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06)
던전 견문록-206화(206/319)
# 206
던전 견문록
제 207 화
김진우는 단번에 암상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암상인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심층의 분들도 이제는 군주님의 동태를 파악하느라 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암상인은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직도 염려가 되신다면 지저에 맹세하겠습니다. 대미궁의 복원품은 진짜 대미궁에 미치지 않습니다. 군주님의 행보에 방해가 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겁니다.”
지저의 신비에 대고 맹세까지 한 마당에 거짓을 고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군주님께서도 저 복원품과 아예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라, 저도 억울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되도 않을 소리는 하지도 말라며 눈을 부라리는 그를 향해 암상인이 쭈뼛대며 말했다.
“혹시, 큰머리 난쟁이들이라고 기억하십니까?”
나가 마법사들이 사고를 쳤을 때, 지저에 새롭게 탄생한 종족이 셋이었고, 그리고 그중에 하나, 그가 쓸모없다 여겨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에게 팔아버린 종족이 있었다.
“설마?”
“맞습니다. 그들이 바로 대미궁을 복원한 주인공입니다.”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제가 그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저에 귀하지 않은 미궁 없고, 쓸모없는 이 없다고 말입니다.”
약이라도 올리려는 것일까. 암상인이 계속해서 입을 놀려댔다.
“큰머리 난쟁이들은 오랜 시간 지저에 나타나지 않았던 ‘미궁 설계자’입니다.”
속이 쓰렸다. 하지만 그때의 그로서는 큰 머리 난쟁이의 가치를 알 길이 없었으니, 이제 와서 아쉬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런 그의 내심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암상인이 그를 위로해 주었다.
“장담컨대 그들이 군주님의 품에 있었다면 9층의 미궁들이 소멸되었을 때 휩쓸려서 사라지고 말았을 겁니다. 그리고 당시의 군주님으로서는 절대로 그들의 능력을 십분 개발할 수 없었을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작스레 질색한 얼굴을 해보인 암상인이 이를 악다문 채 말했다.
“그놈들이 얼마나 다운 잼을 먹어대는지, 어지간한 공작들이라도 절대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아…….”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나가 마법사들의 얼굴이 스쳐간 것은 왜일까. 피로에 찌든 암상인의 얼굴이 왠지 남 일 같지 않아 그는 저도 모르게 납득하고 말았다.
***
암상인은 돌아갔다.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어차피 경매가 끝이 난 뒤에 따로 대화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던 터라, 그는 서둘지 않았다.
“72만 잼! 72만 잼에 대미궁의 복원품이 낙찰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복원된 대미궁의 핵은 72만 잼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됐다.
“이번에 물건을 얻지 못하신 분들께서는 너무 실망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조만간 저희 블랙 머천트가 직접 귀하신 분들을 찾아뵙고 아쉬움을 달래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입찰에 참가한 이들이 워낙에 거물이었던지라 진행자는 애써 덤덤한 얼굴로 훗날을 기약했다. 그 덕분인지 더 이상의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상보다 일정이 지체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조금 빠르게 경매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상 초유의 낙찰가에 얼이 빠진 듯 그 뒤의 경매는 거짓말처럼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그나마 마지막 상품으로 올라온 ‘자작’의 인장만이 다소 호응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그렇게 블랙 머천트의 스페셜 경매는 끝이 났다.
“이곳이 정리되는 대로 군주님을 찾아뵙겠습니다.”
따로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었던 암상인은 이곳이 결코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곳은 아니라며, 김진우의 대미궁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너무 늦지 않기를 바라지.”
그의 말에 암상인은 오늘 중에 반드시 방문할 것이라고 몇 번이나 거듭 강조하고는 총총거리며 사라졌다.
홀로 남은 김진우는 이내 품속에 보관하고 있던 포탈 주문이 담긴 양피지를 찢었다.
“그럼 가볼까.”
품에 고이 간직한 무언가의 소환석을 확인한 그가 쩍, 하고 입을 연 공간의 문을 넘었다.
***
“주인님!”
언제나처럼 포탈을 넘기가 무섭게 도미니크가 나타났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와락 품에 달려들어 제 주인의 무사함을 기뻐하던 그녀는, 피로가 가득한 그의 얼굴에 금세 걱정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김진우는 그녀의 질문에 귀찮은 내색도 없이 곧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통곡의 군주, 캐서린과의 만남과 암상인의 꿍꿍이, 복원된 대미궁과 온전치 못한 각성까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부 털어 놓았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주인님께서는 이제껏 누구보다 잘해오셨어요.”
그 안에 담긴 자조와 회한을 느꼈던 것일까. 도미니크는 정보의 부재는 신생 미궁의 특성상 어쩔 수 없노라며 그를 위로했다.
“그들의 혜안은 오래도록 한자리에 머물러 제 터전에 대한 길눈이 밝아진 것에 불과해요. 그에 반해 주인님께서는 여태 그 자리에 머문 적이 없으시니, 정체하여 얻은 그들의 지식과 진보하며 얻어낸 주인님의 현명함은 비교할 수도 없답니다.”
“위로가 필요했던 건 아니야.”
이미 마음 정리를 전부 끝내고 온 김진우였던지라 그녀의 말에 다소 어색한 얼굴을 해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본 도미니크가 금세 주제넘었다며 사과해 왔다.
