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18)
던전 견문록-218화(218/319)
# 218
던전 견문록
제 219 화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말해줄 것 같았던 겨우살이 나무들은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김진우는 더 채근하는 대신 릭샤샤를 안아들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닦달해 봐야 변하는 것은 없었다. 입 무거운 겨우살이 나무들은 결코 자신이 아는 것을 쉽사리 말해주는 경우가 없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으로선 그들이 릭샤샤가 저리된 원인을 말해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이미 시간이 흘러 때는 놓쳐버리고 말았지만, 그녀가 원래 있어야 할 장소로 돌려놓는 것은 가능하겠지.”
겨우살이 나무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결정이 틀렸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김진우는 자신의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았을 거라 짐작했다.
“바로 돌아가겠다.”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황은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릭샤샤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김진우는 말없이 자신을 둘러싼 겨우살이 나무들을 바라보다 포탈 너머로 발을 내딛었다.
“모리건, 뒤를 따라라.”
“저도!”
그를 따라 모리건이 포탈을 기웃거렸다. 어차피 릭샤샤도 없는 마당에 모리건을 더 이상 지상에 남겨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지라 그는 포탈 너머에서 짧게 뒤를 따르라 말해주었다.
“아아…….”
지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릭샤샤가 신음을 내뱉었다.
“주인님.”
다행스럽게도 상태가 더 악화되려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신음은 막혔던 숨통이 트이며 내뱉은 기침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지저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그녀의 안색이 금세 나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주인님’이라는 한 마디만을 내뱉고는 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여전히 힘겨운 숨을 내뱉고 있었으며, 위독해 보였다.
“도미니크, 사제들을 불러라.”
미궁 내의 부상자들을 치료하느라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사제들이 그의 명령에 오너 룸으로 모였다. 하지만 기껏 그렇게 모은 사제들의 치유 주문은 릭샤샤의 상태를 호전시키지 못했다.
그나마 더 이상 상태가 악화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후우.”
김진우는 복잡한 눈빛으로 창백한 언더 엘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만약 자신이 요정 군주의 계승권을 흡수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아니다.
여느 파편들과 다르게 그는 릭샤샤로부터 그 어떤 조짐도 읽을 수 없었다. 계승권의 전달자라면 의당 지녔어야 할 기묘한 위화감과 힘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애초부터 그 스스로가 요정 군주의 계승권과 연이 없었던 것이다.
설령 연이 닿아 그녀의 계승권을 흡수했다고 한들, 그것이 릭샤샤의 안위를 지키는 길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그가 보아왔던 옛 군주의 파편들은 자신의 힘을 전달해 주는 순간 그 자리에서 빛으로 화해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그건 김진우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나가들만큼이나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해온 릭샤샤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 탓에 그녀가 파편으로 각성한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가 처우를 결정하지 못하고 이제까지 그대로 두었던 것이 아닌가.
진퇴양난의 상황, 그대로 두자니 상황은 호전되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문제의 근원인 파편을 제거하자니 릭샤샤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해답은 근처에 있었다.
“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김진우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탄성을 내뱉었다.
“주인님?”
릭샤샤를 돌보고 있던 도미니크가 갑작스러운 탄성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두 물러나라.”
그렇게 말하는 김진우의 온몸에서 음험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검은 덩어리는 외눈박이 군주의 위엄과도 달랐고, 몇 번인가 보여주었던 광휘 군주의 찬란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마치 송곳니를 들이댄 맹수의 숨결에서 느껴지는 듯한 끈적끈적한 기운. 그것은 굶주린 자의 식욕과 다름없었으며, 갈구하는 자의 탐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만의 권능이었으니,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탐욕스러운 군주의 현현이었다.
김진우가 고개를 숙였다.
작고 오밀조밀한 릭샤샤의 얼굴이 눈 가득 들어왔다. 위독한 지경에도 아름다움이 바래지 않은 언더 엘프의 얼굴. 그는 조금씩, 조금씩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뜻대로 하소서…….”
릭샤샤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충성스러운 나가들조차도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한 기운이 가득 서린 눈빛에도 언더 엘프는 그 눈을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파리하게나마 웃어보였다.
그야말로 생과 사를 초월한 충성. 그 헌신과 봉사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금방 끝날 거야.”
살벌한 기운과는 대조되는 부드러운 미소를 베어 물고 김진우가 조금씩 고개를 숙였다.
언더 엘프의 새파랗게 질린 여린 입술 사이로 더운 숨결이 새어 나오다, 이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스스스슷.
그렇게 의미 없이 흩어지던 그녀의 숨결이 어느 순간이 되자 그의 입속으로 빨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진우는 고작 숨결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아예 릭샤샤의 입을 틀어막고는 직접 그 숨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아아.”
아무 것도 모르는 이가 본다면, 마치 연인들의 애틋한 키스라 생각할지도 모르는 광경, 하지만 최소한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서 그들을 그렇게 달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는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김진우의 모습은 마치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맹수와도 다름없어 보였으니까.
