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04)
던전 견문록-204화(204/319)
# 204
던전 견문록
제 205 화
당장에라도 소환석의 정체를 알려줄 것 같았던 그녀였지만 갑작스레 문이 열리고 나타난 암상인이 타이밍 좋게 캐서린의 입을 막았다.
“지금은 안 됩니다.”
마치 이 안의 상황을 엿보고 있었던 것 같은 태도,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구나?”
앞뒤 다 잘라먹은 짤막한 한마디에 암상인은 어쩐 일인지 곤란한 얼굴로 그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집요한 시선이 한참이나 암상인을 따라다녔고, 결국 체념하듯 암상인이 말했다.
“부디 저희 블랙 머천트와의 맹약을 잊지 말아주시기를.”
은근한 어조에도 그녀는 여전한 얼굴이었다.
“맹약은 무슨. 그냥 기브 앤 테이크지.”
“끄응.”
드물게 말을 얼버무리는 암상인이 거듭 간절한 시선을 보내왔다.
“뭐, 좋아.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 나도 주제넘은 참견은 그만하도록 하지.”
따로 생각이 있는 것인지 그녀가 금세 태도를 바꿔 보였다.
“지금 나 빼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대화에서 소외되어버린 김진우가 뒤늦게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지만, 캐서린과 암상인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신경 쓸 거 없어.”
“아무래도 나를 두고 하는 이야기 같은데, 난 알아야겠어.”
멋도 모르고 설치다가 꼭두각시 꼴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잔뜩 날이 선 음성으로 그들을 압박했다.
하지만 암상인과 캐서린이 누군가.
하나는 지저에서 닳을 대로 닳은 장사꾼이었고, 하나는 강대한 만큼이나 음흉한 하이로드였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살벌한 기세를 무시했다.
“그냥 넌 하나만 알면 돼.”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한마디 더 하려던 김진우가 뜬금없는 캐서린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너 꽤나 좋은 후원자를 만났어.”
“통곡의 군주시여!”
알 수 없는 말의 의미를 그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암상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껏 보여주었던 과장된 태도가 아니라 정말로 놀라 소리친 듯 다급한 음성에 김진우도 놀라고 말았다.
“너희들, 설마 지금 ‘미계약’ 상태인 거야?”
“군주님! 더 이상의 발언은 엄연히 맹약 위반입니다.”
암상인은 전에 없이 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항의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적의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이로드, 한낱 임프의 기세에 위축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암상인을 노려보았다.
“너, 아니 너희 블랙 머천트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지?”
“이곳은 군주께서 속한 지저가 아닙니다. 이쪽은 이쪽만의 룰이 있으니, 부디 더 이상의 간섭은 말아주십시오.”
지금이 암상인의 진정한 모습일까. 작고 볼품없는 외모에 가려져 있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났다.
“좋아, 나도 너희들에게 받은 것이 있으니, 더 이상의 참견은 하지 않겠어.”
캐서린은 의외로 선선히 물러났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녀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경고 하나만 하도록 하지.”
그녀는 어느새 하이로드의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다.
“만약 원하는 것이 있다면 발치에 엎드려 간청하라. 그 알량한 머리통을 믿고 그를 기만한다면 그 끝이 결코 좋지 않을지니.”
실로 광오한 말이었다. 블랙 머천트라 하면 강대한 심층의 귀족들조차도 한 수 접어주는 단체,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암상인은 가장 비천한 노예들을 대하는 듯한 취급을 당하고도 어쩐 일인지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둘러 고개를 숙여 보였을 뿐이다.
“좋아, 알아들었을 거라 믿겠어.”
그렇게 암상인에게 경고한 캐서린이 이번에는 김진우를 바라보았다.
“비록 강탈당한 권능과 영광이 지저에 흩어져 그 위세가 예전만 못하다고 하나, 하이로드는 엄연한 정당한 지저의 지배자.”
그녀의 음성은 암상인을 대할 때보다 몇 배는 차가웠다.
“너의 무지는 결코 네 운명을 변호하지 못할 것이니, 두 눈 똑바로 뜨고 흐림 없는 눈으로 매사를 지켜보라. 너를 기만하고 네 것을 탐하는 자를 용서치 말라.”
차라리 적의마저 느껴지는 음성에 그가 쉽사리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흥, 오늘은 도저히 수다 떨 기분이 아니야. 이만 가보도록 하겠어.”
그렇게 말한 그녀가 VIP룸의 문을 열었다.
“내 말 명심해.”
나가기 직전 남긴 그녀의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곱씹고 말았다.
풀썩.
그녀가 방을 나서자 버티고 버티던 묘인족 여성이 기어이 쓰러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평범한 묘인족에게는 하이로드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살벌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김진우와 암상인은 쓰러진 묘인족 여성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암상인은 어쩐지 켕기는 것이 있는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고, 김진우는 캐서린이 나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럼 저는 이…….”
“아무래도 나만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도망치듯 빠져나가려던 암상인을 불러 세운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너와 그녀만이 알고, 나만 모르는 이야기가 대체 뭐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뭔지 말해봐.”
캐서린의 이야기는 단지 아주 작은, 아주 작고 작은 틈을 열어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김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저희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들은 전도유망한 미궁의 주인분들을 후원하여…….”
“나도 경고하지.”