“아니야, 그래도 덕분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앙금이 사라졌어. 고마워.”
늘 한결같은 그 충심과 마음이 보기 좋아 그가 웃어주니, 신뢰와 애정이 담긴 미소에 도미니크가 금세 바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흠.”
도미니크의 사심 없는 미소를 바라보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당분간은 외부 활동은 자제하고, 정보 수집에 전념한다.”
김진우는 막혀 있던 눈과 귀를 뚫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것을 명령했다.
“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지 꼭 알아야겠어.”
그 뒤로도 이런저런 지시를 내린 그가 한참 만에 소환석을 떠올리고는 품을 뒤적거렸다.
[정체불명의 고대 소환석.] [블랙 머천트가 주관한 스페셜 경매를 통해 얻은 이 고대의 소환석은 이제껏 한 번도 사용되었던 적이 없는 소환석입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소환석을 사용하시겠습니까?]도미니크를 멀찍이 물러나게 만든 김진우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쓰도록 하지.”
[소환석에 들어 있는 것이 상서로운 행운일지, 또는 다시없을 재앙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소환석을 사용하시겠습니까?]빨갛게 점멸하는 메시지가 전에 없이 불길했지만, 김진우는 스스로의 힘을 믿었다.
심층의 괴물들이라면 모를까, 소환석 하나에 절절매기에는 본신의 힘이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만하지 않았다.
양손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언제든 칼을 뽑을 수 있게 준비한 그의 온몸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그거 그냥 소환석 아니야.’
캐서린이 남긴 한마디가 다시 한 번 귓가에 맴돌았다.
“후우.”
길게 숨을 토해내는 것으로 완벽한 임전 태세를 마친 그가 경고하듯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대답했다.
“소환.”
짤막한 한마디가 끝이 나기가 무섭게 온 사방이 빛으로 휩싸이고, 소환석에서 폭발적인 냉기가 터져 나왔다.
“주인님!”
빛무리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기운에 사색이 된 도미니크가 새된 비명소리를 질렀다.
“괜찮아! 물러서 있어!”
그가 크게 소리쳤지만, 그 음성은 이내 섬광과 굉음에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
“뭐라도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전투에 있어서는 용맹함을 넘어 난폭하기까지 한 퀀투스였지만, 이렇듯 감정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대미궁의 영웅급 소환수들 중 퀀투스의 그러한 태도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의 심정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지금 이렇게 지켜보는 순간에도 왕께서는 어떤 고초를 겪고 계실지 모른단 말이다!”
퀀투스가 다시 한 번 고함을 쳤다.
하지만 그렇게 소리를 쳐봐야 변하는 것은 없었다.
왕을 집어삼킨 빛과 냉기는 이제는 거대한 결정처럼 굳어버려 더 이상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었고, 가뜩이나 서리의 속성 탓에 냉기가 돌던 대미궁이 이제는 완전히 얼어붙다시피 해버렸다.
“이깟 얼음 따위!”
몇 번이나 억지로 왕을 구해내려고 시도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도리어 무지막지한 반탄력에 전신이 탈골되는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으니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저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경솔히 움직였다간 괜히 주인님만 위험해질 거예요. 지금의 우리로서는 그저 주인님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도미니크가 분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끄응.”
왕의 대리자이자 조언자인 그녀는 김진우를 제외하고는 가장 존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나가였다.
그런 그녀가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명령하자 퀀투스를 비롯한 나가 영웅들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때일수록 미궁의 경계를 신경 쓰고, 내부를 단속해야 해요. 그러니 퀀투스는 나가 용사들의 방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도록 해요.”
그 말에 퀀투스가 초조한 얼굴로 빛무리를 바라보다 이내 오너 룸을 나섰다. 그렇게 자리를 비운 퀀투스 대신에 나가 용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보고했다.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이 왔다고?”
혀를 날름거리며 캭캭거리던 나가 용사가 무언가를 전해주었다. 이미 암상인이 방문할 거란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던 도미니크였지만,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찾아온 암상인이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하지만 암상인은 이런 모든 상황을 예견했던 것인지 나가 용사에게 전언을 남겼다.
“아!”
전언을 전해들은 도미니크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대체 뭐라는 건지 제대로 설명해다오.”
듣기에는 그저 바람 새는 소리일 뿐인 나가의 언어인지라, 소외되어 있던 헤임달이 불쑥 끼어들어 그녀를 재촉했다. 발자크를 비롯한 이들도 금세 그에게 가세해 도미니크를 둘러쌌다.
“주인님께서는 지금 시험받고 계신 거라고…….”
“시험? 어느 누가 있어 감히 왕을 시험한다는 말인가!”
분노한 헤임달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온 사방을 울려댔다. 그 사나운 기세에 다소 안색이 핼쑥해진 도미니크가 잠깐의 텀을 두고 입술을 짓씹듯 대답했다.
“그건 암상인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다만 그는 그것이 원래 주인님께 예정되어 있던 고대의 무구라고 했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빛무리가 터질 듯 팽창했다가 이내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내 빙벽 속에 갇혀 있던 김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렇게 빙벽을 깨고 나선 그의 손에 이제껏 본 적 없던 거대한 창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