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07)
던전 견문록-207화(207/319)
# 207
던전 견문록
제 208 화
76. 마창의 기억
빙벽에 갇혀 있던 것이 불과 반나절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마치 수십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던 것처럼 몹시도 지쳐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위태로워 보이던지, 손 대면 사라질 것만 같아 내내 걱정하고 있던 도미니크를 비롯한 소환수들도 쉽사리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려댔다.
대체 빙벽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빙벽에 들어가기 전과 지금의 김진우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
서늘한 눈매로 주변을 오시하던 정복자는 온데간데없고 어딘지 모르게 권태로운 느낌의 그는 마치 하루 만에 수십 년은 늙은 듯, 노화해 보였다.
축 늘어진 어깨 위로는 켜켜이 쌓인 피로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고 창을 움켜잡은 손은 부들부들 힘겹기만 했다.
그 모습이 흡사 모진 풍상에 지친 노인이 지팡이에 기대고 선 것처럼 지쳐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육신의 강건함은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해 보이지는 않았으니 그 괴리감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의 손에 쥐어진 한 자루 창이었다.
생목의 가지를 바로 잘라내면 그러할까. 불규칙적으로 이리저리 휘고 비틀린 창대는 투박하다 못해 초라할 지경이었고, 세 뼘은 됨직한 창날은 마치 늘어진 물푸레나무의 잎사귀처럼 낭창낭창했다.
언뜻 보기에는 무기로 쓰기에는 전혀 적합해 보이지 않은 모양새였지만, 잔뜩 지친 그를 범접치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 한 자루 괴창에 있었으니, 그와 창을 보는 소환수들의 시선이 복잡하기만 했다.
“후우.”
김진우가 길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와 공허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주인님!”
그제서야 그에게 달려온 도미니크를 비롯한 소환수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염려의 말을 던졌다.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순수하게 그의 생환을 기뻐하는 나가들과는 달리 헤임달을 비롯한 몇몇 소환수들은 달라진 그의 분위기에 주목했다.
“시험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이미 도미니크에게 들어 알고 있었던 이야기다. 그래서 헤임달은 다시 감히 누가 있어 하이로드씩이나 되는 존재를 시험한 것인지 물었다.
김진우는 헤임달의 대답에 제 손에 쥐어진 창을 바라보았다. 길이 4미터가 넘던 창은 어느새 1미터 남짓하게 줄어 정말로 지팡이라도 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울부짖는 마창, 궁니르.”
한참만에 흘러나온 그의 음성이 어쩐지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외눈박이 군주가 사용하던 무기이자, 잊혀진 옛 군주의 대미궁을 여는 열쇠다.”
***
소환수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낸 김진우는 암상인을 만났다.
“축하드립니다!”
암상인은 마치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축하의 말을 건네왔다.
“이게 뭔지 알고 있었나?”
“물건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었습죠. 다만 물건의 주인이 누구인지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요.”
암상인의 태도가 천연덕스럽다. 하지만 김진우는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이 얻은 마창 궁니르는 절대로 한낱 매물로 경매에 올라와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무구 자체가 지닌 힘은 물론이거니와 그 안에 숨겨진 비밀까지, 최상급 다운 잼 일만 개를 가져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었다.
“어차피 누구도 쓸 수 없는 물건이라면, 임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겠지요.”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블랙 머천트가 마냥 소환석을 놀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귀물을 내버리듯 경매 물품에 떨이로 내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마창의 원주인은 외눈박이 군주. 오직 그의 이름을 계승한 하이로드만이 쓸 수 있는 무기였다.
파편이라면 모를까. 권능의 터럭조차도 계승하지 못한 이들이 사용하기에 마창은 지나치게 도도하고 까다로운 상대였다.
하마터면 그 자신 역시 앙탈 같지 않은 마창의 앙탈에 휘말려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자격을 증명하라!’
소환석을 사용한 직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마창의 음성을 떠올리며 그가 몸서리쳤다.
급박한 상황 변화에 미처 전모를 파악하기도 전에 김진우는 끔찍한 상대를 만나고 말았다.
“외눈박이 군주!”
언젠가 디나리온의 악몽에서 보았던 외눈의 거인이 그를 덮쳐들었다. 끔찍한 공세가 이어졌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발악해야 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있는 곳이 허상의 세계인지,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끔찍한 살의에 맞서 싸웠을 뿐이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자신의 존재마저 잊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손에는 투박한 나무 창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래도 그 안에서 제법 괜찮은 물건이 나온 모양입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는 암상인의 음성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괜찮은 물건?”
그는 암상인의 말에 웃고 말았다.
괜찮다 뿐이겠는가. 마창 궁니르는 한 번 노린 적을 놓치는 법이 없는 궁극의 무구였다. 약점 간파라는 능력이 있는 자신에게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무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창의 가치는 무기 자체의 힘에 있지 않았으니, 허상의 세계, 자격의 시험 그 자체야말로 궁니르의 진짜 가치였다.
자신이 만난 외눈박이 군주는 분명 허상이었다. 하지만 비록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외눈박이 군주의 살의는 진짜였으니, 마창이 제 주인의 기억을 재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외눈박이 군주의 허상과 싸우며 진짜 군주가 싸우는 법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간 적아를 구분하는 데만 사용해왔던 ‘진실의 눈’이 어떤 식으로 쓰일 수 있는지, 하이로드의 강건한 육신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이제껏 무의식중에 한계를 규정하고 있던 던전 베이비라는 틀이 산산조각이 나고, 사고가 확장되었다.
