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08)
던전 견문록-208화(208/319)
# 208
던전 견문록
제 209 화
77. 블랙 머천트의 정체
그간 정체를 숨겨왔던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정체를 인정한 것이 이상했지만 김진우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말하라.”
그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손아귀의 힘을 풀어주며 미미르에게 설명을 종용했을 뿐이다.
“전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서 겨우 풀려난 임프는 한참이나 마른기침을 토해내다 뒤늦게 쭈뼛거리며 변명을 주워섬겼다.
“최후의 전투가 끝이 난 후,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지저를 지탱하던 책임과 긍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전리품에 눈이 먼 짐승들뿐이었으니, 한낱 창고지기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미미르는 그 당시를 가리켜 존귀함과 긍지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었던 야만적인 시기라 말했다.
찬탈자는 자신을 도와 아홉 군주를 몰아낸 맹수들에게 귀족이라는 허울과 함께 권능의 파편을 나눠주었고, 그 과정에서 패망한 군주들의 창고가 거덜이 났다 말했다. 영원의 창고 역시 그 중에 하나였으니, 창고지기의 임무는 진즉에 실패했다며 한탄을 금치 못했다.
“찬탈자의 세력이 들이닥치기 전에, 가장 값진 귀물 몇 개를 챙겨 달아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죠.”
미미르는 찬탈자의 눈을 피해 때를 기다려왔노라 말했다.
지저가 가장 영광되었던 그 시절로 회귀할 수 있도록 군주의 계승자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며 감개무량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김진우는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미미르의 그간 행적과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마창의 기억을 통해 우연히 그 정체를 알아차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미미르는 끝까지 암상인의 껍데기를 벗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단지 때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의 내심을 눈치챈 것인지 미미르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찬탈자가 선심 쓰듯 심층의 귀족들에게 하사한 보물들은 원래가 저의 것, 아니 군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가치도 모르는 귀족들이 지니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라는 말씀입죠.”
귀족들의 무지함과 찬탈자의 무자비함을 성토하는 미미르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 없이 진실해보였다.
다만 그것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충성심의 발로라기보다는 보물에 대한 집착으로 보였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이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저 혼자 흥분한 미미르가 웅변이라도 토하듯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잃어버린 보물들을 전부 되찾기로 말입니다!”
스스로 도취되어 떠들어대던 미미르는 무표정하기만 한 김진우의 얼굴을 보고는 금세 식은 얼굴을 해보였다.
“그게 바로 블랙 머천트라는 단체가 만들어진 이유이자, 제 평생의 숙원입니다.”
마치 자신의 할 말을 모두 끝냈다는 듯, 입을 다문 미미르를 보며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블랙 머천트의 비사를 들은 것은 수확이라면 수확이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냉기가 도는 얼굴로 미미르를 압박했다.
“아직 그대의 변절에 대한 변명을 듣지 못했다.”
모리건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의 소환수들이 충성을 맹세한 마당에 지금까지 제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미미르의 태도는 의심을 사기에 딱 좋았다.
이제까지 그는 블랙 머천트의 배후에 찬탈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왔었으니까.
“변절이라니요!”
그런 그의 말에 미미르가 짧은 다리를 튕겨 펄쩍 뛰었다.
“그저 때를 기다렸을 뿐입니다요. 변절이라니… 제가 얼마나 음으로 양으로 군주님의 성장을 도왔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실 텐데, 이거 섭섭합니다요.”
이번만큼은 김진우도 미미르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적재적소에 나타나 해답을 던지고 가던 암상인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만큼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한들 나에게 이러한 사정에 대해 미리 알려주었다면 피차간에 불필요한 의심을 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대의 태도는 누가 보아도 나와 찬탈자를 두고 저울질하는 모양새였지.”
그가 이렇게까지 미미르를 압박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블랙 머천트라는 단체와 암상인은 딱 박쥐나 다름이 없어 보였던 탓이다.
언제든 저울추가 기울며 등을 돌릴 존재,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블랙 머천트와 미미르였다.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저의 신비에 맹세할 수 있겠나?”
“그건…….”
당황한 얼굴로 딴청을 피우는 모양새를 보니, 김진우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미르는 모리건이나 헤임달 같은 소환수와는 그 성정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저 짐작일 뿐이지만 아마도 그는 외눈박이 군주에게도 진심 어린 충성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군주에 대한 충성보다는 귀물에 대한 집착으로 움직이는 존재. 그것이 미미르라는 임프의 천성이리라.
“그저 저로 인해 군주님께서 찬탈자의 관심을 끌게 될까 두려웠을 뿐입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인지, 미미르는 찬탈자가 얼마나 집요하고 잔인한 존재인지 침을 튀어가며 설명했다.
“비록 제가 장사치 행세를 하며 오랜 세월 숨을 죽이고는 있었지만, 찬탈자는 철두철미하게 과거의 흔적을 지워왔습니다. 그런 찬탈자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심, 또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실의 눈으로도 이 작은 임프의 머릿속은 도저히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하기야 어차피 몇 마디 말을 더 나눈다고 해서 미미르의 진심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찬탈자에 대해 묻기로 마음먹었다.
“찬탈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저도 모릅니다. 찬탈자는 한 번도 제 실체를 보인 적이 없으니까요.”
