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14)
던전 견문록-214화(214/319)
# 214
던전 견문록
제 215 화
도망자라는 말에 오르테아가가 도움이라도 청하듯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통로를 가득 메운 드라칸 하나가 뒤편에 서 있다가 그 시선에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약속대로 그 아이를 용서해다오.”
오르테아가의 아비, 용제 아그립투스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보이는 못난 모습이 못내 수치스러운지 참담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성질대로 더 비아냥거렸다가는 심층의 강대한 공작과 원한이 생길 판국이라, 김진우도 더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 말에 용제가 눈을 뜨며 감사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런데 듣던 것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이는군.”
“심신을 좀먹는 저주는 잠시 눌러둔 상태이니, 제 주군을 만나는 데 들것에 실려 올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의 긍지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노라.”
사실은 이미 더 이상 훼손될 긍지도 없었지만, 그는 구태여 그 사실을 입밖으로 꺼내 용제를 자극하지 않았다.
“좋아. 그런데 말이야.”
김진우의 시선이 오르테아가에게 닿았다. 제 몸에 떨어진 시선을 느낀 것인지 이 비겁자 드라칸이 다시 한 번 몸을 움찔, 떨었다.
그 한심스러운 모습에 용제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그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대는 입이 없나? 아니면 언령의 저주에 혀가 썩기라도 한 것인가.”
용제를 앞세운 채 자신의 모든 과오를 나몰라라 회피하는 오르테아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용제가 끼어들려고 하는 것을 손짓으로 막고는 오르테아가를 다그쳤다.
“용제와의 거래는 이미 끝났다. 그가 대가를 제시했고,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지. 그런데 나머지는 그대의 일이지 않은가. 아니면 이번에도 그대의 아비가 나서서 대신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인가?”
조금씩 매서워지는 눈빛에 오르테아가가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내가 용서해 주기로 한 것은 비겁자이지, 응석받이가 아니다. 그대 오르테아가여. 그 잘난 긍지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그대의 입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지어라.”
오르테아가가 다시 한 번 제 아비를 쳐다 보았지만, 이번에는 용제도 그를 대신하여 나서지 않았다. 그저 애써 만들어낸 엄한 시선으로 자신의 아들을 다그쳤을 뿐이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그때는 뭐가 씌었었나 봅니다.”
더듬거리며 꺼낸 사죄의 말에도 김진우는 여전히 사나운 눈빛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그때 못다 한 충성, 남은 생을 다 바쳐 잇도록 하겠습니다.”
오르테아가가 다시 눈치를 보며 말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거짓은 없으렷다.”
김진우가 한참만에 대꾸해 주니 오르테아가가 금세 화색을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로 몸이 썩고 혼이 흩어지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단언컨대 이보다 더 끔찍한 고통은 세상에 없을 겁니다.”
그 말이 꼭 보다 끔찍한 고통이 찾아온다면 다시 도망치겠다는 말처럼 들렸지만, 제 딴에는 비장하게 각오를 밝힌 것이리라.
김진우는 말간 시선으로 오르테아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믿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고맙소, 전승의 사령관이여.”
오르테아가가 냉큼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용제 역시 한숨 돌린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건네왔다.
하지만 김진우는 어쩐 일인지 여전히 얼굴을 풀지 않았으니, 그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왜 그대는 아직도 그리 꼿꼿하지?”
“무, 무슨…….”
“자신의 입으로 분명 못다 한 충성을 바치러 왔노라 말해놓고, 그대는 왜 아직도 그리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가!”
그 사나운 호통에 찔끔 놀란 오르테아가가 냉큼 무릎을 꿇었고, 차마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용제는 수치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좋아, 다시 돌아와서 반갑다.”
오르테아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김진우가 용제에게 시선을 옮기며 히죽 웃어보였다.
“좋아, 이제 그대의 아들을 다시 받아준 대가를 계산해 볼까?”
***
“끄응, 지독하군. 그대가 나와 같은 층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나는 진즉에 창고가 거덜나 빈궁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으리라.”
“공작들의 창고가 얼마나 풍요로운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고작 다운 잼 몇 개 가지고 엄살 피우지 말라고.”
알다 뿐인가, 토굴꾼 시절에 거미 공작의 창고를 확장하는 공사에도 투입되어 본 적이 있었던 김진우였다.
“좋아, 이제 가장 중요한 게 남았군.”
나가 일꾼들이 아그립투스가 건네준 보상금, 다운 잼이 가득한 상자들을 실어 나르는 것을 바라보던 김진우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막대한 양의 다운 잼을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그가 이번에는 웬일인지 잔뜩 기대가 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용제가 품속에 지니고 있던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생각보다 큰데?”
투덜거리는 입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제가 건네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그가 그토록이나 애타게 찾아도 발견하지 못한 귀물이었다.
그런 귀물을 반푼이 드라칸 덕분에 거저 얻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대가를 모두 지불했으니, 이제는 그대가 약속을 지킬 일만 남았구나.”
“좋아, 좋아. 약속대로 그대가 끔찍이 여기는 오르테아가는 내가 잘 데리고 있도록 하지.”
김진우는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믿겠노라.”