변명하듯 말을 주워섬기는 암상인을 보며 그가 눈을 번뜩였다.
“숨기지 마라. 거짓을 고하지 마라. 다시는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라.”
그저 살아남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캐서린의 시선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그의 심장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지금.”
김진우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바보가 된 기분이거든.”
암상인은 돌아갔다. 그 모진 압박에도 암상인은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경매의 마지막 날을 기약했을 뿐이다.
“부디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이로드의 기세에 노출되어 온몸을 와들와들 떨어대면서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던 암상인은 확실히 구린 구석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으니 그저 약속한 경매 마지막 날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후우.”
어쩐지 이번 경매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점점 더 머릿속이 복잡해지니, 차라리 대미궁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던 그는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야.”
마치 이웃집 문을 두들기는 넉살 좋은 사내처럼 문을 빼꼼 열고 나타난 캐서린은 방금 전에 보여주었던 살벌한 기세는 온데간데없는 모습이었다.
“아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너한테 어느 정도는 이야기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이지.”
그렇게 서두를 뗀 그녀가 그의 곁에 털썩, 하고 엉덩이를 붙였다.
“근데 그 전에 먼저.”
캐서린은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각성하게 됐는지,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김진우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법, 이쪽의 속내는 꽁꽁 숨겨두고 상대의 이야기만 들으려고 해서야 정보의 질만 낮아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망설임 끝에 자신이 각성하게 된 계기와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았다.
하지만 가장 먼저 접했던 광휘 군주의 파편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그도 하지 않았으니, 완전히 그녀를 믿을 수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지금은 너와 블랙 머천트의 경매장에 있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가 끝이 났다. 하지만 캐서린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이 꼬인 모양이네.”
한참만에 입을 연 그녀가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계승자에게 주어져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전해지지 않았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그녀의 말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참을 수 없는 의문이 잇새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는 차분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외눈박이 군주에게는 두 마리 까마귀가 있었지.”
까마귀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모리건이 떠올랐다. 검은 흉조라는 이름을 얻기 전, 그녀의 이름은 전장의 까마귀였다.
“하나는 밖을 돌며 군주의 세를 과시했고, 하나는 안에 남아 군주의 곁을 지켰어.”
그녀는 행동하는 까마귀, 검은 흉조(凶鳥)와 다스리는 까마귀 백오(白烏)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각기 두 마리의 까마귀 중 하나는 군주의 욕망과 생각을 집행(執行)하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성과 기억을 고수(固守)한다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네 곁에는 흉조와 백오 모두 있었어야 해. 하지만 지금 네게 있는 건 흉조뿐이야. 정상적이지 않은 거지.”
그녀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백오가 나타나지 않은 게 문제야. 만약 백오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네가 무지하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까운 얼굴로 한탄하는 그녀의 얼굴이 자못 심각했다.
“흉조는 단순히 싸우고 말살하는 집행자에 불과해. 하지만 백오는 다르지.”
그녀는 검지로 머리를 툭툭 두들겨 보였다.
“백오는 외눈박이 군주의 기억과 권능 그 자체야.”
캐서린은 지금 이대로는 반쪽짜리 각성밖에 되지 못한다며, 그의 무지의 이유를 찾았노라 말했다.
“맞아, 나는 온전히 통곡의 기억을 계승했어.”
남의 일이라면 남의 일, 하지만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얼굴이 어두웠다. 이유를 물으니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나까지. 모두 외눈박이 군주의 계승자를 기다리고 있었어. 끔찍한 괴수, ‘밤’을 몰아냈던 장본인이 외눈박이 군주였으니까.”
그녀는 이제껏 보여주지 않았던 초조한 얼굴로 방안을 서성이다 말했다.
“안 되겠어.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만나봐야 할 거 같아.”
“그들과 사이가 나쁘다고 하지 않았나?”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야. 이대로라면 우리들은 전부 ‘밤’에게 살해당하고 말아.”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황인지 그녀는 정말로 여유가 없어보였다.
“놀이는 여기까지야. 나는 이만 가봐야겠어.”
캐서린은 당장에라도 경매장을 떠날 것처럼 말했다.
“잠깐!”
김진우는 막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누나는…….”
“애틋하다, 애틋해. 지금 상황이……. 됐다. 소희는 때가 되면 제 발로 널 찾아갈 거야. 그리고 소희가 아니더라도 내가 먼저 너를 찾을 테니 너무 걱정 말도록 해.”
그래도 마지막이랍시고 제법 친절을 베풀어 오는 그녀의 태도에 그가 복잡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그녀는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그것이 원래 그녀의 모습인지 그도 아니면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홀로 남은 그는 그녀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원래대로라면 군주의 그릇은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그 어떤 파편과도 만날 수 없어. 아무래도 뭔가가 꼬여버린 것 같아.”
캐서린은 모리건이 단순한 고대의 영웅급 소환수가 아니라 말하며, 그녀와의 만남이야말로 우스투스 이전에 일어난 최초의 조우라 말했다.
또한 그것이 결단코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며, 심각한 얼굴을 해보였었다.
김진우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만약 모리건과 먼저 만난 것이 완전한 각성에 방해가 되었다면, 그건 누군가가 부린 수작질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아나톨리우스!”
동맹에 대한 증표, 협력에 대한 선금으로 소환석을 보내주었던 철면의 거인을 떠올린 그가 이를 갈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