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15)
던전 견문록-215화(215/319)
# 215
던전 견문록
제 216 화
얼핏 듣기에는 뜬구름 잡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심층의 공작들 중에 배신자가 있다.
예감을 넘은 확신에 김진우는 미미르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절대적인 시스템과 신비, 그리고 율법에 의해 지배받는 지저였지만, 의외로 허술한 면도 있었다.
당장 백작들만 해도 지저의 왕이나 다름없는 찬탈자의 눈을 가리고 옛 군주들의 힘을 얻기 위해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심층의 공작 중에 미미르의 편에 선 자가 있다고 해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은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이냐는 것이었다.
“그것까지는 아무리 군주님이라고 해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저의 신비에 맹세했거든요.”
김진우의 속내를 짐작한 것인지 미미르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 정도의 보안 장치는 있어야 그들도 저도 믿고 거래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천연덕스러운 미미르의 말에 김진우는 결국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진실의 눈을 활성화시켰지만 역시나 이 꾀 많은 임프의 속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마창의 기억을 본 지금에 와서는 진실의 눈이 사실은 피아를 가려내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투에 특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한 가지만 묻도록 하지.”
“물으십시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결국은 자신이 편한 대답만 하겠다는 말장난. 하지만 김진우는 실망하지 않고 물었다.
“거미 공작이 그 중 하나인가?”
미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실의 눈 역시 그 속내를 비추지 못했다. 하지만 잠깐의 망설임과 표정 변화를 읽는 건 굳이 능력에 기대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거미 공작은 아니로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행여나 대의란 이름으로 자신의 원한을 풀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만큼은 질색이었다.
몇 번의 각성을 통해 많이 희석되었다지만 지옥 거미들에 대한 그의 원한은 아직도 깊기만 했으니까.
“좋아, 그대에 대한 염려는 접어두도록 하지.”
“염려해주신 겁니까?”
미미르가 의외라는 얼굴로 물었다.
“글쎄.”
김진우는 대답대신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지저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해묵은 충성에 기대어 의미없는 믿음을 줄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도 일이 틀어질 경우 강제로라도 영원의 창고가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토해내게 하려고 했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을 듯했다.
미미르는 아직 조금 더 이용 가치가 남아 있었다.
***
대미궁으로 돌아온 김진우는 오르테아가를 미궁의 심처에 처박아두고 감시를 붙였다.
일신의 전투력이 쓸 만하기는 하지만 이래저래 걸리는 것이 많아 당장에 중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하물며 반편이 드라칸의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이 폭염의 용제임에야 혹시라도 불상사가 생기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으니, 오르테아가의 쓰임새는 당분간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왕좌에 앉은 김진우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대미궁이 두 단계 성장했고, 자신 역시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발전을 이루었다.
육신과 정신의 밸런스가 무너져 제 힘을 발휘 못했던 것이 심상의 수련을 통해 어느 정도 균형을 잡으며 진짜 군주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저는 여전히 위험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신과 자신의 미궁을 노리는 적들 중 만만하게 볼 만한 존재는 없었다.
“아니, 조급해하지 말자.”
그는 한숨처럼 혼잣말을 내뱉었다. 지저에 자리를 잡은 지 불과 2년이 갓 지났을 뿐이다.
주변의 적들이 여전히 위협적인 것은 자신이 점점 더 심층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지, 스스로의 발전이 정체된 것이 아니다.
전에는 까마득하기만 했던 원수, 지옥 거미 공작이 이제는 잡힐 것처럼 성큼 다가왔다. 그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두 층 남았다.”
10층은 사실상 궤멸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11층의 공작들 역시 대미궁의 복원품이라는 독배를 들고 서서히 고사되어 가는 중이다.
사실상 그의 실질적인 상대는 12층의 공작들뿐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그는 자꾸만 급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것 역시 전이라면 바로 눈앞의 적에만 급급했을 자신이 이룬 정신적 성장이었으니, 그의 성찰은 깊고도 깊기만 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용제에게 얻은 해룡의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해룡의 심장을 사용하는 순간 그와 그의 미궁은 다시 한 번 도약을 이루리라.