그렇게나 두려워하면서 정작 찬탈자의 실체를 본 적이 없다니, 차라리 황당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미미르는 진심으로 찬탈자를 두려워하는지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만약 찬탈자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면, 심층의 공작쯤은 되어야 대화가 될 겁니다.”
“생각보다 쓸 만한 정보는 없군.”
하지만 말과는 달리 김진우의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하기야 가뜩이나 정보의 부재를 실감하던 그가 미미르라는 좋은 정보원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작은 임프의 목덜미를 잡고는 대미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 그리고 말입니다.”
자라처럼 목을 바짝 집어넣은 미미르가 그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부탁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뻔뻔함을 잃지 않는 미미르는 과연 특이한 존재였다.
“말하라.”
“그 전에 잠시…….”
바둥거리며 그의 손길을 벗어난 임프가 상단 행렬 사이에 숨어 있던 머리가 유달리 큰 난쟁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
“큰 머리 난쟁이?”
“맞습니다. 대미궁의 복원품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난쟁이들 중 하나입죠.”
마치 선물이라도 하듯 난쟁이를 슬쩍 앞세운 미미르가 뒤늦게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그보다 제 호위 용병들 말입니다.”
대화에 심취하여 주변의 호위 용병들을 잊고 있었다. 뒤늦게 뒤를 돌아본 김진우가 용병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쉴 곳을 따로 마련해주도록 하지. 이곳은 쉬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니까.”
지금은 잠잠하지만 언제 모아이가 또 대미궁의 경계를 침범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그렇게 말을 했더니 미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잠시 눈알을 굴려대던 미미르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 호위 용병들을 죽여주십시오.”
“뭐?”
“저들 중에 찬탈자의 간세가 있습니다.”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다. 김진우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미르를 대미궁의 안쪽으로 내던지고 곧장 몸을 틀어 용병들을 공격했다.
멀뚱멀뚱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용병들이 뒤늦게 응전 태세를 갖췄지만, 외곽을 돌던 대미궁의 병력에 의해 금세 참살당하고 말았다.
“사실은 저 중에 누가 첩자인지 모릅니다. 그저 그간 의심이 가던 이들을 한 번에 데리고 왔을 뿐입지요.”
몸에 묻은 흙 따위를 털어내며 하는 미미르의 말에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
“헤헤, 군주님께도 필요한 일이었으니, 너무 그리 구박하지 마십시오.”
머쓱해하는 빛도 없는 그 태도가 하도 뻔뻔해 그는 도리어 피식 웃고 말았다.
“건방진 창고지기로다.”
***
미미르는 다시 블랙 머천트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당분간은 기존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직은 군주님의 힘이 모자라 찬탈자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니, 괜히 시선을 끄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요.’
이미 상당한 정보를 얻은 김진우였던지라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영원의 창고에 대한 관심을 은근히 보였을 뿐이다.
‘때가 되면 굳이 제가 가져다 바치지 않아도 영원의 창고는 군주님께 돌아갈 겁니다. 그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니까요.’
당분간 다시 만남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첩자를 한 번에 정리한 지금이야말로 가장 몸을 사릴 때라며, 미미르는 조만간 기회를 만들겠노라 말했다.
“그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생각에 잠겨 있던 그에게 도미니크가 말을 걸어왔다.
이미 모든 것을 들어 알고 있던 그녀는 블랙 머천트의 수장이 암상인이었다는 사실과, 암상인의 정체가 외눈박이 군주의 창고지기였다는 사실이 여전히 잘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 미궁 밖의 존재는 믿지 않아.”
김진우는 그런 그녀를 향해 무심하게 대꾸해 주었다.
사실상 그 역시 미미르의 말을 전부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저 그간의 상황과 이야기가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졌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지저라면 끔찍이도 귀하게 여기던 블랙 머천트가 왜 유독 10층의 귀족들을 타락시켜 완전히 도태시켰냐는 데에 대한 의문은 풀 수 있었다.
미미르의 말이 사실이라면 10층의 귀족들 역시 영원의 창고에서 흘러나온 보물들을 한 두 개쯤은 다들 지니고 있었을 테니까.
“조만간 백작들 역시 10층의 남작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신세가 될 거라니, 두고 보면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알게 되겠지.”
미미르는 11층의 백작들 역시, 10층의 남작들과 원인은 달랐지만, 결국 대미궁의 복원품을 얻기 위해 그 근간이 흔들리게 될 거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며 예언 아닌 예언을 늘어놓았다.
“결국은 시간이 알려주겠군요.”
과연 그 시간이 자신들의 편일지, 그도 아니면 적의 편일지는 두고 보아야 알 것이다.
“근데 저 난쟁이는 어떻게 할까요?”
블랙 머천트의 비사가 남긴 여운이 너무 깊어 한동안 잊혀져 있었던 난쟁이를 떠올린 김진우가 뒤늦게 미미르가 선물이라며 남기고 간 큰 머리 난쟁이를 찾았다.
“히익!”
이야기가 길어지자 지루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던 큰 머리 난쟁이가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어눌한 발음에 큰 머리가 우스꽝스럽기만 했지만, 난쟁이의 정체는 무려 대미궁을 복원한 미궁 설계자의 일족 중 하나였다.
“일단 대미궁에 거주 등록부터 하지.”
비록 미궁의 핵은 블랙 머천트에게 있었지만, 이곳은 대미궁이다.
그리고 그는 원하기만 한다면 미궁에 속한 종족의 수를 늘리는 것도 줄이는 것도 마음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