***
언젠가 포로로 잡아온 남작들의 근원을 흡수한 전적이 있었던 김진우는 탐욕의 권능이라면 릭샤샤의 몸속에 웅크리고 있는 요정 군주의 파편을 흡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과연 탐욕스러운 권능이 파편의 기운만을 골라서 흡수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흡수당한 남작들이 그러했듯 릭샤샤가 한 줌 재로 흩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그녀의 근원을 향해 뻗어 나가는 권능을 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언더 엘프 러너, 릭샤샤는 거듭된 성장과 각성 속에서 파편의 힘을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권능의 파편이 모든 이에게 축복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영혼은 권능을 오래도록 담아두기에 너무나 작고 연약했고, 그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살아날 길은 없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탐욕의 권능이 그녀에게 주어진 숙명마저 먹어치움으로써 그녀는 마침내 일회용 그릇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충족감에 아득해지던 정신이 메시지가 떠오르는 순간,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명료해졌다.
[원래대로라면 탐욕의 권능은 파편의 힘뿐만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조차도 먹어치웠겠지만, 당신은 각고의 노력 끝에 오직 권능의 파편만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마침내 도박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와 그녀가 감수한 위험에 비하면 배당금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요정 군주의 파편을 흡수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계승권을 이어받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녀가 지니고 있던 파편은 그저 씨앗에 불과했고, 당신의 품에서 발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말 그대로 약속된 권능의 편린만을 흡수했을 뿐입니다.]연이 닿지 않은 파편을 억지로 흡수했던 탓일까. 릭샤샤가 지니고 있었던 파편이 전해준 것은 그 어떤 권능도 포함되지 않은 순수한 에너지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불확실한 도박에서 승리한 데 이어 다른 것까지 바랄 정도로 그는 파렴치하지 않았으니까.
남작 여럿을 흡수하고도 고작 17퍼센트에 도달하는 게 고작이었던 권능의 포만도가 단번에 99%에 이른 것만 해도 큰 성과라면 큰 성과였다.
“음…….”
뒤늦게 제 품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미약한 움직임을 느낀 김진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가장 먼저 릭샤샤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핏기 하나 보이지 않았던 릭샤샤의 얼굴이 이제는 혈색이 돌아오다 못해 발그레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
순간 과도한 혈색에 또다시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했던 김진우는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오목하게 들어간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었고, 어색하게 벌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은 어쩐지 단내가 풀풀 풍겨왔다.
그제서야 자신이 아직도 릭샤샤의 입술에 입을 맞춘 상태라는 사실을 깨달은 김진우가 슬며시 입술을 떼어냈다.
“아…….”
신음도 탄성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내뱉은 릭샤샤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하지만 끝끝내 감았던 눈을 뜨지는 못하고 조용히 달뜬 숨소리만 내뱉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 김진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주인님!”
아마도 갑작스럽게 끼어든 도미니크의 음성이 아니었다면 조금이지만 릭샤샤를 놀려주었을 것이다.
뒤늦게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눈이 많음을 깨달은 그가 릭샤샤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는 수많은 이들 앞에서 릭샤샤와 입을 맞췄음에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릭샤샤와의 입맞춤은 치료 행위에 가까웠던 탓이다. 아니,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한들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미궁에 속한 모든 것은 애초부터 자신에게 속한 것. 이제 와서 새삼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이제 괜찮아질 거야. 다만 당분간은 안정이 필요할 테니, 도미니크가 직접 신경을 써줘.”
그의 말에 도미니크가 마냥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한 그녀의 눈가에 어른거리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그는 눈치가 없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마음 같아서야 저 충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나가가 서운하지 않도록 포옹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그녀를 안아주는 대신 나직히 이름을 불러주었을 뿐이다.
“도미니크.”
그의 음성에 담긴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신뢰를 넘어선 무한한 애정이 그의 목소리 안에 가득했다. 배려 같지도 않은 배려였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풀이 죽어 있던 도미니크의 얼굴에 다시 화사한 빛이 돌아왔다.
“부탁할게.”
“맡겨만 주세요!”
제 가슴을 몇 번이고 쳐 보이는 도미니크를 바라보던 김진우가 다시 진지한 얼굴을 해보였다.
릭샤샤는 회복이 되었지만 1차 복원이 일어난 지저는 여전히 미지가 가득했고, 해룡의 심장을 통한 대미궁의 전력 보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상황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그가 해룡의 심장 말고도 어디에서 전력을 보강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오너 룸의 상황을 정리한 그가 향한 곳은 새롭게 확장된 나가 마법사들의 연구실이었다.
“키앗!”
그를 발견한 나가 마법사들이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달려와 캭캭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모습이 마치 새롭게 얻은 장난감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 난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김진우는 평소라면 성가셔 했을 나가 마법사들의 호들갑에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둘러싼 나가 마법사들 사이에 반가운 이가 섞여 있었던 탓이다.
“발리셔스?”
“와, 왕이시여.”
이마 정중앙에 보석을 박아 넣은 발리셔스가 어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