하지만 지저는 언제나처럼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쿠우우우우우우.
갑작스레 무지막지한 진동이 대미궁을 덮쳤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대미궁의 빙벽이 갈라지고,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대미궁의 외곽부가 파괴되었습니다.] [공들여 설치한 함정과 시설들이 파손되었습니다.] [몽마들의 거주지와 난쟁이들의 거주지가 파괴되었습니다.] [현재 파손 정도가 전체 내구도의 20%를 넘었습니다.] [서둘러 인력을 투입해 보강하지 않으면 피해가 더욱 더 늘 것입니다.]마치 약이라도 올리듯 떠오른 메시지에 김진우가 인상을 구겼다. 대체 이 무지막지한 진동 속에서 누가 있어 복구 작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미니크!”
아무리 기다려도 잦아들 생각을 않는 진동에 김진우가 도미니크를 소리 높여 불렀다.
“주인님!”
용케도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도미니크가 나타났다.
“도미니크!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
“현재 나가 순찰자들과 언더 엘프들이 피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추가 피해가 속출되는지라 쉽지 않아요!”
도미니크의 말에 김진우가 욕설을 내뱉었다.
“한시도 편하게 내버려두는 법이 없군! 빌어먹을 지저 같으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갑작스러운 지진이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지진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온 지저가 무너져 내릴 듯한 진동이 끝이 났을 때, 대미궁의 상황은 처참하기만 했다.
다이달로스의 손을 타며 한층 격조 높아진 대미궁이 순식간에 폐허가 된 것이다.
[대미궁의 외곽부의 70%가 파괴되었습니다.] [대미궁의 중심부의 50%가 파괴되었습니다.] [공들여 설치한 함정과 시설들이 대부분 파손되었습니다.] [이종족들의 거주지가 상당 부분 반파되었고, 개중에서도 몽마들의 거주지와 난쟁이들의 거주지는 거의 완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대미궁의 현재 내구도가 전체 내구도의 40%에 미치지 못합니다.] [서둘러 파괴된 미궁을 복구하십시오. 현재 대미궁은 그 어느 때보다 외부의 침입에 취약한 상태입니다. 또한 미궁의 복구가 늦어질 경우 대미궁 스스로가 손상을 복구하기 위해 거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킬 것입니다.]문자 그대로 참담한 상황,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장인의 손길을 받아 그 위용을 뽐내던 대미궁이 거의 반파되다시피 한 것이다.
그나마 필사적으로 핵을 지킨 덕에 그것마저 파괴되어 미궁이 완파되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상황이 낙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피해 상황!”
“다행스럽게도 병력의 피해는 크지 않아요! 순찰자 몇이 붕괴에 휘말렸을 뿐 대부분의 병력들은 대부분 무사합니다!”
병력의 피해는 없지만, 이 정도까지 미궁이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
지금의 피해에 비하면 교룡왕과의 전쟁 때 입었던 미궁의 파손은 차라리 애들 장난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이종족들의 피해 상황은 어떻지?”
나가들이야 운이 좋게 참화를 피했다고 하지만, 거주구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올 수가 없는 이종족들의 피해 상황이 걱정되었다. 하물며 몽마와 난쟁이들의 거주지는 완파되었다지 않은가.
“지금 파악 중입니다.”
창백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도미니크는 파편을 맞은 것인지 몸에 자잘한 상처가 그득했다.
“끄응, 도미니크는 일단 몸부터 추스르도록.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치유의 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그녀이니만큼 제 몸을 돌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책임감 넘치는 그녀는 그가 나서지 않는 한 자신의 상처를 가장 마지막에 처리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그녀에게 휴식을 명령하고는 오너 룸을 나섰다.
“처참하군.”
그나마 핵이 보관된 오너 룸이었기에 방비가 남달라 피해가 적었던 모양이다. 오너 룸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처참하기만 했다.
잘 닦여 거울처럼 번들거리던 빙벽은 태반이 깨어지고 무너져 흉물스러운 그 속을 내비치고 있었고, 바닥은 쩍쩍 갈라져 곳곳에 구덩이가 가득했다.
