우의 표정은 더욱 더 차가워졌다.
하이로드에게 있어 이름이란 단지 호칭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가 외눈박이 군주의 진명을 깨닫고 각성에 이르렀고, 탐욕의 대미궁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런 상황에서 적, 아가 확실치 않은 통곡의 군주가 자꾸만 이름을 불러대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진우를 진우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를까?”
“끄응.”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이름을 알고 있는데 다른 이름으로 부르라는 것도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직 제대로 된 통성명도 하지 않은 주제에 지나치게 친한 척하는 건 배알이 꼴리는군.”
솔직한 심정을 내놓았더니 어쩐지 투정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명료했다.
아군이라면 이름을 대라. 자신의 진명을 알려주는 것만큼 큰 신뢰도 없을 테니.
“내가 이름을 알려주면 조금은 나를 믿어주려나.”
말이야 그렇게 한다지만, 함부로 이름을 가르쳐 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반응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는 덜컥 자신의 진명을 알려왔다.
“캐서린. 그게 내 이름이야.”
[이제껏 몰랐던 통곡의 군주의 진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통곡의 군주는 한때 지저를 다스리던 열 군주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지난 곳에 남은 것은 비탄과 슬픔, 그리고 절규뿐이었으니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비록 그녀가 과거의 그 공포스러웠던 군주 본인은 아니지만, 그 이름과 권능을 온전히 계승한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통곡의 군주, 캐서린의 권능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지저의 현자, 겨우살이 나무들이라면 그녀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생각지도 못하게 그녀의 진명을 알게 된 김진우는 다소 얼빠진 얼굴을 해보였다.
“평범하지? 뭐,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누가 공들여 지어준 이름은 아니라서 말이야.”
대다수 던전 베이비들의 이름은 지저에서 죽어간 어느 토굴꾼의 이름을 빌려다 쓴 것, 그녀 역시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제 좀 나를 믿을 수 있겠어?”
“음…….”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없던 신뢰가 갑자기 싹트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의 진명을 알려준 것이 꽤나 큰 결단이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덕분에 그도 더는 매몰차게 대답하지 못하고 괜스레 딴청만 피워댔다.
통곡의 군주, 캐서린도 그런 그의 내심을 헤아린 것인지 더는 다그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름은 그렇다 치고.”
중간에 이야기가 도는 바람에 미뤄두었던 이야기를 그녀가 다시 꺼내 들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경매의 하이라이트! 귀족의 인장이 마지막 경매 상품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네 번째 경매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
나흘이 지나고 네 번의 경매가 끝이 났다. 그사이 인장을 얻어 새롭게 지저 귀족이 된 이들의 수가 무려 열넷이었지만 김진우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블랙 머천트가 야심차게 준비한 경매인지라 내심 기대했건만 딱히 그의 눈을 잡아끄는 상품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경매장을 찾은 귀족들이었다.
네 번째 경매가 끝나는 날, 아나톨리우스가 찾아왔다. 그는 심층의 정세를 알려주었고, 그 과정에서 김진우는 파르테논과 디나리온이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브륜테스를 비롯한 백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 역시 듣게 되었다.
“이제 망령들도 몰아냈으니, 제대로 판을 벌려보려고 한다. 부디 그대가 그간의 내 헌신적인 조력과 호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표정 없는 철가면이야 여전했건만 왠지 모르게 초조한 분위기의 아나톨리우스는 몇 번이나 그간의 협력 관계를 들먹이며 조력을 당부하고는 돌아갔다.
“후.”
예전이라면 꽤나 머리가 복잡했을 상황이었지만, 지금의 김진우에게는 11층 백작들의 사정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증오스러운 거미 공작과 재회하고, 용제까지 만나고 나니 어쩐지 백작들의 세력 싸움이 하찮게 느껴졌던 탓이다.
실제로 다시 만난 아나톨리우스는 전처럼 위협적이지 않았으며, 더 이상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스스로가 하이로드에 올라 귀족들의 세력 다툼에서 한 걸음 떨어지게 되었으니, 김진우의 관심은 그저 백작의 인장에만 한정되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장에 11층 백작을 무릎 꿇리고 인장을 강탈한다거나, 11층을 정복할 정도의 힘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개인의 무력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쌓아온 백작들의 저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조력자가 생겼으니, 용제와 통곡의 군주였다.
용제는 저주로 몸이 썩어 들어가는 혈족을 살리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백작의 인장을 구해주겠노라 약속했다.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백작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다오.”
아그립투스는 휘하의 백작 하나를 쳐내 인장을 강탈하는 손쉬운 방법 대신에, 심층에 전쟁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과연 긍지 높은 드라칸답게 일을 해결하는 데 있어 그 고지식함이 차라리 답답할 지경이었다.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반편이 드라칸 하나를 받아주는 대신 얻는 대가로는 꽤나 괜찮은 보수였으니까.
통곡의 군주, 캐서린의 조력은 용제의 그것보다 더욱 더 즉각적이었다.
“생명석을 지닌 존재들은 하이로드의 권위를 거부할 수 없어.”
전날 지저의 재앙을 예견하며 그 해답으로 내놓았던 생명석에 그러한 조치가 있었을 줄은 그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지저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생명석이었다며 호언장담했다.
지금 당장은 생명석을 받아간 이들이 소수에 불과하지만 곧 그 수가 지저 전체를 덮을 정도가 될 거라 확신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그가 경매장의 무대 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 다섯 번째 경매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다섯 번째 경매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상인이 나타났다.
“제가 전에 말씀드린 그때가 지금입니다.”
암상인의 말에 그는 반사적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낙찰받으신 참가자 분께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다음 상품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방금 막 경매 하나를 마친 진행자가 경쾌한 음성으로 새로운 상품의 경매 시작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