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03)
던전 견문록-203화(203/319)
# 203
던전 견문록
제 204 화
“지금 말인가?”
새롭게 상품을 올리는 진행자의 태도가 너무도 여상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김진우는 과연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낙찰을 받아야 할 만한 상품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상품이 조금이라도 특별한 것이었다면 저리 평범하게 상품을 소개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네, 지금입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 하지만 암상인의 음성은 확고했다. 이쯤 되니 그도 상품의 정체를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뭐기에 그렇게까지 강권하는 거지?”
그의 말에 암상인이 대답 대신 되물어왔다.
“제가 한 번이라도 군주님께 손해되는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까?”
몇 번인가 제 이득을 챙기려고 수작을 부린 적은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암상인은 늘 그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만을 해왔다.
이 정도까지 강권하는 경우는 전에 없었던지라, 그는 점점 더 물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굳게 입을 다문 암상인에게서 물건의 정체를 듣는 것은 쉽지 않아보였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진행자가 전달받은 상품을 쑥 내밀어 보였다.
“이번 상품은 꽤나 신비로운 이력을 가진 물건입니다!” 진행자의 손에 들린 것은 빛조차 바래버린 보석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사용되어본 적 없는 고대의 소환석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소환석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제껏 발견되었던 모든 소환석들이 그러하듯이 꽤나 대단한 무언가가 들어있을 거라 추측됩니다!”
그토록이나 암상인이 강권하던 상품의 정체는 고대의 소환석이었다. 이런 저런 경로로 몇 번이나 소환석을 사용해본 적 있는 김진우인지라 진즉부터 탁한 빛깔을 한 보석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음.”
김진우는 다소 가라앉은 눈동자로 암상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소환석을 통해 모리건을 얻었고 헤임달과 지저목들을 얻은 그였으니만큼 소환석의 가치를 폄하할 생각은 없었지만, 암상인의 호들갑에 비해서는 다소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릅니다.”
그런 그를 보며 암상인이 의미심장한 얼굴을 해보였다.
“어차피 알게 되겠지.”
한결같은 암상인의 태도에 어깨를 으쓱해 보인 그가 이내 무대를 바라보았다.
일반석의 참가자들은 고대의 소환석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 시큰둥한 얼굴로 진행자가 떠들어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기야 고대의 소환석에서 나온 영웅들은 분명 강력한 존재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고분고분 소환자의 명령을 따르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저들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운이 좋다면 소환석 안에 엄청난 존재가 들어있을지 모릅니다! 자신의 운을 시험해볼 분이 누구인지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
말과는 달리 임프 진행자의 태도는 다분히 기계적이었다.
애물단지 같은 고대 소환석의 존재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매장의 분위기를 눈치챈 것인지 진행자는 이번 경매를 서둘러 마무리 짓고 다음 상품을 소개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작가는 5천 잼으로 하겠습니다!”
행운이니 뭐니 거창하게 소개한 것치고는 꽤나 저렴한 경매가였다.
“5,100잼.”
“5,200잼.”
경매가는 느리게 올라갔다. 경쟁이랄 것도 없이 느릿느릿하게 입찰하는 일반석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열의라고는 터럭 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되도 그만, 안 되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수동적인 태도에 진행자가 양념을 쳤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 앞에 놓여 있는 소환석은 그 어느 누구도 사용해본 적이 없는 완전한 새것입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엄청난 행운인지, 또는 불행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자체로도 희귀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이제는 멸망해버린 10층의 남작들, 타락하여 제 미궁을 치장하는 데만 급급했던 그들이라도 경매에 참가했었다면 모를까.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애물단지를 단지 희귀하다는 이유로 큰 돈을 투자할 만한 이는 없었다.
“5,800잼! 5,800잼! 더 없습니까! 열을 셀 때까지 더 입찰하시는 분이 없으시다면 이번 상품은…….”
“군주님.”
아직까지 경매에 참가하지 않고 무대의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김진우가 암상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부디 그대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겠다.”
그가 손짓해 묘인족 여성 도우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6,500잼.”
이제껏 한번도 입찰하지 않았던 그였던지라 묘인족 여성이 다소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 VIP룸에 설치된 관을 잡았다.