그렇게 짧은 한 마디를 남긴 용제가 당장에라도 떠날 것처럼 몸을 돌렸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대도 블랙 머천트에게 복원품을 산 것인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김진우가 뒤늦게 뜻을 알아듣고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일부러 대미궁의 경계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용제를 맞이했는데, 아무래도 이 강대한 공작의 눈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아, 뭐, 그렇지.”
“대가가 적지 않았을 텐데, 재주도 좋군. 심층의 백작들도 대금을 치르다 창고가 텅텅 비었다고 들었거늘.”
흘러가는 말투였지만, 용제는 11층의 상황에도 제법 빠삭한 눈치였다.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게 경계하는 얼굴을 해보였다.
심층 백작들의 움직임을 꿰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역시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으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백작들이 생각보다 더 눈가림을 잘 한 것인지 아그립투스의 눈빛에서 옛 군주를 경계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대가 준 다운 잼으로 어떻게든 막아볼 생각이다.”
용제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바로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빚도 있으니, 내 한 가지 충고하겠노라.”
매섭게 번뜩이는 용제의 눈빛이 저 멀리 대미궁을 향해 있었는데,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는 기색이 강했다.
“블랙 머천트를 조심하라. 또한 그들이 지저에 뿌린 귀물에 현혹되지 말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 김진우는 순간적으로 미미르와 블랙 머천트의 정체가 탄로 난 것이 아닌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뒤늦게 표정을 수습해 되물으니, 용제가 눈을 번뜩이며 대답해 주었다.
“상인의 허울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니, 그들과의 거래는 그대를 파멸시킬 것이다.”
용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블랙 머천트를 그저 한낱 상인 집단으로 치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진 그는 애써 속내를 숨긴 채 용제에게 물었다.
“그들이 파는 물건은 나 같은 신생 미궁의 주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들이다. 그들과 거래하지 않았다면, 이만큼 성장하지도 못했겠지.”
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용제가 금안을 번뜩였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이 거북했지만, 그는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하지만 경고하건대 그들이 파는 것은 귀물이 아닌 망상과 파멸뿐이니, 심층 초입의 남작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그대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경계심이 아니었다. 용제, 아그립투스는 분명 블랙 머천트를 적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김진우는 어쩌면 찬탈자가 이미 블랙 머천트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지저가 시끄러워질 것이니, 그대는 중심을 똑바로 잡고 흔들리지 말라.”
그리고 그런 생각은 아그립투스의 말을 마저 들은 순간 확신이 되었다.
찬탈자는 블랙 머천트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던 심층의 귀족들은 여전히 찬탈자의 영향 아래 있었다.
“나 하나로는 격랑을 막을 수가 없으니 부탁하건데 그대가 나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기를 바라노라. 그때가 되면 설령 그대의 품에 나의 아들이 있다 한들, 그것이 방패가 되지는 못하리라.”
그전의 경고가 막연했다면, 이번 경고는 보다 노골적이고 명확했다.
아그립투스는 곧 벌어질 무언가에 자신의 아들이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 염원 속에 짙은 피 냄새가 스며 있었다.
“만약에, 만약에 그 소란이라는 것에 내가 휘말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그립투스는 대답을 망설이다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전력을 다해 그대의 미궁을 비호해 주겠다. 하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다면 나는 생과 사를 갈라놓는 것으로 내 아들이 짊어진 의무를 벗겨내리라.”
***
아그립투스가 돌아간 뒤 김진우는 오르테아가를 적당한 장소에 처박아 두고 곧장 블랙 머천트의 본거지를 찾았다.
만약을 대비해 미미르가 남겨두고 간 양피지를 쭉 찢으니, 몇 번인가 가 보았던 블랙 머천트의 경매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군주님?”
포탈이 열리기가 무섭게 미미르가 달려와 방문 이유를 물었다.
“일이 틀어졌다.”
그렇게 입을 뗀 김진우가 아그립투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전부 전하고는 경고했다.
“그대도 나름대로 방비해야 할 것이다.”
“후, 이거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는군요.”
그런데 미미르의 대답이 상황과 맞지 않게 태연하기만 했다.
“그다지 놀라지 않는군.”
“뭐, 사실 언제까지고 정체가 탄로 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미미르는 어쩌면 찬탈자는 진즉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찬탈자가 절 그대로 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약속 때문에 귀족들에게 내주었어야 했던 영원의 창고 보물들을 제가 대신해서 수집해주기를 바란 것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대미궁의 복원품으로 백작들의 창고가 텅텅 빈 지금, 그 시기가 가까워졌다 여겼겠지요.”
위기라면 위기, 찬탈자라는 끔찍한 상대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도 의연한 그 모습이 의외라 김진우는 조금이지만 감탄했다.
최악의 경우, 아깝지만 영원의 창고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미미르와의 연계를 끊을 생각까지 했던 그는 태연한 미미르의 모습을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미리 마련해 준 의자에 앉은 그가 흥미로운 얼굴로 말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여우는 굴을 파도 하나를 파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김진우가 보기에 미미르는 여우보다 몇 배는 영악하고 교활한 존재였다.
그런 미미르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는 생각에 그가 방법을 물었다.
“그거 아십니까? 지저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알을 번들거리며 미미르가 기괴하게 입꼬리를 틀어 보였다.
“천근 거석도 세월이 지나면 바람에 깎이고 패는데, 충성이라고 영원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