비록 기억은 계승받지 못했지만, 전투에 관해서 만큼은 외눈박이 군주의 기억을 완전하게 계승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가 얻은 것은 전투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었으니, 암상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전보다 한층 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대의 호의에 감사하겠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필시 먼 길을 돌아야 했으리라.”
그는 어차피 자신이 마창을 얻게 되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태도가 미묘하게 전과 다른 압박감으로 다가와 암상인은 저도 모르게 더욱 허리를 굽히고 말았다.
“그저 알아주시니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데 갑작스레 김진우의 기세가 돌변했다.
“나를 기만한 죄 또한 가볍지 않으니, 그대의 공은 이것으로 없는 셈 치겠다.”
경매장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대화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의 얼굴은 더없이 단호하기만 했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잠시나마 억울한 얼굴을 해보였던 암상인이 금세 찔끔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더 이상 껍데기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사양하겠다.”
“무슨 말씀이신지…….”
어물쩡 넘어가려는 것인지 암상인이 모르는 척 의뭉을 떨었다.
“끝까지 모르는 척할 셈인가?”
김진우의 기세가 서서히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전의 약속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렇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가 왔지 않습니까.”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한결같은 태도를 보이는 암상인의 태도가 기어코 그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아직도 나를 기만하려는 것인가.”
평소의 김진우였다면 블랙 머천트와의 관계를 생각해 이렇듯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그는 명백하게 선을 넘었으니까.
그런데 암상인의 태도가 이상했다.
“가, 감히 제가 어떻게…….”
평소라면 이런저런 말로 상황을 모면했을 암상인이 지금은 입을 꾹 다문 채 정말로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굽은 등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진우는 그런 암상인을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왜 그대의 이름을 나에게 밝히지 않는가.”
“하찮은 상인의 이름을 알아서 어디에…….”
덥석.
언제 다가선 것인지 허상처럼 솟아난 그가 암상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모르기를 바라는 건가.”
김진우의 눈동자 안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영원의 창고지기.”
영원의 창고지기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이제껏 볼품없이 버둥거리던 암상인의 팔다리가 몸짓을 멈췄다.
“미미르여.”
부릅뜬 암상인의 눈동자를 마주한 채 김진우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대가 나에게 건네준 소환석에 담겨 있었던 것은 마창 뿐만이 아니었다.”
잡아먹을 듯 얼굴을 마주 댄 그가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말했다.
“최후의 전투에서 주인을 잃은 마창의 염원. 궁니르는 황혼의 결과가 밤이 아닌 아침이기를 바랐다.”
마침내 보탄을 쓰러트렸을 때, 마창은 한 가지 시험을 더 냈다.
아니. 그것은 시험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마창의 염원에 가까웠다.
마창은 수많은 배덕자들에 의해 외눈박이 군주가 쓰러졌던 전장에 그를 던져 놓았다.
그러고는 승리를 강요했다. 비록 그것이 허상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 의미 없는 것일지라도 마창은 더없이 간절했다.
그것이 전 주인을 전송하는 마창의 마지막 예의일지, 그도 아니면 새로운 주인이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마지막 시험에서 그는 외눈박이 군주 자체이자, 하이로드 보탄이 되어야 했다. 강대했던 군주마저 쓰러졌던 전투, 쉬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창의 염원이 강한 만큼 힘은 강해졌고, 마침내 그는 보탄과는 달리 승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진짜 자신의 힘으로 얻은 승리는 아닐지언정 어쨌건 그는 승리자였다. 패자의 모든 것은 승리자의 전리품이었으며, 전장에는 수많은 보물들이 널려 있었다.
승리한 전사들, 모리건을 비롯한 영웅급 소환수들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외눈박이 군주가 전장의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섰다.
아마도 그것이 마창이 기억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승리의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로 끼어드는 이질적인 존재가 있었다.
하나같이 강인하고 격 높은 존재들 틈바구니 속에서 유달리 튀어 보이는 존재, 빛바랜 피가 바다를 이루고 생명 잃은 육신이 산을 이루는 지옥 속으로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임프가 뛰어들었다.
‘미미르여.’
허상 세계 속의 자신, 보탄은 그를 영원의 창고지기 미미르라 불렀다.
짝달막한 몸통에 커다란 머리, 보물을 지키기 위해 쉼 없이 돌아가는 눈동자, 작은 임프가 바로 미미르였다.
그리고 미미르는 그도 익히 아는 존재였으니, 멱살을 잡힌 채 칵칵 대는 암상인의 모습이 그때 보았던 임프와 꼭 같았다.
“말하라. 그대는 나의 창고지기인가, 아니면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인가.”
김진우는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서슬 퍼런 기세는 암상인이 자신의 정체를 부정하고 허울을 고집하는 순간 어떻게 나올 것인지 너무나 자명했다.
외눈박이 군주의 창고지기가 왜 지금은 상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또한 블랙 머천트라는 단체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그는 암상인의 고개가 저어지는 순간 망설이지 않으리라.
“저는…….”
멱살을 잡힌 암상인의 음성은 숨이 넘어갈 듯 답답했지만, 의미를 알아듣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군주님의 창고지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