“여덟! 아홉!”
그 사이에 진행자가 헤아리는 숫자는 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6,500잼!”
아슬아슬하게 경매 종료 선언 직전에 입찰가를 부른 묘인족 여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 6,500잼 나왔습니다!”
호들갑을 떠는 진행자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경매가가 오른 것은 좋지만,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할 경매가 다소 지연되자 다소 난감한 모양이었다.
“6,500잼! 6,500잼 이상 없으십니까!”
“7,000잼!”
막 숫자를 세려던 진행자가 새로운 입찰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8,000잼.”
난데없는 훼방에 눈살을 찌푸린 김진우가 다시 입찰을 지시했다. 어느새 능숙한 경매 도우미의 면모를 찾은 묘인족 여성이 낭랑한 음성으로 경매가를 올렸다.
“오! 아무래도 이번 상품이 귀하신 분들의 관심을 끈 모양입니다!”
이제 슬슬 신바람이 나는지 진행자가 활기 찬 어조로 추가 입찰자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1만잼!”
또다시 VIP석의 누군가가 입찰을 시도했다.
“11,000잼!”
김진우는 이에 질세라 1000잼을 더 얹어 다시 입찰했다. 하지만 상대 역시 제대로 작정한 것인지 금세 금액을 더 얹어 입찰해왔다.
“오오, 누구지?”
“귀족들은 고대 영웅을 길들일 묘수라도 있는 것인가?”
다소 시들해졌던 경매장의 분위기가 다시 달아올랐다. 대다수의 참가자들은 상품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VIP들의 경쟁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는 눈치였다.
“13,000잼!”
“14,000잼!”
경매가가 빠르게 치솟았다. 이제는 어지간한 인기 상품 이상으로 가격이 오를 기세였다.
“19,000잼!”
“20,000잼!”
김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생각한 고대 소환석의 가치는 딱 2만 잼이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소환석에 귀한 다운 잼을 이 이상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그대와의 약속에 더 성의를 보여야 할 이유를 말하라.”
그래서 그는 드물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암상인을 압박했다.
“20,000잼! 20,000잼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진행자가 달아오른 얼굴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VIP룸이 몰려 있는 2층을 바라보았다.
“귀하신 분이라면 이 소환석의 가치를 알고 있으실 거라 믿습니다!”
눈이 있다면 어서 더 불러보라는 듯, 은근한 말투에 일반석의 참가자들이 흥미로운 눈초리로 사태를 관망했다.
“내가 계속해서 이 되도 않을 자존심 싸움에 장단을 맞춰야 할 이유를 말하라.”
김진우가 생각하기에 이름 모를 경쟁자도 굳이 소환석이 필요해서 경매에 참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이제는 자존심이 걸린 게 아닐까하고 막연히 짐작했다. 그도 아니면 심술이든지.
암상인은 김진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을 뿐이다.
“흥.”
그 모습이 괜히 얄미워 코웃음을 친 김진우가 묘인족 도우미에게 손짓을 보냈다.
“25,000잼.”
묘인족 도우미가 다소 의외라는 얼굴을 해보였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관 너머로 새로운 입찰가를 전달했다.
“아무래도 귀하신 분들의 눈에는 소환석의 숨겨진 가치가 보이는 모양입니다!”
경쟁을 유도하듯 은근히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투가 둘 외에도 다른 귀족들도 참가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여전히 김진우와 이름 모를 경쟁자 외에는 입찰에 관심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참가자들은 쓸모도 없는 소환석을 두고 벌어진 귀족들의 자존심 대결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30,000잼…….”
“30,000! 30,000잼! 30,000잼 나왔습니다!”
김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쯤 되니 이리도 기를 쓰고 낙찰을 방해하는 누군가의 얼굴이 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서늘한 눈으로 VIP룸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특수하게 고안된 VIP룸의 불투명한 창들 너머에 누가 어떤 얼굴로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묘인족 도우미가 그의 의향을 물어왔다. 그녀는 터무니없이 높아진 경매가에 조금은 놀란 듯했다.
“계속하도록 하지.”