“쉬잇!”
나가들이 나서서 파손된 통로를 어떻게든 열어보기 위해 용쓰고 있었지만, 그렇게 겨우 확보한 통로가 기존의 통로의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과연 이곳이 그 탐욕스럽고 강대했던 대미궁이 맞나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거의 죽다 살았습니다.”
강인한 지저의 생명체들에게도 유래 없는 지진은 공포였던 모양이다. 곳곳에서 겁에 질린 이종족들이 그에게 하소연을 해왔다.
“피해 상황을 파악하여 보고하라.”
나가들과는 달리 한정된 거주 구역을 벗어나지 못했던 탓에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종족들은 당장 일족을 챙기는 것만 해도 벅차 보였다.
하지만 그대로 두었다가는 부상자와 시신만 끌어안고 하루를 다 보낼 참이라 그가 직접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미치겠군.”
그렇게 파악한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바로 직전에 이종족들의 수를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이민족들의 수는 처음 그들이 대미궁에 도달했을 때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지진에 휘말려 강인한 지저의 생명체 태반이 죽어나간 것이다.
그나마 완파되었다던 난쟁이 거주구의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게 그저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을 뿐인데, 갑자기 지진이 와서 난쟁이들이 걱정되지 뭡니까.”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는 우서는 온몸을 넓게 펼쳐 미궁의 천장을 받치고 있었다.
그런 우서의 아래로 말락수스를 비롯한 난쟁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굳이 묻지 않아도 난쟁이들이 참사를 피한 게 누구 덕분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서의 변덕 덕분에 변을 피해간 난쟁이들과는 달리 몽마들은 전부 몰살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들의 죽음이 꼭 지진 때문만은 아니었으니, 몽마들의 거주구 곳곳에 피가 전부 빠져나간 창백한 시체들이 가득했던 탓이다.
알 수 없는 문자와 도형들로 가득한 몽마들의 거주구는 서리 탓에 썩지도 않은 시체들로 가득해 끔찍하기만 했다.
“미쳤군.”
김진우는 그 참상의 끔찍함보다 미치광이 여왕의 광기에 질려버렸다.
몽마들을 죽인 것이 아리아네 본인임을 알아챘던 탓이다. 아무래도 그녀는 디나리온이라는 강적을 이기기 위해서 일족 전부를 재물로 바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야심차게 일족을 희생시킨 것과는 달리 그녀의 싸움은 아직도 결착을 보지 못했으니, 그녀는 이 끔찍한 지진 속에서도 여전히 깨지 않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끄응, 나가 몇을 이곳에 배치해 그녀가 깨어나면 나를 찾아오도록 하고, 몽마들의 거주구는 가장 마지막에 복구하도록 하라.”
어차피 주민도 없는 거주 구역인지라 당장 복구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어쩌면 그녀의 싸움은 미몽의 몽마들의 멸족이라는 결과로 다가올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더더욱 몽마들의 거주구는 대미궁에 필요 없는 지역이 될 것이다.
대미궁의 곳곳을 둘러본 김진우는 메시지 창으로 보았던 것보다 한층 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다운 잼을 쏟아부어 미궁의 복구를 서두르라 지시했다.
음산하게 신음하던 대미궁의 바람 소리가 어느 순간 사납게 바뀌어 가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겨우 살아남은 이들이 대미궁의 뱃속으로 들어갈 판국이라 그는 동분서주하며 미궁의 복구를 지휘했다.
아무래도 해룡의 심장을 사용하는 것은 당분간 미뤄야 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어렵게 구한 해룡의 심장을 대미궁이 미궁을 복구하는 데 쓴다고 꿀떡 삼켜버리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던 탓이다.
그렇게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주인께서 전하시기를, 1차 복원이 곧 시작될 것이니 대비하라 말씀하셨나이다.”
통곡의 군주, 캐서린이 보낸 사자는 미궁의 참상을 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이미 일이 끝난 것 같으니, 민망하기만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