“만약 저쪽에서 계속해서 입찰을 훼방 놓을 생각이라면, 조금은 과감하게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놀란 건 놀란 거고 경매는 경매라고, 암상인이 신경 써서 배치해준 경매 도우미답게 묘인족 여성은 승부수를 띄울 것을 조언해주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다.”
김진우는 흔쾌히 도우미의 말을 들어 주었다.
“50,000잼.”
그는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매가를 올렸다. 마치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는 듯한 터무니없는 금액, 이번에는 끈질기게 들러붙었던 상대도 쉽사리 입찰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더 없으십니까! 만약 추가로 입찰하실 분이 없으시다면 이번 경매는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자가 수를 세었다. 하지만 그 수가 열이 되어가도록 추가 입찰은 없었다.
“고대의 소환석에 낙찰되신 귀인께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디 그 과감함만큼이나 큰 행운이 따르기를 바라겠습니다!”
버리는 상품이라 생각했던 물건이 경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귀족의 인장 이상의 고가에 낙찰되자 진행자도 기분이 좋았던 모양인지, 희희낙락한 얼굴로 답지 않은 덕담을 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상품을 낙찰받은 김진우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과감하게 금액을 올려 낙찰받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라는 게 필요 이상으로 컸다. 그러니 상품의 정체도 모르는 그의 속이 좋을 턱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평소라면 호들갑스럽게 이런저런 말을 주워 섬겼을 암상인이 담백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이색적인 모습에 김진우가 조금은 얼굴을 풀어보였다.
가타부타 말없는 태도에서 조금이지만 진심을 보았던 탓이다. 이로써 암상인에게 빚을 지워두었다고 생각하니 5만 잼이라는 액수가 마냥 아깝지만은 않았다.
셈에 밝은 암상인이라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보답할 게 분명했으니까.
“여기…….”
암상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잠시 자리를 비웠던 묘인족 여성이 잘 봉인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가급적이면 이곳이 아닌 안전한 곳에서 소환석을 사용하시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려 5만 잼이나 주고 산 소환석 속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당장에라도 확인하려던 김진우가 암상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바라는 게 너무 많군.”
“이건 절 위해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군주님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찝찝하게 만드는 그 음성에 그는 결국 소환석을 다시 상자에 담았다.
***
“어딨어?”
암상인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나타난 캐서린이 대뜸 물었다.
“뭐?”
“소환석 말이야. 어디 있냐고.”
김진우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너였나?”
아무래도 5만 잼이나 되는 지출을 하게 만든 원흉이 바로 그녀였던 모양이다.
“어차피 경매라는 게 이런 재미 아니겠어?”
변명은커녕 뻔뻔스럽게 지껄여대는 얼굴이 밉살맞기만 했다.
“그보다 어디 있냐고.”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채근해오는 그녀를 본 그가 버럭 짜증을 부렸다. 신경질적인 그의 표정을 본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너 설마 고작 5만 잼 썼다고 지금 짜증 부리는 건 아니겠지?”
하이로드씩이나 되어서 고작 다운 잼 몇 개에 그리 심술을 부리냐고 오히려 입을 비죽이는 그녀를 보니 화를 내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어차피 지상의 협회를 털며 얻은 무지막지한 다운 잼이 수중에 있었으니,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큰 지출도 아니었다.
그저 바가지 쓴 것만 같은 기분에 소시민적인 근성이 발동했을 뿐이다.
그런 그를 향해 캐서린이 기묘한 시선을 보내왔다.
“너 설마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렇게 열을 올린 거야?”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그녀는 마치 소환석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너는 이게 뭔지 알고 있어?”
무심코 품속의 상자를 꺼내 그렇게 물으니 그녀의 표정이 돌변했다. 번들거리는 시선에 담긴 탐욕의 빛깔에 그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캐서린은 상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너…….”
김진우가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날을 세웠다.
“이로써 오늘의 경매를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욱 알찬 상품으로 여러 귀인분들을 찾아뵙겠습니다!”
창밖으로 경매 종료를 선언하는 진행자의 유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어쩐지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내려앉은 VIP룸의 분위기는 위태롭기만 했다.
“미치겠군. 감이 좋은 거야, 아니면 따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거야.”
한참만에 입을 연 캐서린이 묘인족 여성을 밀어내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거 그냥 소환석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